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나는 날이 밝자마자 화룡 궁을 찾았다.
화룡궁의 궁녀들은 갑작스러운 내 방문에도 당황하지 않았고, 폐하께 내가 왔음을 고했다.
폐하께서는 이미 정복을 입고 정무 를 보고 계셨다. 폐하가 나를 보고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산야?”
“초비가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간 밤 평안하셨나요?”
“평안하였단다. 이리 이른 아침부 터 무슨 일이니?” 그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버지께서 좋은 찻잎을 주셔서 폐 하께도 꼭 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낮 시간의 폐하는 너무 바 쁘신 탓에 나를 만나 주실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아침 일찍 일이나 화룡궁을 찾은 것이다.
사실대로 말하기 민망해 입을 다물 고 웃자 폐하도 더 캐묻지 않으셨 다.
대신 이어진 말은 그리 달갑지 않 은 말이었다.
“내 지금은 너를 맞기 어려울 듯한 데, 다음번에 오는 것이 어떠하나?”
다음번이라니. 제게 시간을 잘 내 주지 않으시잖아요.
지금은 저 말고 다른 객도 없지 않나요?
투정 섞인 그 말이 툭 튀어나올 뻔했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심술 맞은 계집에 같으니.'
나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그리 착 하지 못했다. 아버지와 폐하께 감사 하지는 못할망정 늘 이리 아쉬워한 다는 점에서 그랬다.
'어차피 찻잎만 드리려고 했던 거 잖아.'
폐하는 다음번에 뵈어도 괜찮아. 어제도 뵈었고, 오늘도 뵈었으니까. “별다른 일이 있어 온 것이냐?"
“아닙니다. 그저 사가에서 좋은 차 를 보내어 폐하와 나누고 싶었을 뿐 이에요.”
나는 차통을 꺼내 폐하께 공손히 내밀었다. 한 번도 마셔 보지 않은 자였다.
귀한 차라 하셨으니 폐하께 드렸다 하면 아버지도 기뻐하실 거야. 한번 마셔 보고 싶었지만, 다음번 에 아버지께 달라 하면 되니까.
“허면 신접은 이만 물러나겠습니
다.”
“그래. 잘 가거라.”
폐하께서 상냥히 답해 주셨다. 나 는 고개를 숙이고는 뒷걸음으로 방 을 나섰다.
탁, 하고 문이 닫히자마자 공기가 혹 싸늘해지는 것만 같았다.
복도에 줄지어 서 있는 수많은 궁 인들. 그들의 차가운 시선을 받으며 나는 담담히 걸었다.
화룡궁은 유난히 궁인들의 수가 많 아서, 내게 꽂히는 눈동자의 수도 많았다.
어딜 감히 보냐고 소리 지르고 싶 었지만 이곳은 폐하께서 계신 화룡 궁이다.
일전에 한 번 내가 소리를 내질렀 을 때, 폐하께서 나를 바라보시던 싸늘한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서둘러 발을 놀려 화룡궁을 빠져나왔다. 왜인지 모르게 숨이 갑 갑했다.
실내에 있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밖으로 나오고 나서도 그 이유 모를 갑갑함은 여전했다.
나는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정 처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렇게나 걷던 내가 도작한 곳은 화서궁의 뒤뜰이었다.
돌보지 않아 잡초들과 들꽃이 아무 렇게나 자라난 곳. 하지만 그 어디 보다 햇살이 잘 드는 곳.
그곳에 도착하고 나서아 숨이 깊게 쉬어졌다. 나는 예복을 자려입었다 는 것도 잊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
다.
아, 흙이 묻었을 텐데.
“오윤, 돗자리를 좀-
오윤을 찾아 고개를 돌렸던 나는 그대로 멈췄다. 뒤에는 아무도 서 있지 않았다.
화가 치밀었지만, 당장 보이지 않 는 사람에게 어떻게 화를 내나.
나는 한숨이나 내쉬고는 그대로 드 러누웠다.
새파란 하늘에 흰 구름들이 떠갔
다. 시원한 바람이 나를 도닥였다. “예쁘다•••
이 황궁 안에서 내가 좋아하는 몇 안 되는 풍경 중 하나였다. 온갖 화려한 정원들도 이보다 못했 다. 오직 나만의 정원이었다. 폐하나 아버지를 모셔 오고 싶었는 데, 다들 괜찮다고 하셨지.
그 생각을 하니 조금 울적해졌지 만, 나는 고개를 내저어 생각을 날 렸다.
숨만 가만히 내쉬고 있자니 구름이 흘러가는 모습이 보였다.
유난히 하늘이 높은 것을 보니 내 생일이 머지않은 것 같았다.
'이제 열셋.'
성년까지 오 년 남짓 남은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공연히 마음이 들떴 다.
성년이 된 나는 어떨까. 지금보다 기는 많이 커 있겠지.
모두를 올려다봐야 하는 신장은 불 편했다. 자꾸 소매와 옷자락에 얻어 맞았다.
손도, 발도 커질 거고. 침상에서 내려올 때에도 뛰어내리지 않을 것 이다.
그렇게 된다면•••
“떠날까?”
문득 내뱉은 말이었다. 내가 한 말 에 나는 깜짝 놀랐다.
떠난다니. 어디로?
허울뿐인 후궁이기는 하지만, 나는 황제 폐하와 혼인한 이었다. 떠날 수 없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평생 이곳에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자 또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여행을 갈 수 있지 않을 까.
나는 이능도 없고, 폐하의 후계자 를 낳아 드릴 수도 없는 몸이니 출 궁이 찾다 해도 문제될 것이 없을 것이다.
광활한 바다가 펼쳐져 있다는 해연 에도 가 보고 싶고, 사시사철 눈이 내린다는 설제에도 가 보고 싶었다.
성년이 되면 지금보다 훨씬 커 있 을 테니, 가능할지도 몰라.
그리 오래 떠나 있다가, 가끔 폐하 나 아버지가 뵙고 싶어 돌아온다면.
“그때는 만사를 제지고 나를 맞아 주시겠지?” 간만에 보는 것일 테니 말이야.
상상만으로도 좋은 것이었다. 나는 방긋 웃었다.
이튿날, 나는 어렴풋이 들려오는 어수선한 소리에 눈을 떴다.
늘 조용하던 화서궁답지 않은 소란 이었다. 일어나 앉은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장밖에 벌써 해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오윤이 날 아직까지 깨우지 않고 무일 하고 있는지.
“이 무슨 소란이나!”
바깥까지 들릴 만큼 크게 소리를 질렀지만 대답이 없었다. 나는 이를 갈며 침상에서 내려와 문을 광 열어 젖혔다. 그리고 곧장 가로막혔다.
처음 보는 궁녀들이 문을 가로막고 있었다. 폐하께서 새로 보내 주신 궁녀들인가?
“너희들은 누구나?”
그 물음에 그들은 잠시 입을 다물 었다. 그러고는 다른 대답을 꺼냈다.
“마마께서는 지금 죄인의 신분이시 니, 함부로 나가실 수 없습니다.”
차갑게 떨어진 말이 갑작스러웠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이나. 죄인이라
그리 묻자 궁녀가 이를 꽉 깨물었
다. 분노를 참듯 일렁이는 얼굴이 나를 무섭게 쏘아보았다.
“명백한 상황임에도 폐하께서 근신 만을 명하셨으니, 폐하의 은혜에 감 사하십시오.”
궁녀가 나를 우악스레 밀어 나는 얼결에 방 안으로 떠밀렸다. 문이 쾅 닫혔다.
잠시 멍하니 있던 나는 성큼성큼 다가가 주먹을 쥐고 문을 두들겼다.
1- 헛소리를 하는 것이나. 당장 열지 못에”
단단한 문은 내가 아무리 두들겨도 =들리지조차 않았다. 손이 아파 왔 지만 계속 두들겼다.
“폐하를 뵈어야겠다. 그러니 어서, 열어!” 왈각 소리를 지르자 목소리가 갈라 졌다.
하지만 닫힌 문은 다시 열리지 않 았고, 돌아오는 대답 또한 없었다.
한참 문을 두들기던 나는 지져 자 리에 주저앉았다.
왜, 대체 왜?
내가 무일 잘못했기에?
나는 잘못하지 않0갔어. 적어도, 내 말이라도 들어 달란 말이야. “이럴 리가 없어.”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 폐하께서 이러실 리가 없어.
그러니 폐하를 뵈어야 하는데.
나는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높고 단단했다.
어떻게 나가서 폐하를 뵙지?
그러던 와중, 발걸음 소리가 들렸 다.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고, 이내 문 앞에 멈춰 섰다. “여식을 보러 왔습니다.” “아니 됩니다.”
“이제 다시는 보지 못할 여식에게 작별 인사는 해야 하지 않습니까,
익숙한 목소리가 애처롭게 호소했 다. 아버지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고, 아 비지가 보였다. 나는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아버지 에게 달려7갔다.
“아, 아버지. 이게 무슨 말인가요? 제가 죄인이라니요.”
나는 무고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사실을 잘 아실 것이다.
“저는 정말로 폐하께 불충한 적이 없어요. 알고 계시지요. 예?”
아버지는 여란 가의 가주이시니 폐 하를 뵐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 무고함을 알려 주실 거야.
그런 내 간절함에 화답하듯이, 아 비지가 웃었다.
“미 기하 거 ”
그 온화한 얼굴과 상반되는 차가운 목소리가 내리꽂혔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나 싶었 다. 아버지는 한 번도 내게 저리 말 씀하신 적이 없었다.
“내가 예상했던 것은 네가 그것을 후궁들에게 먹이는 것이었는데, 통 째로 폐하께 드릴 줄은 미처 몰랐구 나.”
성가신 일이라는 듯이 아버지가 인 상을 찌푸렸다. 한숨을 내쉬더니, 다 시 내게 고개를 돌린다.
“그래도 그나마 잘된 일이지. 이제 너를 다시 보지 않아도 되니 말이
다.”
드럽게 웃는 얼굴이 지금껏 내가
알던 아버지와 같았다. 그 때문에 더 아버지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
다.
“이런. 아직 몰랐구나.” 아버지가 안타깝다는 듯이 웃었다.
“아가. 나는 세상에서 너를 가장 증오한단다.”
그토록 상냥한 어조로, 내게 조곤 조곤 말해 주었다.
“영악한 척 머리를 굴리는 것도, 황제에게 개처럼 복종하는 것도, 내 게 애정을 구걸하는 것들도 모두 역 겹기 그지없어 ” 그저 머릿속이 멍했다. 의문조차
들지 않았다.
“폐하께서 너를 죽이지 않는 것은 조금 의외더구나. 하지만 지금껏 그 랬던 것처럼 네가 활개 치며 다닐 수는 없겠지.”
잠시 몸을 숙였던 아버지가 몸을 일으킨다. 모든 일이 끝났다는 듯이.
“네가 더 이상 쓸모가 없으니, 이 생에서 다시 보는 일은 없겠구나.”
뒤돌아 가려는 그의 옷자락을 나는 가까스로 붙들었다.
간신히 그 물음이 튀어나왔다.
여태껏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는 줄 알았다. 다른 자식들만큼 무조건적 인 사랑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가없 이하는 줄 알았다.
이렇게나 나를 증오할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제가 월 잘못했나요?”
내가 무일 했길래, 이렇게나 나를 미워하나요?
그런 내 질문에 아버지가 처음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이유는, 글쎄.”
“그저 나는 너를 사랑할 수가 없구 나.”
“그리 어여뻐 보이지 않아 눈도, 마음도 가지 않는 성가신 계집아이. 너는 언제나 그랬단다.”
마지막까지도 아버지는 상냥했다. 상냥하게 내 손을 뿌리치고는, 내가 아무리 에를 써도 열지 못했던 문을 열었다.
“폐하께 한 번 빌어 보려무나. 혹 너를 가없게 여기실지도 모를 일이
바깥에 서 있던 궁녀들이 어느새 자취를 감췄다.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는 동안 나는 내내 아버지의 말을 곱씹었다.
이제, 더 이상 쓸모가 없다고.
다시 볼 일이 없다니.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무섭 도록 차가운 눈동자들이 떠오른다.
내가 폐하께 드린 찻잎이 탈이 났 다.
그에 황제 시해범으로 몰린 것이라 면, 그래. 아버지의 말이 맞0갔다.
그들이 날 죽일 거야.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나 경황없이 달렸다. 넘어질 듯 휘청이는 나 를 아무도 잡지 않았다.
정처 없이 향한 곳은 화룡궁의 후 원이었다. 내가 마주한 그곳은 역설적이게도 아름다웠다.
흐드러지게 핀 봄꽃. 아름다운 연 인들. 해사한 웃음소리.
나만이 제외되어 완벽해진 정경.
발을 내딛는 순간, 그것은 여름밤 의 꿈처럼 산산이 부서진다.
“살려••• •• 주세요, 폐하.”
순식간에 나를 향하는 차가운 눈초
리.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다는 적의 가 여과 없이 나를 향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그것들은 단 하나도 익숙해지지 않아, 나는 입술 을 꾹 깨물어 눈물을 참고는 호소했
다.
“제발 살려 주세요.” 죽기 싫었다.
살아오며 기쁜 날은 너무도 적었지 만, 그럼에도 살고 싶었다.
성년이 되면 여행을 가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이 바로 어제였다.
아직 성년까지는 오 년이라는 시간 이 남아 있다. 나는 이제 겨우 열셋 인데.
“잘못했어요•••
잘못을 빌면서도 서러웠다. 내가 무일 그리 잘못했나.
이제 나는 아무것도 없어. 친구도 없고, 가족도 없고, 내게 남은 것은 이것뿐이다.
그때조차 나는 열셋이었고, 아이처 럼 천진한 오해를 했다.
어쩌면 그렇게도, 황제를 믿었을까.
“그저 넘어가는 것은 불가합니다, 폐하.” 드물게 딱딱한 미리내의 목소리. 하지만 산아는 황제의 목소리에 눈 을 홉떴다.
여상한 목소리였다. 후원에 꽃이 피었구나, 하고 말하듯 평온한.
미리내의 대답에 황제가 고개를 돌 렸다. 난처하다는 듯한 미소가 서린 얼굴이었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설마. 설마 당신이 그릴 리 없지. 기우는 금수조차 그리 대하면 정을 주는데, 하물며 당신이 내게 그럴 리가 없지.
“미안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