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이와 작별한 날, 나는 울지 못했다.
알아채지 못한 눈물이 딱 한 방울 흘렀지만, 그게 다였다. 나를 맞이하며 우는 엄마를 보고도 눈물이 더는 나지 않0갔다.
방 밖으로 나서자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걱정 어린 눈빛에 나는 멋 찍게 웃어 보였다. 그러자 그들이 눈물을 글썽였다.
“이제 괜찮으셔요?”
다정한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나는 그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 며 웃었다.
“다, 다행이에요.”
우리 전하, 홀로 고생하시는 게 얼마나•••
“도와드리지 못해 죄송해요•••
그 마음들의 크기가 생각보다 커 서, 조금 미안하고, 고마웠다.
나는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가 한 명씩 꼭 안아주었다. “기다려 줘서 고마우니.”
“이제 정말 괜찮아.” “흐어엉, 전하!”
기어이 희사는 눈물이 터졌다. 펑 펑 우는 희사를 달래던 나는 터진 만두 같은 얼굴에 웃고 말았다.
내 웃음에 사람들의 얼굴에 하나둘 씩 웃음이 번졌다. 어느새 희사도
우는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나는 뒤를 돌았다.
고요히 드리워져 있던 그림자 하나 가 보인다. 나는 그 애틋하고 사랑 스러운 사람을 보며 웃었다.
팔을 벌리자 그가 가만히 다가온
다. 내게 안기는 그를 나는 가만히 안아 주었다.
“걱정 많이 했어?”
한 지의 망설임도 없는 단호한 대 답에 나는 기득기득 웃었다.
원망스러운 듯이 고운의 팔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갔지만, 금세 풀렸다. “이제 다 괜찮아졌에”
여전히 네 눈에 걱정이 서려 있다. 아마 나도 그렇겠지.
그래도 나는 가법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괜찮아질 거야. 이제 정말로.”
내 인생의 풍랑은 아마 끝없이 찾 아올 것이다.
하지만 흔들리되 뒤집히지 않으면 서, 나는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고운의 손을 잡고, 나를 바라보는
이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길었던 이야기가 이제 거의 끝나 가고 있었다.
매듭 지어야 할 것은 이제 하나뿐 이다.
“다녀올 곳이 있어.”
딱딱한 촉감이 발 끝에 느껴진다. 여전히 삭막한 곳이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높고 검은 천 장이 보였다.
서 대륙에 있는 용의 등지. 나는 그곳에 다시 와 있었다.
이번에는 고운도 동행하지 않았다. 반드시 나 홀로 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기억을 모두 보0갔음에도 다시 이곳을 찾은 것은, 그 애가 사라지 기 전 내게 했던 말 때문이었다. -용에게 고맙다고 말해 줘.
그 에는 내 첫 번째 생의 기억이 었지만, 꼭 모든 걸 아는 사람 같았 다.
첫 번째 생에서 아무 힘도 없던 내가, 세 번째 생에서 갑자기 이능 이 생긴 것도 기이한 일이다.
용이 엄마에게 약속한 것은 두 번 째 생이 전부였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세 번째 생을 시작했을까.
그 모든 것들은, 그저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분명 누군가가 관여한 것이다.
어쩌면 내 삶을 가없게 여긴, 누군 가가.
흰 머리칼을 가진 소녀가 보인다. 용은 여전히 아이의 모습이었다.
흐릿한 그 눈동자를 바라보며, 나 는 입을 열었다.
“당신이 도와준 거죠?”
용은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말을 이어 갔다.
“당신의 그 이상했던 말들도, 내 기억이 이곳에 있었던 이유도•••
“내가 당신을 만난 것이, 이번 생 이 처음이 아니었죠?”
내 말을 듣던 용이 고개를 숙였다.
맞취졌던 시선이 내려간다. “왜 묻는 거야?” 시인에 가까운 말. 나는 무릎을 굽 혀 다시 시선을 맞췄다.
생판 남인, 아니. 어쩌면 아륜의 피를 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당신에게 피해를 준 사람인 나.
그런 나를 당신은 굳이 왜 도왔던 걸까.
그 이유는 생각보다 금세 떠올릴 수 있었다.
“나는 당신이 찾는 사람이 아니에 요."
선고 같은 말이 조용히 동굴 속을 울린다. 용의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 았다.
그에 나는 설핏 웃었다.
“사실은 알고 있죠? 하나도 안 닮 았잖아요. 나와 그 사람은.”
용은 황제의 이름조차 제대로 기 억하지 못했다.
그는 내내 황제를 아륜이라고 불렀 지만, 초대 황제의 본명은 화륜이다. 용은 그녀의 이름마저 기억하지 못 한 채, 망령처럼 그만을 붙들고 있 었다.
“나뿐만이 아니에요.”
“당신의 아륜은 한 명뿐이었어요.
앞으로 다시는 나타나지 않아요.”
내 말에 용은 여전히 아이 같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잠시 고 개를 숙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용은 버려진 아이 같9갔다. 하지만 동시에, 조금 홀가분해 보이기도 했 다.
나는 잠시 주저했지만, 손을 뻗어 용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사람은 돌아오지 않을 거예 요.”
오랜 세월을 살았지만, 여전히 자 라지 못한 어린아이 같은 용.
“그러니 이제 그만 기다려도 괜찮 아요.”
너는 그 어린 마음으로 너무 오래 아파했다.
용이 승낙을 구하는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들었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의 몸이 조금씩 투명해 지기 시작했다.
“졸립구나•••
용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나 는 용을 푹신하고 마른 자리에 눕혔
다.
용의 눈에 졸음이 가득했다. 그가 내 치맛자락을 붙들었다.
“정말 오지 않아?”
그 말이 마지막 남은 그의 서러움 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아프게 바라보았 다.
이곳에 오기 전, 나는 무모한 시도 를 한 번 했었다.
언령이란 말의 힘. 말은 어떤 것이 나 할 수 있으니, 어쩌면 가능할지 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그 언령으로, 나는 초대 황제의 기 억을 엿보았다.
그 기억은 용의 기억과 거의 흡사 했지만,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가물가물한 눈으로 용이 나를 바라 보았다. 나는 그 작은 이마를 가만 히 쓸어 주었다. 무엇을 말하려는 듯이, 용이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그 입모양을 읽은 나는 가만히 웃 어 주었고, 이내 용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뜨지 않았다.
마침내 그의 몸이 완전히 투명해져 흔적 없이 사라졌을 때, 나는 조용 히 읊조렸다.
“잘 가요, 미르.”
초대 황제는 용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용 본인조차도 기억해 내지 못한
나는 그 사실을 그에게 말해 주어 야 하나 고민했지만, 결국 입을 다 물었다.
그 사실을 용에게 말해 주었다면, 그는 또 잠들지 못했겠지.
언제 올지 모르는 그 사람을 기다 리며, 또 홀로 남겨졌을 것이다.
그 사람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테니, 당신은 그저 편히 잠들면 된 다.
용이 제 죽음을 지킨 온기가 있었 다는 것만 기억했으면 좋겠다.
끝내 누군가 당신의 이름을 기억해 주었다는 것은, 내가 기억할 테니. 그 자리에 오래도록 앉아 있던 나 는, 동굴 입구에서 바람이 불이올 때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하얗기만 하던 바깥이 산속의 풍 경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능이 천천히, 사라지는 것이 느 껴졌다. 제 주인을 따라 흩어진다.
완전히 사라지기 전, 나는 그 끝자 락을 잡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었다.
나의 집으로.
그 뒤는, 평범한 나의 일상이었다. 서라국의 이능은 워낙 줄어들던 추 세였지만, 용의 죽음 이후로 그 속 도가 엄청나게 가속화되었다.
그 탓에 나라가 혼란스러워졌고,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궁의 모두가 바빴지만 황태자인 나는 그들보다 더 바빠야 했다. 나는 나라의 기틀을 다시 잡기 위 해 한참을 애썼다.
하루 종일 밀려드는 서류에 씨름하 느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지경이 었다.
그렇게 일하느라 과거의 기억을 되 찾아 괴로워했던 기억이 아주 오래 전의 일인 것처럼 멀어졌다.
종종 과거의 기억이 뒤통수를 후려 지듯 떠올랐지만, 그마저도 점점 줄 어들었다.
그날도 그저 그런 날이었다.
점심을 먹고 시간이 조금 남아 나 는 궁녀들을 물리고 방에 홀로 남았 다.
나는 혼자서 장을 열어 두고 사색 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 날도 마찬가지로 멍하니 허공 응시하는데, 무언가 눈에 걸리는 것 이 있었다.
탁자 밑의 바닥이 조금 들린 부분 이 있었다. 지금껏 어떻게 발견하지 못했나 싶을 정도로 제법 컸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곳으로 다 가갔고, 그 부분을 손으로 들취내자 손쉽게 들렸다.
그 안에는 작은 함이 들어 있었다. 그 함이 낯설면서도 어던가 익숙해 서, 나는 홀린 듯이 그 함을 꺼내 열었다.
함 안에는 곱게 접힌 종이들이 가 亡들어 있었다.
나는 종이를 펼쳤고, 그 자리에 일 어붙었다.
그건 내가 어릴 적 썼던 서신이었 다.
밤마다 깨어났던, 그때에는 원작의 산아라고 알고 있었던 그 아이에게. 그렇게나 찾아도 나오지 않던 서신 이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 종 이를 접고, 다른 서신들을 꺼냈다.
몇 번이나 펼쳐 보았는지, 서신들 은 모두 손때가 타고 접힌 부분이 해져 있었다. 하지만 소중히 다룬 듯이 찢어진 부분 하나 없었다.
나는 그 서신들 중 가장 때가 단 서신을 펼졌다.
[나는 네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 네 이야기를 읽었거든.]
반듯한 글씨가 보였다. 내 글씨체 였다.
[그 내용이 정확하게 기억나지도, 너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 것도 아니 어서 내가 다 알지는 못에]
조심스레 눌러 쓴 듯이, 조금씩 먹 이 번진 서신.
[그래도 사람들이 너에게 너무 가 혹했다는 건 알아.]
[그걸 알면서도 널 헤아려 주지 못 해 미안해.]
불시에 눈앞이 흐려졌다. 나는 놀 라 눈물을 닦았지만, 몇 방울은 서 신에 떨어졌다.
나는 눈물이 닿지 않게 서신을 들 어 올리면서도, 다시 그 글을 읽었
다.
[널 헤아려 주지 못해 미안해.〕
그 부분의 종이가 쭈글쭈글해져 있 었다. 이미 마른 부분이기에 방금 내 눈물이 떨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걸 본 순간, 주체할 수 없게 눈 물이 났다.
나는 서신을 끌어안고 울었다.
리도 내지 못하고, 숨도 쉬지 못하 고 울었다.
감정들이 어지럽게 휘몰아쳐 알아 볼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았다. 하지 만 하나 선명한 것은, 오직.
아, 네가 이래서 그랬구나.
이렇기 때문에 나를 미워하지 않는 다고 말했구나. 네가 사라지던 순간에 웃을 수 있 있던 것은, 이미••
오래 울지 못해 가물었던 눈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가득한 종이들 안에 담긴 모든 것 이 나의 위로였다. 나는 애써 눈물을 닦으며, 다른 서 신을 집어 들었다.
[꺼내기 싫은 이야기를 캐물어서 미안해. 그렇지만 하나만 물을게.] [너는 지금 괜찮아?]
짧은 서신이었다.
이 물음에 나는 지체없이 대답했던 것 같다.
응, 편안해. 하고.
나는 이 한마디를 듣기 위해 이렇 게나 오래 돌아왔다.
울음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따스한 햇살이 방 안에 길게 비춘다. 꿈결 처럼 나른했다.
나는 기도하듯 서신을 품에 안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완연한 날이다.〈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