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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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화룡궁은 확실히 낮과는 달랐 다.
그고 웅장한 건물이 달빛 아래 요 요했고, 그 안에서 들려오는 아이의 울음소리까지 더해져 꽤 무서웠다.
나는 대전 안으로 들어가기 전 한 번 심호흡을 했다.
그냥 얌전히 잘 것이지, 인간도 아 닌 것에게 무느 오지랖이냐고 말한 다면 할 말이 없지만. '내가 위선적인 인간이라 그래.
너무 평범한 아기처럼 보여서 제사 로 아이를 달랜다는 걸 가만히 보고 만 있지는 못하겠다.
얼른 가서, 잠깐만 달래 주고 돌아 가자.
'산아에게 시간을 줘야지.
밤이기는 하지만 아직 자정이 되지 않은 시간이다.
나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넓다란 화룡궁의 대전에는 아이의 울음소리만 쩌렁쩌렁 울렸다. 나는 최대한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아이에게 다가7갔다.
아이는 옥좌의 한가운데에 앉혀져 있었다.
높은 자리이기는 하지만 어린아이 가 앉기에는 지나치게 딱딱했다.
울던 아이가 나를 보고 놀란 듯 잠시 울음을 그졌다.
그러더니 또 금세 얼굴을 찡그렸 다.
그게 너무 인간 같아서 나는 마음
이 불편해졌다.
소1-으 뻗어 아이를 안으려던 나는 멈칫했다.
힘이 부족해서 아이를 놓질 것 같 았다. 나는 천천히 아이의 가슴을 토닥였
다.
“쉬이, 아가. 괜찮아.” 잠시 내게 시선을 두었던 아이는 다시 울기 시작했다.
악을 쓰며 오열하지도 않았고, 투 정을 부리듯 칭얼거리지도 않았다. 다만 숨마다 울음이 붙어 있었다.
그 모습이 괜스레 짠했다.
옥좌가 넓었다. 황제가 아닌 자가 앉는 것은 불경인 걸 알지만, 아무 도 안 보는데 뭐 어떤가 싶었다.
나는 아이의 옆자리에 앉아 아이에 게 무릎을 내주었다.
작은 머리통이 꽤 묵직했고, 따뜻 했다.
정말 살아 있는 사람 같아.
여전히 울음소리는 소름 끼치지만, 처음 보았을 때처럼 기피하고 싶지 는 않았다.
나는 아이를 토닥이며 고운에게 말 을 걸었다.
“알고 있었지? 내가 밤마다 일어나 서 돌아다니는 거.”
여상한 내 질문에 고운이 잠시 머 뭇대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릴 줄 알9갔지.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누군가 조력자가 있었을 거라고 생 각했다.
'산야가 황궁에 살았었다고 해도 동궁은 처음이고, 늘 궁녀들의 시중 을 받으며 지냈다.
그랬던 만큼 붓과 종이를 찾거나 내게 받은 서신을 숨기는 건 저 혼 자만의 힘으로는 어려웠을 테니까.
고운은 밤에 종종 나를 찾아왔었으 니 마주쳤을 거라 생각했다.
밤마다 잠을 자지 않았던 이유도 늘 깨어 있던 나 때문이었겠구나, 하고 나는 어렴풋이 짐작했다.
“밤에 마주치는 나는 낮의 나와 조 금 달랐지?”
내 말에 고운의 눈이 휘둥그래졌
다.
고운이 얼떨떨히 고개를 끄덕였다. 밤의 산아는 내가 아니니,  처음 보았을 때 저 아이를 알지 못 했겠지.
나 또한 '산야가 아니니 밤에 있 있던 일을 기억하지 못했을 테니까. 그러니 고운이 그 둘을 동일 인물 로 알고 있다면, 내 이상 행동이 참 불안해 보였을 것이다.
“밤마다 무엇을 하셨는지 기억하십 니까?” 고운은 절박한 목소리로 그렇게 물 었다.
밤의 산아에게 낮의 일들을 몇 가 지 물어보았던 모양이다.
그에 나는 조금 난처해졌다.
사실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내가 이 몸에 빙의했는데, 그 몸의 원주인과 몸을 공유하고 있다.
네가 밤에 본 것은 산야이고, 지금 보고 있는 것도 산야이다.
그렇게 말해 줄 수도 없는 것 아 닌가?
'걱정시키고 싶지는 않아.'
그렇다고 해서 내가 밤만 되면 기 억력이 퇴화된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잠시 고민하던 나는 고운에게 역으 로 질문했다.
“왜 밤마다 날 찾아왔어?”
고운이 이상한 것을 눈치채지 않0갔 나 싶었다.
겉모습이 똑같으니 의심하기가 쉽 지 않겠지만, 태도가 다를 테니.
“마마께서는 밤이 되면 조금 변하 십니다.” 그리고 역시나, 고운은 그렇게 대 답했다.
“어떤 점이?”
나는 고운이 떠올린 것에 살을 붙 이는 식으로 설명할 요량으로 물있
다.
“그리 많이 다르시지는 않습니다. 허나 제 눈에는•••
고운은 스스로도 설명하기 어렵다 는 듯 말끝을 흐렸다.
“많이 외로워 보이십니다.”
조심스레 꺼내 놓은 말에 나는 멍 해졌다.
네 눈에는 '산야'가 그렇게 보였구
나.
그래.
외롭겠지.
한평생 증오 속에 살다가 아무도 없는 밤에만 깨어나야 하는 아이인
데.
“그래서 늘 찾아왔었니?” 고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밤에 늘 깨어 있었다는 말을 아무 렇지 않게 했지만, 그래도 나는 그 애를 혼낼 수가 없었다.
단지 외로워 보인다는 이유로,  찾아와 곁을 지켜 줬었구나.
머뭇대던 나는 꼭 해야 할 말을 했다.
” “내게 찾아와 줘서 고마워 고운은 밤의 그 아이를 나라고 생 각하고 있었다.
그런 나를 늘 생각해 줬다는 것이 고마웠다.
그리고, 내가 미처 보듬지 못한 그 아이를 지켜 주었다는 것도. 그 아이의 밤이 마냥 혼자가 아니 었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웠다.
다른 사람이라고 밝힐 수가 없어 나라고 말했지만, 그 아이였어도 이 렇게 말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네가 있어서 덜 외로웠어.” 밤을 몰아내는 태양은 아니지만, 어둠 속의 등불 같은 다정.
아마 '산야'가 편안하다고 대답한 이유 중에 고운이 있지 않을까.
고작 그 두 마디를 하며 고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고운이 웃었 다.
결핍이 있는 누군가의 곁을 지기는 것은 쉽지 않다.
밤을 매번 샜으니 너도 피곤하고 힘들었을 텐데, 어떻게 내게 힘들단 말 한 마디 안 했니. 내가 의지될 만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나 싶어 미안했다.
“내가 너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 건, 널 아끼지 않아서가 아니야.” 사연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만, 고운의 사연은 조금 더 기구할 거라 생각했다.
저렇게 어린아이가 나와 만나기 전 까지 목소리 한 번 내지 않은 것도, 그림자가 된 것도 모두 사연이 있었 을 테니까.
내가 그걸 묻지 않은 이유는 고운 이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아서였다.
꼭 과거뿐만이 아니다.
나는 굳이 고운에게 자신의 이야기 를 캐묻지 않았다.
그게 내가 너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의미는 아니었는데, 너는 그렇게 느 꼈을까.
“나는 전에 내가 소원을 들어준다 고 했던 것도, 네가 내 비밀 장소를 알고 있었던 것도 모두 기억하고 있 어.”
그만큼 나는 네게 관심을 가지고 있어. 그러니까••
“네 이야기를 하고 싶어지면, 언제 는지 말해 쥐.”  늘 들이줄게.
내 대답에 고운이 머뭇댔다.
•••어찌 그리하십니까?” 그 말에 나는 입을 꾹 모있卍다. 예 상은 했지만 정말 그랬나 봐. “어찌 그리하나니. 무슨 의미야?” “그것이, 왜 저에게•••  “너에게?”
“그렇게까지•••
괜히 놀리자 말주변이 없는 고운은 설명을 숫제 울먹이듯 했다.
•••마음을 쓰십니까?”
떨리는 맺음말에 나는 피식 웃었
다.
서운하네, 이 녀석아.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렇지만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었
다.
내가 표현이 많이 없기는 했지.
나는 새삼 반성했다.
속으로 아무리 아끼고 사랑한다 해 도 그걸 표현하지 않으면 상대방은 아무것도 모르는데.
“그야 널 많이 좋아하니까.”
유일하게 오롯이 사랑하고 아낄 수 있었던 아이.
모두 이런저런 이유로 마음을 터놓 지 못했을 때, 고운은 안식처 같은 아이였다.
고운은 늘 고요했지만 나를 믿고 좋아해 준다는 것이 노골적으로 드 러났다.
그런 네가 내 곁에 있어 준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힘이 됐는지, 아마 년 모를 거야.
내 말에 고운의 귓가가 새빨개졌 다. 노골적인 애정 표현이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저도, 마마를  “많이 좋아해?” 장난스레 말을 끊자 고운의 얼굴이 완전히 새빨개졌다.
그대로 펑 터질 것 같았다.
희멀건 밀가루 반죽 같던 얼굴이 저렇게나 붉어진 걸 처음 보았다.
참지 못하고 국국 웃자 고운이 슬 쩍 시선을 피했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 에 말해 줄걸.'
좋아한다, 사랑한다라는 말은 꼭 연인 사이에만 쓰는 게 아니다.
그러니 부끄러워하지 않고 더 많이 표현해야 하는데, 그게 참 쉽지 않
다.
'엄마한테도 해 주면 좋아할 텐데.' 문득 그런 생각이 났다. 나는 아이를 토닥이는 것도 잊은 채, 그대로 잠시 멈췄다.
엄마 생각을 하자 기분이 가라앉았 다.
나는 벌써 며칠째, 엄마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내가 먼저 찾아가지 않았고, 엄마 가 동궁으로 오겠다는 것도 거절했 다.
내가 엄마를 피하기 시작했던 것은 '산아'와 이야기를 나눈 뒤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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