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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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본 기억도 첫 번째의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기억 속의 황제는 여전히 어렸고, 웃음도 같았다.
짧았던 첫 번째의 기억과는 달리 용의 생각들이 어렴풋이 전해져 왔
다.
용은 정말로 자신의 기억을 통째로 들어낸 모양이다.
감각뿐만 아니라 그 순간 용이 무 슨 생각을 했고, 어떤 것을 느꼈는 지까지 모두 들렸다.
의미심장했던 용의 말과는 다르게, 이어지는 기억들은 평화로웠다.
둘은 떠돌이 생활을 이어 갔다.
정착하려는 시도가 없는 것은 아니 있으나 불가능했다.
종종 보이는 작은 마을에는 모두가 피골이 상접해 음식을 구걸하고 있 었다.
새로운 주민을 받아 줄 수 있는 고0 八1 0펴었다. 푸른 들판보다 가뭄으로 쩍쩍 갈라 진 땅이 많았다.
곡식도, 물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만큼 척박한 나날들이있다.
그런데도 소녀의 뺨은 발그레했 고, 비단옷은 주름 한 번 지지 않 았다.
이무기에 불과한 용은 아직 황제가 아닌 소녀를 아꼈다.
기억 속의 소녀는 언제나 사랑스러 웠다.
“이무기야. 이곳에서 생명이 자랄 수 있을까?”
그런 기억들이 이어지던 나날 중 에, 소녀가 근심스러운 목소리로 말 했다.
“생명은 어디에나 있어. 얼마 전 들렀던 마을에서도 아기를 봤잖아.” 이무기가 의아하다는 듯 답했다. 소녀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바짝 말라 있었어. 당장 내일이라 도 죽을 것 같이.”
그 말에 시야가 살짝 기울어졌다. 이무기는 소녀를 아꼈지만,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소녀는 타국의 왕녀였다.
타고나길 고귀하게 태어난 소녀였 지만, 빛 하나 없이 온통 새카만 머 리카락과 눈동자는 질타와 핍박의 이유가 되었다.
성정이 유약하고 뒷배가 없던 소녀 는 결국 힘없이 왕위 계승 싸움에서 물러나야 했고, 척박한 땅으로 쫓겨 났다.
하지만 그럼에도 백성들을 아끼 고 사랑하는 마음만큼은 제가 교 육받은 그대로였다.
그 탓에 그녀는 제가 자리 잡은 이 땅에서 죽어 가는 사람들을 안타 까워했다.
“그렇게까지 그들이 가여워? 왜?” 천진하게 묻는 물음에 소녀가 손 을 뻗어 이무기의 머리를 쓰다듬 있다.
“나는 내 나라에서 쫓겨났지만, 여 전히 왕녀야. 주인 없었던 이 땅은 이제 내 나라고.” 비려진 이들의 땅.
소녀는 이 척박한 땅을 사랑했다.
“그래서 내 백성들을 돕고 싶어. 저들이 배곯지 않0갔으면 좋겠어.” 이무기는 소녀를 사랑했고, 그렇기 에 온 힘을 쏟아 소녀를 에지중지 지켰다.
하여 소녀의 뜻을 이해하지는 못했 지만, 이뤄 주고 싶어 했다.
하지만 지금 그가 가지고 있는 힘 은 이 떠돌이 생활에서 소녀를 반들 반들한 양반집 규수로 지기는 것이 다였다.
“내가 그렇게 해 주면 슬퍼하지 않 을 거야?” 그런데도 이무기는 그렇게 물었다. 나뭇등걸에 앉아 있는 소녀의 발치 에 앉은 이무기가 그녀를 올려다보 았다.
소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해 줄 수 있어?”
“아마도."
이대로는 저 아이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줄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소녀가 계속해서 슬퍼 할 테지.
이무기는 소녀의 웃음을 좋아했다. 활짝 웃는 얼굴이 하오의 햇살보다 도 눈부셨다.
태어난 지 일마 되지 않은 이무기 는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도 본능적으로, 태어난 생명 이 당연히 성장하듯이.
이무기는 그렇게 용이 되었다.
몸이 커졌고, 할 수 있는 일들도 많아졌다.
용이 된 이무기는 메말랐던 강을 되돌리고, 척박해진 땅에 다시 생명 이 자라게 했다.
용에게 그것은 손가락을 한 번 튐 기는 일보다 쉬웠고, 그 땅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비옥해졌다.
삼 일 밤낮으로 비가 내렸고, 풀 한 포기 없던 땅이 순식간에 녹음으 로 뒤덮였다.
그 땅에 살던 이들은 그 모든 기 적들을 보았고, 기적을 만들어 낸 소녀를 망설임 없이 왕으로 추대했 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밤하늘을 이 불 삼아 잠들지 않았다.
호화로운 왕궁이 생겼고, 용이 힘 을 쓰지 않아도 소녀는 매일 다른 옷을 입었으며 원한다면 온갖 산해 진미를 맛볼 수 있었다.
용의 소원은 그것뿐이었으나, 왕이 된 소녀는 조금 더 많은 것을 원했 다.
그녀는 왕녀였던 덕에 나라를 한 사람만이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았다.
용이 그녀에게 힘을 나누어 주었지 만, 그녀는 자신만이 힘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여 용은 그녀의 간청에 자신을 조금 쪼개어 힘을 나누었다. 용과 같으면서도 다른 그들은 왕의 충신들에게 힘을 물려주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왕은 또 다시 용에게 간청했다.
“여섯은 너무 적어. 다른 이들에게 도 힘이 필요에” 그 말에 용은 또 자신을 나누었다. 그들 또한 왕이 고른 이들에게 축 복이라는 명목하에 힘을 물려주었 다.
그 뒤에도 왕은 때때로 용에게 간 청했고, 용은 거절하지 못했다.
결국 용에게 아주 작은 힘만이 남 아 있었을 때, 그들의 나라에는 용 의 힘이 여러 가지 모습으로 깊게 뿌리 내려 있었다.
그렇게 서라국은 용이 만들어 준 비옥한 땅과 이능이라 불리는 힘으 로 성장했다.
나라의 기틀을 단단하게 다잡은 왕 은 타국에도 눈을 돌렸다.
왕은 여전히 백성들을 사랑하는 자 애로운 왕이었기에, 그들을 복속시 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라는 점점 더 커져 갔고, 종내에 는 왕녀였던 왕을 내쫓은 왕국마저 복속되었다.
훌쩍 커 비린, 왕이 된 소녀는 그 모든 것들이 끝난 후에야 활짝 웃어 주었다.
여전히 사랑스러운 미소였기에, 용 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후로는, 평화로운 시대였다.
대륙이 하나로 통일된 덕에 이웃 나라의 침입이 없었고, 왕이 힘써

백성들을 돌본 덕에 나라 안도 잠잠 했다.
이제는 황제가 된 소녀는 마냥 들 판에만 앉아 웃을 수 없었지만, 그 녀의 눈동자는 어느 때보다도 밝았 다.
황제는 많은 이들의 앞에 나섰고, 그들 모두가 황제를 사랑했다.
용은 때때로 제가 머리를 빗어 주 던 소녀가 그리웠지만, 종종 서글퍼 하던 소녀보다는 언제나 웃고 있는 황제를 더 좋아했다.
언제나 맑던 날들은 그렇게 그럭저 력 흘러갔다.
“국서를 들여야겠어.
그 평화로운 나날이 흔들리기 시작 한 것은 어느 날 지나가듯 흘린 황 제의 한마디였다.
날 좋은 오후에 황제와 함께 정원 을 산책하던 용은 그 말에 깜짝 놀 랐다.
용은 황제를 사랑했다.
의심치 못할 사랑이었다. 용에게 그녀는 연인이었고, 자식이 있으며 친구였고 부모였다.
온 마음을 다해 열렬히 사랑한 반 려였고, 궁에 머무는 모든 이들이 그 사실을 알았다. “아륜. 국서라니?” “그러니까, 남편 말이야.”
믿을 수 없어 되물은 말에 황제가 여상히 답했다.
친절한 설명이었지만 용은 뜻을 물 은 것이 아니었다.
당황스러운 나머지 말문이 막혔다. 용은 길을 걷다 뺨을 맞은 것처럼 눈만 깜빡이다가 목이 졸린 듯이 입 을 열었다.
“어째서?"
“그아, 나는 황제니까. 혼인을 해서 후계자를 낳아야지.”
그렇게 말하는 황제의 눈이 슬펐
다.
오랫동안 보지 못한 표정이었다.
“지금껏 미뤄 왔지만, 이젠 나라도 안정되었으니 더 핑계 댈 것도 없잖 아?”
1-
그 대답이 꼭 하는 수 없다-1- 必'  한 체념이라, 용은 놀랐던 것도 잊 고 그녀가 가여워졌다.
“아륜. 하지 않아도 괜찮아.”
용에게 이 나라는 황제인 그녀가 있기에 의미가 있었다.
나라를 위해 한 모든 일 또한 황 제를 위해서였다.
그러니 나라가 흔들린다 하더라도 황제가 원한다면 용은 기꺼이 도왔 을 것이다.
“무슨 소리야? 이건 내 할 일이
하지만 황제는 무서운 얼굴로 고개 를 내저었다.
제 역린을 찔린 듯한 반응이었다.
“나는 황제고, 이 나라를 이어 갈 책임이 있이. 아이를 낳지 말라는 건 내가 황제로서 자격이 없다는 것 과 마찬가지야.”
용은 그 모습에 자신이 황제의 성 역에 감히 침범했음을 깨달았다.
황제는 제가 결정한 것을 절대 무 르지 않았다.
그렇게나 사랑하는 나라를 위한 결 정이니 자신이 무어라 말하든 같을 것이다.
모든 것을 공유했던 어린 시절이 떠올라 조금 서글퍼졌지만, 용은 고 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뜻대로 해.” 그제야 황제는 안심했다는 듯이 조 금 웃었다.
그날 이후로 황제는 분주해졌다.
궁 안이 황후를 맞이하기 위해 떠 들썩했다.
용은 물 위에 뜬 기름처럼 겉돌았 다.
황제의 곁에 저 말고 다른 반려가 선다는 것이 괴로웠다. 그런 그만을 내버려 둔 채, 시간은 멈추지 않고 홀렸다.
입궁한 황후는 아름다운 사내였다.
황제는 황후를 아꼈고, 황후 또한 성심껏 황제를 보필했다.
황제는 일마 지나지 않아 첫 아이 를 낳았卍다.
그녀를 꼭 닮은 아이였다.
그리고 일마 지나지 않아, 황제는 후궁을 들였다. 사사건건 반기를 드는 이들을 견제 하기 위함이었다.
그 세력의 반대편에 선 가문의 차 남이 황제의 두 번째 남편이었다. 용은 그것마저도 막지 못했고, 황 제 또한 그것으로 멈추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의 수도, 후 궁의 수도 늘어났다.
황제의 가솔이 많아질수록 용은 조 금씩, 조금씩 고립되었다.
그의 곁에는 화려한 보석과 비단들 이 가득했고, 말동무가 되어 줄 궁 녀들과 악사들도 많았지만 여전히 외로웠다.
황제의 아이들도 그 외로움을 재위 주지 못했다.
용이 웃는 것은 황제가 용이 머무 는 신궁에 방문했을 때가 유일했다.
이제 황제는 제 남편들과 아이들에 게 둘러싸여 웃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완벽한 정경이라, 용 은 감히 발들일 엄두를 내지 못했
다.
그럼에도, 황제가 웃고 있으니 그 것으로 괜찮다고 생각했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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