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말에 멍해지고 말았다.
괜찮다니. 뭐가? 황제와 나의 모습 보던 기윤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곧 기윤은 살짝 웃더니 나를 내려 놓고, 내 등을 가법게 밀었다.
그게 꼭 마지막 인사를 하라는 것 같았다.
나는 옥좌를 향해 걸어갔다.
자꾸만 힘이 풀리려는 다리를 어떻 게든 다잡았지만, 한 발짝만을 남기 고 멈춰 서고 말았다. 하지만 나는 주저앉지 않았다. 엄 마가 나를 붙들었다.
엄마의 눈에 잠시 슬픈 빛이 스쳤 다. 하지만 엄마는 금세 다시 빙그 레 웃었다.
“역시 네 아비가 더 좋은 것이나? 내 너를 낳지는 않았으나 딸이라 여 겼거늘
장난스레 웃으며 내 코를 잡아 흔 드는 손길에 나는 아연해졌다.
저게 무슨 말인지도 이해되지 않았 고, 왜 저렇게나 해맑은지도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대체•••
“괘씸하니 이제부터 네 어미 노릇 은 그만해야겠구나.”
내 말을 끊은 엄마가 정말 괘씸하 다는 듯이 그렇게 말했다.
농담조였지만, 그 말에 정말 눈물 이 날 것 같았다.
“왜 그러세요.”
목소리가 떨렸다. 그 말을 들은 엄 마의 표정이 흔들렸다.
엄마가 내 뺨을 애틋하게 쓰다듬었 다. 다시 웃는다.
“아가. 산야. 이제 나는 네 어미가 아니다.”
“그게 무슨, 아까부터-
“그러니 내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걸 무겁게 받아들이지 말거라.”
이어진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래 기억하지도 말고, 자책하지 도 말고, 슬퍼하지도 말아. 그건 네 잘못이 아니란다.” 엄마의 눈은 여전히 평온했다.
그녀는 정말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엄마는 괜찮아.”
그 대답에 나는 얼굴을 일그러트리 며 웃었다.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있는 줄 알 았는데, 이게 뭐예요•••
그래도 나는 그걸 타박할 수가 없 었다.
왜 그렇게 말했는지 이해할 수 있 있으니까.
'내가 무서워해서 그랬던 거야.'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렇지만 엄마는 그걸 티 내지 않 았다. 오롯한 염려였다.
자신의 죽음이, 이 상황이 내게 충 격으로 남을까. 혹시라도 내가 그녀 의 죽음에 슬퍼할까 봐.
이대로 가면 정작 자기 자신은 죽 을 텐데.
그리고 그 얼굴이 내 선택을 결정 했다.
태연하려 했던 마음 너머로 감정이 넘실거렸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 는 숨을 참았다.
괜찮아.
나는 괜찮을 거야.
꼭 죽는다는 보장도 없고, 그리고 혹시 죽는다고 하더라도••• 오래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도 불 가능했다.
나는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넓은 대전, 용포를 입은 엄마.
그리고 그를 올려다보는 나.
처음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그땐 진짜 불편했는데.'
꺼림칙하고, 좀 바보 같고.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황제.
그러던 사람이 언제 내 엄마가 되 어서는. 그 생각에 나는 조금이라도 웃을 수 있었다.
口근 뻗어 엄마의 손을 잡았다.
큰 손이 내 1- 긚 감쌌다. 놓치지 않게 단단히 붙잡는다.
괜찮다는 듯이, 아주 든든하게.
그 얼굴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은 나는 추락하기 직전의 사람처럼 눈 을 꾹 감았다.
괜찮을 거야.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을 꾹 움 켜쥐었다.
손안의 여의주가 파삭, 소리를 냈
다.
그 순간, 세상이 이지러졌다.
엄청난 고통이 느껴졌다. 그것조차 의식이 멀었다.
발을 딛고 서 있는 감각조차 느낄 수가 없다.
몸을 휩쓰는 고통, 소란, 팔을 붙 드는 온기.
느릿하게 눈앞에 풍경들이 스쳐 지 나갔다. 테이프를 뒤로 감듯이 기억이 뒤로 돌아간다.
최초의 기억은 갓난아이인 나를 끌 어안고 울고 있는 여자.
엉망으로 눈물을 떨구는 얼굴이 엄 마의 얼굴과 꼭 맞게 겹쳐진다.
“엄마•••
그 얼굴을 보자마자 나는 중얼거렸
다.
다 갈라진 목소리가 울음에 젖어 새어 나왔다.
시야가 왈각 흐려졌다.
꼭 닫아 두었던 감정이 둑이 터지 듯 풀렸다.
아, 아파.
이거 진짜 너무 아프다.
아프고 무서워.
이대로 죽는 것도 싫고, 아픈 것도 싫어.
세찬 숨이 터져 나왔다.
어느새 다가온 엄마가 나를 안고 있었다.
눈을 몇 번 깜빡이니 시야가 어두 워졌다.
어둠 속에서 나를 꼭 붙드는 손길 이 느껴졌다.
그래도, 그래도.
엄마, 죽지 마.
그렇게 말해 주고 싶었는데, 그 순 간 모든 것이 암전되었다.
엄마가 울고 있었다.
쪼그린 등이 초라했다.
머리를 바짝 올려 묶었음에도 푸석 해진 머리카락이 볼품없이 빠져나와 있었다.
나는 엄마의 뒷모습만으로도 엄마 인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엄마는 내가 말을 하고 나서부터는 내 앞에서 울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핏덩이같이 이 린 딸을 끌어안고 울던 날들을 기억 한다.
나는 울고 있는 엄마에게 한 발짝 도 다가가지 못한 채 머뭇대다가, 막힌 목에서 쥐어짜듯 한 마디를 토해 냈다. “엄마.” 미안해.
“산야?”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 였다.
헉.
나는 숨을 들이켜며 벌떡 몸을 일 으켰다.
반사적인 반응이었으나, 몸이 받쳐 주지 않은 탓에 골이 울렸다.
으, 아파.
나는 얼굴을 확 찌푸렸다.
머리가 쪼개지듯 아프고 눈앞이 어 질어질했다.
아, 정신이 확 드네.
그러니까••• 이능을 썼고, 무지 아팠고, 그대로 기절했지.
'무슨 꿈을 꿨는데.'
꿈을 꿨다는 사실은 아주 또렷이 기억나는데, 꿈의 내용은 티끌만큼 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엄마 꿈이었나 배'
이번 생의 엄마 말고, 저번 생에서 내가 다섯 살 때에 죽은 엄마.
아플 때면 꼭 꾸는 그 꿈도 처음 에는 아주 조금도 생각나지 않았었 으니, 아마 맞을 것이다.
아팠을 때에 꿨던 꿈처럼, 엄마와 있었던 일이었을까.
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작게 기침했다. 입 안이 말랐는지 침을 삼기기가 어려웠다.
목이 따끔거렸다. 입 안에 피 맛이 어렴풋이 남아 있는 것을 보니 각혈 도 한 것 같았다.
그래도 어찌 살았네.
죽음을 결심했있다.
그래서 내가 멀쩡히 눈을 떴다는 게 신기했다.
아닌가. 어디 하나 망가졌으려나.
태연하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데, 덜덜 떨리는 손이 내 얼굴에 닿 았다.
나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산야! 엄마, 엄마 알아보겠어?”
사실 잘 모르겠다. 아직 시야가 뿌 옜다.
그래도 익숙한 목소리라 얼떨떨하 게 고개를 끄덕이자 엄마가 내 .2' 1-0 꼭 붙들었다.
'네가 잠들어 있는 동안, 내가 일 마나•••
엄마가 고개를 숙였다. 붙잡힌 손 이 옅게 떨렸다.
많이 놀랐나. 하긴 그랬겠지.
나는 가만히 눈을 깜빡이며 숨을 골랐다. 침체되어 있던 몸을 깨우는 기분이 었다.
오래 잔 것 같기는 하네.
그래도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몸이 더 개운했다.
얼마나 잠들어 있었는지는 묻지 말
자.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엄마의 을 토닥였다. “저 괜찮아요.”
“뭐가 괜찮아!”
달래는 말에 엄마가 득달같이 소리 를 내질렀다.
1-正 동그랗게 떴다. 엄마가 내게 화낸 것이 처음이었다.
“네 상태가 어땠는지는 알아? 자칫 늦었으면, 그대로••••••!”
나를 혼내던 엄마가 말끝을 흐렸 다. 울먹이는 건가. 아직 시력이 다 돌아오지 않아 초 점이 잘 맞지 않았다.
눈을 몇 번 깜빡이던 나는 슬쩍 말을 돌렸다.
“말투가 바뀌셨네요.” 아주 미묘하게 좀 더 친근해졌다.
내 질문에 엄마가 놀란 듯했다. 아 무렴 못 알아볼 줄 알았나.
나는 몽롱하게 물었다.
“일부러 바꾸신 거예요?”
••그래.”
갑자기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쁘 지 않았卍다. 궁중 말투가 그리 마음에 드는 편 아니어서.
눈을 몇 번 더 깜빡거린 나는 그 제야 초점을 완전히 맞췄다.
그리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빛에 적응되어 눈앞이 하얗게 보였 던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나와 같았던, 엄마의 흑단 같던 머 리카락이 새하얗게 바래져 있었다.
백발에 가까운 은발.
일마 전에 들었던 천룡의 설명과 아주 흡사했다.
“머리카락이•••
내 중얼거림에 엄마가 고개를 들있 다. 까맣던 속눈썹마저 하얗게 변해 있 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엄마가 미묘하게 웃었다.
“역시 알고 있었구나. 똑똑하기도 하지, 우리 산아.” 어째 칭찬이 칭찬 같지가 않다.
착하던 우리 엄마가 언제 반어법을 배웠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지은 죄가 있던 나는 얌전히 입을 다물고 눈을 깜빡 거렸다.
엄마는 꼭 나를 한 대만 쥐어박고 싶다는 얼굴을 하다가, 한숨을 내쉬 고는 입을 열었다. “천룡을 말하는 거라면, 맞아.” “어떻게 되셨어요?” 대체 어떻게?
내가 쓴 이능이 그렇게 만든 건 가?
'그 여의주 안에 그런 이능이 담겨 있었다고?'
나도 모르게 몸에 힘을 주어 엄마 에게 다가섰다.
그러나 곧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거 잠깐 움직였다고 머리가 어지 러웠다.
“설명해 줄 테니 진정하자, 아가.”
차분히 나를 달랜 엄마가 나를 조 심히亡을 기대게 했다.
“천룡이 될 가능성은 모든 황족에 게 열려 있단다. 허나 그 확률이 회 박할 뿐.”
“그런 건 실록에 안 나와 있었는데
요.”
“그랬겠지. 나도 내 아버지에게 들 은 이야기이니 말이다.”
엄마가 내 반박을 부드럽게 받아치 며 내 머리칼을 정리해 주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천룡의 각성 좌이란다.”
하지만 황족들은 아무도 사랑할 수 없다는 저주가 있잖아. “불가능에 가까운 이야기지.” 내가 묻기도 전에 엄마가 알아서 덧붙여 주었다.
능력을 준 용이 참 괴팍했다.
사랑할 수 없게 만들어 둔 인간에 게 이능을 발현하려면 누군가를 사 랑하라니.
쓰지 말라고 못을 땅땅 박아 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를 바라보는 하안 속눈썹에 물기 가 어렸다. 하안 머리칼이 사르르 흔들렸다.
나는 엄마의 어깨를 힘없이 토닥이 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그러니 나라의 역사가 이렇 게 길어도 지금껏 둘밖에 안 나왔 지.
새삼 엄청난 행운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엄마에게 물었다.
“그럼 언령을 쓸 수 있게 된 건가 요?”
앉아 있으려니 또다시 잠이 왔다. 나는 다 감기는 눈을 하고도 그렇게 물었다.
“그래.”
“기윤은요? 어떻게 되었나요?”
그 이름을 듣자마자 엄마의 얼굴이 굳어졌다.
“여란 가는 이능을 잃었다.”
의심의 여지도 없을 만한 단호한 목소리였다.
언령이라는 게 대단하기는 한가 보
다. 이능을 없애는 것도 되다니.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피식 웃었 다.
엄청난 일이 지나갔는데, 그리 실 감이 나지는 않는다는 게 웃겼다.
평소보다 조금 더 졸릴 뿐.
너무나 평범한 일상. 그리고 동시에, 이렇게나 평온할 수 있다는 게 감사했다.
기윤은 어떻게 되었지.
다른 사람들은 다친 곳 없이 무사 할까?
서연, 희사, 아, 여류도 있지.
그리고 고운. 다른 사람들은 나이라도 많지, 갠 아직 어린데.
많이 놀랐을 것이다.
나 외에는 다른 이들에게 곁을 잘 내주지 않는 고운을 알아 더 걱정되 었다.
하지만 자꾸 잠이 쏟아졌다.
몸이 푹신한 침상 아래로 끼지는 느낌이었다.
내 눈이 감기는 게 보였는지 엄마 가 조심스레 나를 눕혔다.
나는 엄마의 손을 꼭 붙들었다. “엄마.”
“엄마.”
“그래.”
부르는 족족 대답이 들려온다. 그 게 좋아 웃었다. “살아서 다행이에요.” 엄마도, 나도.
나는 그 말을 끝으로 잠에 빠져들 었다.
〈시즌 1 완결〉74 하기수궁님은
[戶岳휴통1살과화락7
• .• 2"예마로장편수설&수7국구*
窟\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