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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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반응에 나도 덩달아 의아해졌
다.
“제게 서신을 보내셨잖아요.” “그런 적 없다.” 딱 잘라 말하는 가람의 모습에 나는 혼란스러웠다.
저게 진짜로 본인이 아닌 거야, 아니면 엄청난 연기인 거야?
“솔직히 말씀하서도 화 안 낼게 요.”
화낼까 봐 그러나 싶어 그렇게 덧 붙였지만 가람은 여전히 영문을 모 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정말 아니야. 너야말로 무슨 서 신을 받았길래 그래?”
그 모습이 퍽 진솔해 보였다. 나 는 반신반의하며 가져온 서신을 내밀었다.
“자고 일어나 보니 머리맡에 있었 어요."
가람이 서신을 펼쳐 보았고, 금세 얼굴을 찌푸렸다.
“누가 이런 멍청한 서신을 씨? 쓴 것도 없으면서 답장을 달라니, 뻔 뻔하기 그지없군.”
그거 누가 썼을 줄 알고 그렇게 신랄하게 욕을 하니.
엄마일 수도 있고, 미리내일 수도 있고, 고운일 수도 있는데.
'고운이면 사과하라고 달달 볶을 테다.'
슬쩍 가람을 흘겨본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마께서 쓰신 것이 아니라는 것 이지요.”
“그럼. 누가 봐도 내가 쓴 것이 아니지 않아?”
어,  대답을 못 하겠네.
시선을 피하자 가람이 서운하다 는 듯 말했다.
“아무렴 내가 서신을 저따위로 쓰 겠어?"
•••그러니까, 누구나 그릴 수도 있지요.”
언제나 모든 가능성은 열어 둬야 하는 것 아니겠어.
슬쩍 수습하자 가람이 나를 한 번 흘겨보고는 표정을 풀었다. 넘 이가 준다는 의미인 것 같았다.
“네 궁녀 중에 유난히 촐싹대는 아이가 있다고 들었다.” “희사 말씀이세요?”
곧바로 대답하는 게 희사에게 좀 미안했지만, 맞았는지 가람이 고개 를 끄덕였다.
“그 궁녀가 썼을 수도 있지.”
제법 나쁘지 않은 추리였다. 희사 와 가람의 성격은 비슷한 부분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희사가 내게 스스 럼없어도 내가 제 상전인데.
아무럼 반말로 서신을 썼을까
'혹시 모르는 일이기야 하지.'
사실 가람이 아니라는 게 좀 충격 적이다. 철석같이 가람일 거라고 믿 고 있었는데.
역시 거짓말이 아닌가 싶은 의심 을 다시금 하며 고개를 들었다.
가람이 슬그머니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유를 물으려던 찰나, 그가 조심 스레 입을 열었다.
“이제 점심시간이고, 숙수의 음식 솜씨가 제법 좋은데•••  월 말하려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네, 그럴게요.
나는 뒷말을 듣지도 않고 대답했 다. 그것만으로도 가람은 환하게 웃 었다.
점심을 맛있게 먹은 나는 가람과 한참 이야기를 하고 나서야 궁을 나 섰다.
배가 적당히 불렀고, 살살 흔들리 는 가마가 편안했던 탓에 나는 깜 빡 잠들고 말았다.
졸았다고 말하기에는 조금 깊게 잠든 모양인지, 가마에서 눈을 감 은 나는 내 침상에서 눈을 떴다.
장밖에 예쁘게 노을이 지고 있었
다. 꽤 많이 잔 모양이다.
일어나서 무엇이라도 할까, 다시 잘까 고민하는데, 문밖에서 낮고 작 은 목소리가 들렸다. “다른 궁에 배정받고 싶어." 궁녀의 목소리였다. 내 궁녀들은 자신의 고충을 내게 잘 말하지 않았다.
상전에게 이게 힘드니 저게 힘드 니 떠들 수 없으니 그게 당연한 것이겠지만, 때로 묻고 싶을 때가

있었다.
아무리 잘 대해 준다고 해도 분

o口61드1- 01 으 1- 01 - 0 테니까.

목소리가 익숙하지 않아 정신을 집중하고 경청하는데, 익숙한 목소 리가 들렸다.
'희사다.'
“얘, 너 헛똑똑이구나. 다들 아는 걸 너 혼자 모르니?"
“그래, 그래. 나는 헛똑똑이다. 총 명한 네가 이야기 좀 해 봐. 궁을 왜?”
“그아, 이제 공주마마께서는 끈 떨어진 연이잖아?” 태연한 궁녀의 말에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여란 가의 뒷배가 있었으니 공주 마마께서 그리 권세를 누리실 수 있으셨던 거지. 사가의 힘이 아니 있다면 마마께서 봉작이나 받으셨 겠니."
내 곁에 서 있던 고운이 조용히 문으로 다가갔다.
나는 고운의 손을 붙들어 만류했 다.
맞는 말이지. 기윤이 거들지 않았 다면 힘들었을 테니까.
“마마께서 아버지와 사이가 각별 하시다 들었는데, 이번 일도 마마 께서 눈감으셨는지 어찌 알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눈감은 건 아닌데. 내가 그거 막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다고.
“지금 당장은 폐하께서 총에하시 니 황실의 피 한 방울 안 섞인 마 마께서도 동궁에 머무시지만, 원자 아기씨가 태어나시면 금방 달라질
걸.”
아, 이건 좀 아팠다.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묻어 뒀는 데, 자꾸만 들쑤서진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하고 싶 지 않은데, 그 가정이 너무 그럴듯 하다.
나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속이 답답했다.
“하여튼, 줄을 잘못 댔어. 귀비전 에 갔어야 했는데.”
투덜거리는 목소리에 가시가 돋 혀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일이 힘들거나 누군가 텃세를 부 리는 줄 알았다.
내가 목소리를 구별하지 못하는 궁녀라면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궁녀일 테니까.
모두가 내게 상냥할 거라 생각하 는 게 바보 같은 짓이지.
궁인들은 제가 모시는 상전에 따 라 제 세력이 달라지니 이해하지 못 할 것도 없지만, 그래도.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서운했다.
그래서 나는 희사가 지금껏 잠자코 듣고 있었다는 사실을 미처 알아차 리지 못했다.
“희사. 내 말 들었어?”

“그럼 왜 입을 꾹 다물고 있어. 대답을 좀- 악!”
불시에 튀어나온 비명에 나는 깜짝 놀랐다. 뒤이어 상냥한 희사의 목소리가 들 려왔다.
조용히 해, 공주 마마 오수 드셨 는데 너 때문에 깨실라.”
그 말에 잠시 정적이 지나7갔다. 그리고 이내 더 크게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악! 아악!” 아까와는 달리 조금 인위적이었다. 소리를 질러 날 깨우는 게 목적인 것 같았다.
희사가 월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 지만, 내가 보는 앞에서 폭력을 행 사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나는 말동히 눈을 뜨고 침상을 몇 번 굴러다니다 눈을 감았다.
아, 갑자기 막 잠이 오네. “아! 아파, 이것아! 아악!” 주변이 고요하네.
내가 잠귀가 좀 어두워서 말이야. 그렇게 눈을 감고 있다가, 또 까무 룩 잠들었던 것 같았다.
“마마. 희사에요.”
나는 자그마한 목소리에 눈을 떴 다.
희사의 목소리가 잔뜩 가라앉아 풀이 죽어 있었다.
“아직 주무시고 계시면, 송구하지 만 잠시 들어갈게요.”
그 말이 끝나고 조용히 문이 열렸
다.
희사가 사박사박 내게 다가왔다. “마마. 주무셔요?”
재차 묻는 말에 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눈꺼풀이 떨리지 않기 하 기 위해 꽤 힘을 쏟9갔다. “마마께서는 아까부터 주무셨니?”
희사가 고운에게 물었고, 고운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저 나쁜 년••• • 아니, 나쁜 것
서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까는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대처 해 놓고, 많이 서러웠던 모양이다.
“우리 마마께서 왜 끈 떨어진 연 이아. 아주 튼튼하신 분인데. 혹여 떨어지시면 이때. 내가 바느질을 그 리 잘하는데, 다시 붙여 드리면 되
울먹이며 중얼거리는 말이 귀엽고 도 짠했다.
나는 울음과 웃음이 동시에 나올 것 같아 몸을 뒤적여 얼굴을 묻었
다.
깨어나나 싶어 잠시 움직임을 멈 췄던 희사가 슬그머니 몸을 일으 켰다.
그녀가 조심스레 깔린 이불을 빼내 몸 위에 덮어 주었다.
세심한 손길이었다. 八1-
가끔 밤마다 이불을 덮어 이가 있었다.
내가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손을 움직여 서연일 줄 알았는데, 희사 였구나.
“마마께서 잠드셨을 때 제가 얼마 나 무서웠는지 모르실 거예요.”
희사가 훌쩍 코를 들이마시며 중일 거렸다.
“깨어나셔서 다행이에요. 우리 마
정말, 정말 다행이에요.
희사는 몇 번을 더 그렇게 중얼거 렸다.
희사가 밤마다 내 이부자리를 살펴 줬다.
그걸 꽤 감동적인 방법으로 알게 된 나는 희사가 이 서신의 주인이라 생각했다.
비록 편지 내용은 반말이었지 마••
하지만 희사가 쓴 일지를 우연찮 게 본 나는 희사를 추궁하려는 것 을 그만두었다.
'필체가 달라.'
희사는 아주 예쁜 궁체를 썼다. 하지만 내가 받은 서신은 한글을 쓰는 것 같은 네모반듯한 글씨였
다.
결국 나는 하는 수 없이, 서신이 시기는 대로 하기로 했다.
[안녕.
서신 잘 받았어.
답장을 써 달라고 해서 쓰고 있 는데, 쓸만한 게 마땅히 없네.
오늘 달이 밝아. 바람이 좀 선선 하다.
난 산야야.
년 누구야?
답장 부탁할게.]
다소 맥락이 없기는 했다.
그래도 오는 서신이 맥락 없었으니 가는 서신도 맥락이 없어야 하지 않 겠는가.
나는 흡족하게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인 뒤 종이를 두 번 접었다. 서신이 머리맡에 있었으니, 똑같 이 머리맡에 두면 보려나.
두면서도 긴가민가했지만, 나는 속는 셈 치고 두자는 생각으로 잠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나는 내 머리맡에 있는 종이를 발 견했다.
처음에는 어제 내가 쓴 서신인가 했지만, 미묘하게 접힌 것이 달랐 다.
서신을 열어 보자 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답장이 왔어.' 서신은 어제와 비슷했다.
하지만 이제 상대는 내 이름을 불 렀다.
[안녕, 산아.
그러게. 바람이 시원하다.
내 이름은 그냥 말해 주기가 좀 어려워.
맞춰 볼래?
이번에도 답장 부탁해.]
그걸 끝까지 다 읽은 나는 얼굴을 와작 구겼다.
'얘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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