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우2” 드르륵, 쾅!
누군가의 의아한 목소리가 들린 것 도 같았다. 문이 닫히는 굉음에 묻 히기는 했지만 말이다.
고운은 불을 켜지 않아 어두운 방 안에서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고작 궁의 복도를 주파했을 뿐인데 심장 이 마구 뛰었다.
그렇게 몇 번 더 숨을 고르던 고 운이 고개를 들어 어둠 속을 응시했 다.
볼품없이 몸을 웅크리고 있던 인영 이 슬그머니 허리를 폈다.
“문 부서지겠다, 이놈아. 무슨 짓을 하고 왔기에 숨을 못 골라?” 고운의 방에 숨어 있던 이는 여류 였다.
그는 자애로우신 태자 전하의 온정 에 기대어 슬그머니 산아의 명을 어 기고 입궁했지만, 떵떵거리며 돌아 다니기엔 역시 조금 양심에 찔렸다. 그 탓에 막내의 침소에 몰래 숨어 들었는데, 어째 그가 심상치 않았다. 여류가 고운의 눈치를 보는 동안 고운은 탁자로 걸이가 초 하나를 겼 다.
방 안이 순식간에 밝아지며 일렁이 는 촛불 위로 고운의 얼굴이 보였
다.
•••수련을 얼마나 한 게야? 너 얼굴이-
“나가.”
“나가라고.” 고운이 새파랗게 치뜬 눈으로 여류 를 보았다. 반박하려던 여류는 입을 다물었다.
, 그래. 지금 나가면 분명 들기 겠지만. 그래서 궁 밖에서 차가운 이슬 맞고 자는 날이 며칠쯤 늘 수
도 있겠지만 방 주인이 나가라니 나 가야지.
여류는 살금살금 기척을 죽여 숨소 리 하나 내지 않고 방을 빠져나왔 다.
그는 요기할 것을 슬쩍할 요량으로 소주방으로 향하며 아까의 광경을 떠올렸다.
고운의 얼굴은 아주 새빨갛게 달아 올라 있었다.
그 얼굴이 얼마나 붉던지 그 아래 서 타오르고 있는 작은 불꽃과 거의
비슷할 정도였다.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화가 났
여류가 괜히 찔끔해 조금 반성하고 있던 그때, 고운은 목각 같은 움직 임으로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제 손에 얼굴을 묻었다.
은 얼굴과 반대로 얼음장처럼 차 가워져 있었기에 얼굴의 열을 식히 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고운은 그대로 땅이 꺼져라 숨을 내쉬었다.
'수치스럽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다는 말 을 고운은 처음으로 체감했다.
궁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어린 궁녀의 말이 패인인가 싶어 저 잣거리에까지 나가 되도 않는 책을 샀다.
알게 모르게 서운해하는 산야를 외 면하면서까지 벌인 일이었는데, 이 마저도 고운은 대자게 실패했다.
그러나 불가피한 일이었다. 한 나 라의 군주인 황제의 발길을 감히 누 가 막겠는가? 그럼에도 아쉬움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성공적이었는데.' 아니, 과연 그랬나?
아차 같던 황제의 표정 뒤로 당황 하던 산아의 모습이 떠올랐다.
고운은 여류의 말이 농담이 아니란 것을 거울을 보지 않고도 알 수 있 었다.
손에 닿은 얼굴이 여전히 뜨거웠 다. 초를 고작 하나 견 방 안에서도 여류가 알아볼 정도라면 말 다 한 것이다.
하지만 방금 전 마주했던 산아의 얼굴은 붉기는커녕 하얗게 질려 있 었다.
설렘이라곤 한 줌도 찾아볼 수 없 이, 어색함과 당황으로 재워져 있던 표정.
과연 오늘의 실패가 그저 황제 때 문인지.
고운의 낮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그날의 일은 그리저리 넘어갔다.
예화는 산아와 고운 둘 중 누구도 책잡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둘은 이미 혼약을 맺었고, 산아의 짝이 고운이라는 것 은 거의 기정화된 것이었으니.
장성한 자식의 사생활에 하나하나 부모가 간섭할 수 없다는 것을 예화 는 잘 알았다.
또한 산아가 제가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현명하다는 것 또한.
다만 그날 예화는 밤이 깊도록 산 아의 곁에 붙어 있었고, 결국 동궁 에서 하룻밤을 묵고 갔다.
충격은 충격이었던 것이다.
딸아이 앞에서는 수다스러워지는 예화와 그나마 어머니에게는 제법 말수가 많은 산야였지만, 그날 밤은 둘 다 입이라도 꿰맨 듯 조용했다.
하지만 이튿날 아침에는 언제 그랬 나는 듯이 평소처럼 돌아왔다. 둘의 회복력은 그만큼 빨랐다.
다만 안타깝게도 고운은 그렇지 못 한 듯했다.
'또 칩거야.' 아니, 그날 산 책도 하루면 다 읽 있을 덴데 왜?
•••라고 묻기에는 명백히 의심 가 는 것이 있었다.
물론 이전까지 접촉이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니고, 그것 하나에 벌벌 떠 는 것이 산아는 조금 이해되지 않았
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그 특유의 섬 세함이라 이해해 주는 수밖에.
산야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고운은 원체 과묵한 탓에 한 방에 있어도 그다지 인기척이 나지 않q갔
다.
그래도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 는 안다고, 고작 한 사람이 빠진 방 안에 쓸쓸한 고요가 내려앉았다.
산야는 장을 열고 아래를 내려다보 았다. 사람들이 바쁘게 오가는 모습 이 보였다.
이리저리 헤매던 산야의 눈이 점차
무복을 입은 이들을 좇았다. 그러나 오래 가진 못했다.
'머리가 길어.' 서라국은 남녀를 불문하고 대부분 머리를 길렀다. 산야가 장가로 내려 다본 이들 또한 모두 머리가 길었
다.
'그러고 보면 왜 머리를 자르는지 도 모르네.'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둘씩 모르는 부분들이 튀어나왔다.
산야가 상념에 빠지려던 찰나,
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서련입니다.” “아, 들어와.”
산아가 단번에 반색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손수 문을 열자 문 앞에서 기다리던 서린이 놀란 눈 을 했다.
“어서 와.” 산야는 사르르 웃으며 친구를 반겼 다.
하루 전, 산아는 다음 날도 혼자 남을 것이 뻔하다고 생각했다.
기실 누굴 부를까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산야에게 친구란 서련 하나 뿐이었으니 부를 사람도 하나뿐인 것이다.
바쁜 일정에 오지 못할 줄 알았는 데, 고맙게도 서련은 단번에 입궁하 겠다는 답신을 보내왔다.
“잘 지냈어, 아연?” 환히 웃는 산아의 일굴에 서련 또 한 마주 웃었다.
“어쩐 일로 저를 이리 반기셔요?
고운 님께서도 밖에 계시고.”
서련을 데리고 탁자에 앉던 산아가 그 말에 멈칫했다.
•••고운이 밖에 있었니?”
“예. 궁 앞에서 마주쳤습니다. 웬일 로 제게 무일 물어보시기에 전하와 무슨 일이 있나 싶었는데••• 의아하다는 듯 설명하던 서린이 아, 하며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산 아의 얼굴은 이미 굳어진 뒤였다.
방 안에 있는 게 아니라, 바깥을 다녔다고?
그것도 서련과 대화마저 나눴다
'그냥 날 피하는 거잖아.' 산야의 생각이 자꾸만 안 좋은 쪽 으로 튀었다. 그녀는 입술을 감쳐물 었다.
“아연. 나 물을 것이 있는데.” “예. 말씀하서요.” 어두운 산야의 얼굴에 심각함을 느 낀 서린이 대답했다. “요즘 자꾸 고운이 날 피해.”
“숨기는 것도 많고••••••돌발 행동도 하고.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고운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산야의 말에서 불안을 읽은 서린이 걱정스레 말을 건넸다.
“전하. 무일 걱정하시는지는 알겠 지만, 고운 님이시잖아요.” 서련이 고운을 부르는 호칭은 에매 했다. 관직이 없으니 직책으로 부를 수도 없고, 에매하지만 가주의 위치 에 있기에 공자라고 부를 수도 없었 기 때문이다.
산아는 그 이유를 잘 알았다. 그건 어찌 보면 자신 때문이었다.
이능이 점자 몸집을 줄이다 완전히 사라졌을 때, 고운은 마호 가의 모 든 재산을 기꺼이 황실에 바쳤다.
마호 가는 전대 가주의 칩거로 그 위명이 축소되있지만, 그럼에도 그 들이 쌓아 온 독에 관한 사료와 대 를 이어 축적한 부유함으로 여전히 손꼽히는 명문가였다.
고운이 후계자가 없는 마호 가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방계들을 하 루아침에 닭 쫓던 개로 만든 것은 귀족들이 사석에서 늘 꺼내는 이아 기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 이야기는 항상
7八쓸하게 끝을 맺었다.
가문의 흥망에 관심이 없던 마호 가의 전대 가주가 가문을 다스릴 때 에도 제대로 흔들리지 않은 가문이 었다.
한데 월등히 강한 힘을 가진 고운 이 가주가 되었으니, 마호 가는 얼 마나 성장할 것인가?
이능이 사라진 뒤에도 그것은 여전 한 걱정거리였다.
고운은 황궁에서 지내며 황족들과 각별한 관계가 되었을 테니, 그들의 지지를 받고 있을 거라 예상한 것이 다.
많은 이들이 고운이 황실을 등에 업고 가문을 일으킬 것이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하지만 고운이 한 일은 마호 가를 유명무실히 만든 것이었다.
마호 가는 말 그대로 이름만이 남 았다.
그가 가문을 이었다 하더라도 태자 와 약혼했으니 고운의 아이는 모두 황족이 될 것이다.
그러나 고운은 가문의 모든 것을 바지고, 대를 이을 가능성조차 끊어 버리고서도 황실에 무언가를 바라지 않았다.
고운이 청한 것은 가문의 사람들이 잠들어 있는 묘지를 돌보아 달라는 것뿐이었다.
태자와의 혼인을 서둘러 달라 청했 어도 단번에 거절하지 못했을 텐데, 고운은 스스로를 숙이고 다시금 호 위 자리를 자청했다.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는 산야도 그 순간만큼은 고운에게 정말 괜찮 겠나며 되물었다.
그도 그릴 것이, 마호 가는 고운이 10년 동안 황궁을 떠나아 했던 이 유이기도 했다.
산야는 고운의 망설임 없는 행보에 서 그 10년이 정말 오롯이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종종 드러나는 고운의 그 맹목이 걱정스럽기까지 했던 산아였다.
그 마음은 여전히 남아 있다. 하지 마••
'사람은 변하니까.'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랑에 빠졌다 면, 마찬가지로 이유 없이 사랑이 끝날 수도 있는 것이다.
고운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산아만 을 바라보던 이였다.
오래도록 달려오던 마음이 이제 끝 이 났다면.
만약 그렇다면, 어떡하지?
그 생각을 한 순간 산아는 덜컥 겁이 났다. 발밑이 푹 끼지는 기분 이었다.
산야는 서련이 자신을 부르는 것 도, 그러다 그녀가 방을 나서는 것 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저 머릿속이 새하얬다. 잠깐 든 가정만으로도 심장이 철렁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네가 보고 싶은데.
그렇게 생각하며 코끝이 조금 시큰 해졌을 때, 산아의 머리 위로 그림 자가 졌다.
산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토록 코빼기도 비치지 않던 고운이 마법처럼 나타나 있었다.
그 얼굴을 본 순간 산아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표정 하나 일그러트리지 않고 떨어 진 눈물이었다.
그러나 울고 있음을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산아의 눈에서 눈물이 비 오듯 후두둑 떨어졌기 때문이다. 우는 산아의 모습에 고운이 소리 없이 당황했다.
어쩔 줄 모르며 주먹을 쥐었다 펴 는 모습을 보던 산아가 물었다. “마음이 식었니?” 산야는 그들이 물 흐르듯 편안하다 고 평했지만, 그와 별개로 사소한 일들에도 행복해하고 설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첫사랑이고, 풋 사랑인 것이다.
“바람이라도 피워? 그래서 자꾸 피 하는 거야?”
설령 그렇다 해도 혼약뿐이고, 혼 인하지 않았으니 얼마나 큰 책임을 묻겠는가.
그래도 괘씸하고 서럽다.
너는 나보다 훨씬 오래되어서, 그 래서 마음이 식을지도 모르겠지만, 난 아직 널 좋아하는데.
“이제 날 안 좋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