3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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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그 동화책을 제 무릎에 두고, 궁녀가 들어오는 것에 맞춰 자리에 서 일어났다는 이유는 내게 저 동화 책에 관련된 것을 말하고 싶다는 의 미였다.
미심쩍었지만 그렇다고 미끼를 안 물 수는 없었던 나는 궁녀가 나가자 조심스레 미리내에게 물었다. “귀비 마마. 그 책은•••  “아. 산야. 보았나요?” 그렇게 말하는 미리내의 얼굴이 확 펴졌다.
그는 해사한 미소를 지으며 동화책 을 집어 들었다. 신데렐라. 표지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주셨답니다. 예쁘 지 않나요? 이러한 복색은 처음 보 는데, 서역에는 이러한 의복들이 많 은가 봅니다.” 묘하게 상기되어 있는 목소리에 나 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느 집에는 이런 거 없지?'의 변형 인가?
황제에게 동화책을 받았다고 자랑 하는 걸까.
“정말 예쁩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선망의 눈빛 을 했다. 자랑을 하니 장단을 맞춰 주어야지.
그런 내 얼굴에 미리내는 한층 더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렇게 웃은 그는 일순 시 무룩한 얼굴이 되어, 동화책의 표지 를 살살 쓸었다.
“하나 지식은 무릇 함께 나누어야 하는 것인데, 통 함께 나눌 이가 없 군요." 그 동화책에 무슨 지식이 있을까. 인생 역전은 한 방이라는 것?
역시 발이 작고 봐야 한다는 것?
나는 신데렐라의 원작 내용을 기억 하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신데렐라
의 두 의붓 언니들의 발에 무슨 일 이 생겼는지 알고 있었다.
저런 말을 하는 건 또 무슨 의도 일까. 꽃은 본래 고고하다고9 통 이해되지 않는 말에 내가 속으 로 고개를 가웃할 때, 미리내가 천 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 ••
미리내는 어느새 은은한 미소를 짓 는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조금 수줍은 얼굴로 내게 그 동화책을 보여 주었다.
“함께 읽을까요?” 그 어린아이같이 해사한 말에 맥이 탁 풀렸다.
•이게 끝이야?
황제 폐하는 나만 총애하신다.
어중이떠중이들과 어울리는 너와 나는 급이 다르다.
이런 게 아니라, 동화책을 같이 읽 자고 지금 이 염병을.
솔직히 짜증이 났다. 그리고 기묘 한 자신감이 솟았다.
이놈•••
'날 생각보다 아끼는 거 아나?' 생각해 보니 그랬다. 이름을 불러 도 되냐고 묻는 것도, 강연에서 나 를 제 옆자리로 데려간 것도. 황제가 내게 동화책을 읽어 준다고 했을 때 함께 간다고 한 것도.
내가 기억하는, 황제만을 맹목적으 로 바라보고 그녀의 옆자리 하나 내 주기 싫어하는 원작의 미리내라면 성립되지 않는다.
하지만, 미리내가 나를 아낀다고 전제한다면, 놀랍게도 말이 되었다.
나는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은 아 이처럼 멍한 얼굴을 했다.
난 무슨 짓을 했길래 이 큰 산을 넘이 버린 거지.
목숨의 위협이 적어도 절반으로는 줄어든 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 내 눈앞에서 독사가 혀를 날름대고 있 있는데 내가 몽구스라는 사실을 알 아챈 기분이다.
가람이 나에게 예상외로 약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처럼 기분이 고조되 었다.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자 미리내 의 얼굴도 함께 환해졌다.
이제의 황제 같은 얼굴에 나는 그 의 앞에서 처음으로 진심으로 웃었
다.
그리고는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제가 어찌 귀비 마마께 그러한 대 우를 받겠습니까. 마음만으로도 소 인은 충분합니다.” 가람에게 말했던 것처럼 노골적이 지는 않았지만 재고의 여지 없는 거 절이었다.
나는 방금 비것 리스트 하나를 이 루었다.
고개를 들자 미묘한 얼굴의, 조금 서운해 보이는 미리내가 보였다.
하지만 어떻게 보나 화나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그에게 양해를 구하고는 정과 하나를 집어 입에 집어넣었다.
씹히는 정과에서 사이다 맛이 났
다.
음. 진짜 맛있네.
궁에 따라 숙수도 달라지는지,  식은 정말로 맛있었다.
미리내의 궁에 있는 것 중에 이게 가장 마음에 들었다.
새콤달콤한 정과를 두어 개 집어먹 은 나는 가지고 들어왔던 함을 꺼내 탁자에 올려 두었다.
“비녀를 돌려 드립니다. 민폐를 끼 쳐 송구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빙긋 웃자 미리내가 서운한 듯이 눈매를 내렸다.
안대를 벗으니 알게 된 사실인데, 그는 표정이 꽤나 다양했다.
안대를 쓰고 있을 때에는 미인도 같던 사람이 안대를 벗으니 피그말 리온의 조각상 같네.
물론 두 모습 다 인간 같지 않다 는 의미다.
“산야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돌려 받을 수는 없지요.”
“저에게는 과분한 물건입니다. 감 히 어찌 쓰겠습니까.” 내 말에 미리내가 깨달은 얼굴을 했다.
나는 머리숱이 적이 저렇게 큰 비 녀를 꽂을 수 없었다.
잠시 고심하던 그가 고개를 갸웃했
다.
“으음, 구슬치기를 한다던가.” 뭐요?
“아니면•••••• 서연에게 주어 보랑구 의 손잡이를 만드는 것이 어떨까요.
그것도 아니면 대장장이에게 맡겨 다른 장신구를 만들어도 좋지요.
가람의 선물을 열어 보며 알게 된 보랑구는 소고 같은 모양에 양옆에 구슬과 끈이 달려 있는, 중국의 전 통 장난감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미리내는 저 비녀로 고작 장난감 따위를 만들라는 이아 기를 하고 있는 건가?
그는 온화하게 웃는 얼굴로 말하며 내게 다시 함을 밀어 주었다.
매끈한 함의 뚜껑이 내 손끝에 닿 았다.
“아, 그 용의 입에 물린 것은 진짜 초대 용의 여의주랍니다. 머리 장식 에 달면 정말 예쁠 거예요.”
이어진 해맑은 말에 나는 단번에 함에서 손을 때었다.
당장 내팽개치고 뛰어나가려는 몸 을 최대한 억누른 결과였다.
역시 나를 아끼는 게 아니었나.
이 비녀를 이용해서 반역죄로 죽게 하려고 했던 걸까?
황가에 축복을 내린 초대 용의 산 산이 부서져 버린 여의주.
그건 원작에서 한 번쯤 '황족이 늘 지니는 용에는 여의주가 물려 있다' 라는 식으로, 소문이 돌고 있다는 듯이 언급된 적이 있었다.
그게 진실이었다는 것을 알았다면 나는 미리내가 내 손에 비녀를 쥐여 주었을 때, 정말 어린아이처럼 패악 을 부려서라도 그것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여의주라니요, 미리내 아륜 씨. 내 가 그걸 버젓이 장난감으로 가지고 놀고 있으면 반역 외의 어떤 것으로 보이겠습니까.
••••송구합니다.”
순간 굳은 내 얼굴과 뒤이어 내놓 은 답에 미리내가 시무룩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는 영 아쉬운 듯이 손끝으로 함 을 두어 번 어루만지다 제 쪽으로 가져7갔다.
그러다 무슨 좋은 생각이 났는지, 미리내가 눈을 반짝 빛내며 나를 바 라보았다.
“하면 그 대신, 내 청 하나는 들어 주지 않겠어요?” 그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움
찔했다. 우선 의심부터 들었기 때문 이다.
  부탁하려고?
“예. 하명하소서.”
“제가 산야에게 동화책을 읽어 줄 수 있게 해 주겠어요?” 미리내는 내가 그렇게 말하기가 무 섭게 대답했다.
목소리도 어던가 다급했다.
그 모습에 나는 움칠 입꼬리를 올 렸다. 이것 봐.
“제 영광입니다.” 나는 기꺼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 다. 그러자 미리내는 안심했다는 듯  이 웃었다.
생각이 저렇게나 얼굴에 훤히 드러 났나.
지금까지는 저 얼굴이 죄다 연기인 줄 알았는데, 예상외였다.
미리내는 엄마 소맷자락을 끄는 아 이처럼 내 소맷자락을 두 손가락으 로 집고 천천히 휘장이 쳐진 곳으로 이끌었다.
반투명한 휘장 너머로 화장한 햇살 이 내리쬐고, 의자의 실루엣이 보였 다.
가까이 가자 그 의자의 모습이 보 였다. 흔들의자였다.
다만 내 궁에 있는 것보다 더 호 화롭고, 더 푹신해 보이는.
“어떤가요?”
• 답네요. 역시 귀비 마마 의 격에•••
기대하는 듯한 목소리에 반사적으 로 눈치를 보며 칭송하던 나는 멈칫 했다.
잠시만. 이럴 필요가 없잖아. “정말 예뻐요.”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나에게 올 불이익은 없다.
나는 산뜻하게 대답하고는 생긋 웃 었다.
“자, 앉겠어요?”
그리고 역시나, 미리내는 내게 미 묘한 시선을 보내거나 상냥하게 협 박하지 않았다.
그는 내게 자리를 권하고는 저도 반대편의 자리에 가서 앉0갔다.
그는 제 손에 들린 휘황찬란한 동 화책을 펼쳤다.
금이나 피리를 연주할 것 같은 긴 손이 동화책의 뒤로 보였다.
가만히 흔들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 던 나는, 새삼스럽게 왜 나에게 이 런 것을 해 주는지 고민하기 시작했 다.
미리내와 황제는 나를 아낀다. 어 째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러했다. 눈에 거슬리지 않아서일까?
하지만 그렇다면 내게 이러한 일들 을 해 주려는 이유는?
조용하고. 웃지 않고. 애교도 없는 아이답지 않은 아이.
학대당했다는 것은 원작의 산야가 있었을 때에도 모두 알던 사실이었
다.
너희는 나를 아낄 이유가 없는데.
얼굴이 예뻐서 그런가.
어리고 예쁜 아이가 도자기 인형처 럼 얌전하니 깨지지 않게 아끼고 싶 은 것?
“옛날 옛적에, 신데렐라라는 한 아 이가 살았습니다.” 하지만 나쁠 것은 없다. 매번 눈치 를 봐야 하던 것이 줄어든 것은 좋 은 일이다.
가끔 불려 가겠지만 그때도 굳이 애교를 떨 필요도 없으니••  다른 후궁들이 날 죽이려 들면 어 찌지.
만류를 막아 주었으니 다른 후궁들 도 막아 줄까?
그러다 정 막지 못하는 상대가 온 다면?
“새어머니와 의붓 언니 둘은 아이 에게 정말 가혹했지요.” 조곤조곤한 목소리에 수마가 물밀 듯이 찾아왔다.
어젯밤 오랫동안 고운과 이야기를 나눈 탓에 잠이 부족했고, 푹신한 흔들의자에 앉아 조용한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금세 눈이 감겼다.
깨어나려던 나는 생각을 바꾸었다. 동화를 모두 듣고 '잘 들었습니다' 하고 일어나기도 에매하니 이대로 잠든 적을 한다면 미리내는 내 궁녀 를 불러다 나를 데려가게 할 것이
다.
설마 밖에 그냥 던져 버리지는 않 겠지. 하는 염려가 습관처럼 뒤따랐
다.
이제는 기우가 되어 버린 그 걱정 에 나는 옅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신데렐라는 용 대모의 도움으로 아름다운 예복을 입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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