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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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의 일들은 꼭 꿈처럼 흘러갔 다.
나를 붙드는 궁인들의 우악스러운 손길과, 꼴 보기 싫다는 듯 매정히 고개를 돌리는 후궁들. 그리고, 안쓰럽다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황제.
그 연민이, 안타까움이 너무나 가 벼워서.
당신의 눈동자에 내내 서려 있던 다정이 그렇게나 얄팍하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감옥의 창틀 사이로 시린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추운 줄도 모르고 멍하니 앉 아 있었다. 아무런 생각이 나질 않 았다.
그저 이곳으로 오기 전 보았던 그 들의 눈빛만이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재생되있다.
까무룩 잠들었다 깨어나면 다시 똑 같은 곳.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해 서,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난 나는 벼 락이 내리치듯 불현듯 허기를 느꼈
다.
고통스러울 정도의 허기였다.
말을 하려 입을 벌리니 마른 입 술이 찢어지며 비릿한 피 맛이 났 다.
가까스로 쥐어 짜낸 목소리가 감옥 안을 울렸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가둬 두었다고 해도 먹을 것은 줄 텐데. 아니, 적어도 죄인을 지기는 간수라도 있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감옥 안은 인기척 하나 없 이 조용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일으켜 어떻게든 장밖을 보았다. 간신히 본 바깥은 가을 햇살이 가득 내리쬐는 한낮이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정말로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았다. 내가 이곳에 있는 사실을 모두 잊었 다는 듯이
“누구 없느냐?”
그걸 알면서도 나는 목소리를 냈 다. 내가 아직 여기 있노라고 알렸 다.
힘없이 주먹 쥔 손으로 창살을 때 렸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리 두들겨도, 소리를 질러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힘이 빠진 나는 쓰러지듯 주 저앉았다.
누군가 일러 주지 않아도, 당연하 게 알 수 있었다.
아, 버려진 거구나.
그냥 이대로 이곳에 갇혀서 죽으라 는 거야.
시야가 흐려졌다. 물이 툭툭 흘러 손등을 적신다.
그걸 명하니 바라보던 나는 볼을 훔쳤다.
손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내 예상이 맞았다. 그들은 나를 살 려 둘 생각이 없었다. 이대로 내가 죽는다면, 내 장례를 지러 줄 사람이 있을까?
나를 기억해 줄 사람이 없었다. 사 랑했고, 헌신했지만 그들은 나를 비 렸다.
누구보다 사랑했던 아버지였다. 부 모보다도 더 따랐던 황제였다. '매았하구나.
미안하다니, 대체 무엇이요?
진실을 알고 있지만 나를 죽여야 한다는 사실이요?
아니면, 끝내 나를 사랑하지 못했 다는 것을요?
어느새 눈물이 멎었다.
숨이 막혀서 눈물이라도 흘렀으 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바싹 메 마른 강처럼 건조했다.
나는 결국 사랑받을 수 없는 운명 이었다.
사실은, 다 알고 있었다.
왜 아버지가 늘 내 손을 뿌리치는 지.
왜 폐하께서 언제나 바쁘다고 하 셨는지.
이유를 알지만, 그 자투리 온기마 저도 나는 절실했다.
어떻게든 붙들어 놓으면 언7빈가는 나를 돌아봐 줄 거라 생각했다.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 봤자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이었다는 것을 이제 아 알았다.
바보 같고, 비굴한 것.
나는 결국 이름 뒤에 붙일 성 한 자 받지 못하고, 고작 이렇게 죽는 구나.
아무도 죽음을 기억하지 않은 채 잊혀질 것이다.
그게 사무치게 서럽고, 슬퍼서.
나는 흐려지는 정신의 끝자락에서, 간절히 빌었다.
누군가 내 죽음에 울어 주었으면 좋겠어.
여전히 고요한 감옥 안에서, 나는 눈을 감았다.
눈앞이 어두워진다. 내리쬐는 햇빛 도, 바람도, 흙의 냄새도 흐릿해졌
다.
이내 깜빡, 하고 의식이 점멸했다.
한 번도 겪어 보지 않았지만, 그게 죽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죽음은 얼핏 홀가분하기까지 해서, 나는 저항 없이 눈을 감았다. “부디 몸조심하거라, 산야.” 그런데 왜, 아직 살아 있는 건지.
안타깝다는 듯이 웃고 있는, 나와
꼭 닮은 남자가 눈앞에 서 있다.
그가 내 아버지였다는 것이 멀게 느껴졌다.
기윤이 손을 뻗어 나를 끌어안았 다. 닿는 부분마다 벌레가 기어 다 니는 것만 같았다.
“너를 찾은 지 일마 되지도 않았는 데, 이리 다시 때어 놓아야 한다니 슬프구나.”
'망정한 것. '
“아비가 보고 싶다면 주저 없이 기 별하거라. 언제든지 네게 가마.”
'아가. 나는 적/장q//只/ 너를 가장
'
중으 한단다.
“내 사랑하는 아이라는 것을 잊지 말거라.”
'그제 나는 너를 사람렬k 주가 없구
나.'
다정한 말 뒤로 진득한 증오가 구것 가에 속살댄다. 온몸에 소름이 돋0갔 다.
나는 그를 떨쳐 내지 않으려 안간 힘을 썼다.
죽은 줄 알았던 나는 다시 눈을 떴다.
내가 살았던 시간이 아닌, 5년 전 의 과거에서.
잃어버린 딸을 다시 찾아 기쁜 줄 만 알았던 그의 눈이 얼마나 서늘한 지 이제는 안다.
순진했던 나를 속여 이용하려는 생 각이니, 아직 이곳에 남아 있는 나 는 그에게 내 증오를 티 내서는 안
돼.
•••그럼요, 아버지.”
웃으며 그의 품에 안겼다. 안긴 품 이 따스하고, 등을 토닥이는 손도 다정하기 그지없다.
여전히 나를 떨쳐 냈던 손길이 생 생한데.
상냥한 아버지 노릇- 하는 그가 우습고 역겨웠다.
그는 금세 나를 떼어 놓았다. 나는 다시 웃었고, 그가 내 머리를 쓰다 듬있다.
“내일이 입궁이니 이만 들어가 쉬 거라.”
그 말에 잠시 얼굴이 굳었으나, 나 는 또 웃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해요, 아버지.” 방을 나선 나는 점점 걸음이 빨라 졌다. 그리고 내게 배정된 방에 들 어가 문을 닫았을 때, 나는 구역질 을 애써 참았다. “아가씨? 괜찮으셔요?”
문밖에서 나를 걱정하는 시비 아이 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마 전, 기윤이 나를 찾기 전까 지 내 허름한 옷을 조롱하던 목소 리였다.
이 화려한 방도, 친절해진 시비도, 다정한 기윤도 모두 진저리가 처졌 다.
과거의 감정은 많이 가라앉았지만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저들의 기만을 보고 있으면 자꾸 그 기억들이 내 숨을 틀어막았다.
모두 끔찍했지만, 가장 견디기 이 려운 것은 따로 있었다.
'내일이 입궁이야.'
나는 갓난아기로 눈을 떴고, 이 지 난한 생을 8년을 꼬박 채워 살았다.
이 생은 이전 생과 같으면서도 달 랐다.
같은 것은 여전히 나는 여란 가의 사생아라는 것, 다른 것은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전생과는 달리 이능이 있 다는 것.
“장을 열어 쥐.”
작게 중얼거리자 꼭 닫혀 있던 창 문이 활짝 열렸다. 2층의 방을 주있 으면서도 내가 도망갈까 시비들이 잠가 둔 장이었다.
나는 열린 창가를 가만히 바라보0갔
다.
'이건 무슨 이능일까.'
무언가를 말하면 그게 현실이 된 다.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었던 이능 이고, 활용도가 무궁무진한 이능이 었다.
이 사실을 처음 알았던 때의 나는 뛸 듯이 기뻐했었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이능이 있 다면, 전생처럼 휘둘리지 않을 테니
까. 하지만, 그 기대는 금세 사그라졌 다.
겨울에 꽃을 피울 수도, 여름에 나 뭇잎을 모두 떨어트릴 수도 있는 이 능은 내가 여란 가를 나가는 것만은 들어주지 않았다.
시비들의 폭력을 아무렇지 않게 만 들었지만 그들의 폭력을 멈출 수는 없었고, 기윤을 다시는 마주치고 싶 지 않다는 내 말도 들어 주지 않았 다.
꼭 이능이 스스로 사고해 내가 전 생과 똑같이 살기를 바라는 것처럼. 나는 부단히 애를 썼지만 이능이 돕지 않는 상황에 맨몸으로 여란 가 를 나가 몸을 숨기는 것은 불가능했 다.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고, 결국 입 궁을 하루 앞둔 채였다.
'황궁만은 가고 싶지 않아.'
기윤조자도 저리 역겨운데, 황제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 볼 자신이 없었 다. 그녀는 내게 기운보다도 더 잔인했 다.
자라리 증오하기라도 했던 그와 달 리, 황제에게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 으니까.
내가 그에게 헌신했던 만큼, 흔적 하나 남기지 못했다는 사실이 끔찍 했다.
나는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눈물 대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이대로 마주할 수는 없어.
차마 버틸 자신이 없다. 하지만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뾰족한 방법도 없으니.
•••기억을 지위 줘”
천천히 입을 열어, 작게 중얼거렸
다.
“내가 살았던 전생의 기억을 모두 지위 줘. 황궁에 들어가도 내가 비 털 수 있도록.” 꼭 내 목소리 같지 않은 목소리는 고요히 이어졌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점점 정신이 몽롱해지는 것 같았다.
한순간도 나를 떠나지 않았던 눈빛 이, 목소리가, 기억들이 점점 흐릿해 진다.
“대신 다른 방법으로 남겨 쥐.”
모두 잊어버리면 다시 전생과 똑같 을 수도 있으니까.
“내가 잘못하지 않게. 무사할 수 있게.” 기억의 끝에서, 나는 작게 중얼거 렸다.
부디 이 생에서는, 내가 당신을 잘 못 사랑하지 않기를.
그리고, 혹시 무리한 바람이 아니 라면.
'외롭지 않았다면 좋겠어.' 평범한 사람들처럼, 그냥 그렇게.
힘들었던 과거는 잊고 평범하게.
의식이 점점 멀어졌다.
꼭 죽어 가는 것처럼, 감각도 사라
진다.
그리고, 나는 눈을 떴다.
텅 빈 구슬들이 떠다니는 텅 빈 동굴에서.
기억에서 깨어나, 나의 현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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