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무엇이 그리 마음에 안 드는 지 걸음걸이가 무거웠다.
나는 재가 갑자기 왜 저러나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굳이 이해할 필요가 없었다.
대신 나는 최대한 그 걸음걸이를 보지 않으려 잠시 그곳에 머물렀고, 가람이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궁 녀를 따라 내가 앉아 있던 그늘진 곳을 벗어났다.
내 처소와 아주 먼 곳인 줄 알았 는데, 얼마 걷지 않아 내가 나왔던 그 전각이 보였다.
그대로 전각의 문지기 같은 높은 돌계단을 마주하려는데, 뒤에서 누 군가가 내 어깨를 억세게 잡고 돌렸
다.
“이제 오셨군요. 초비 마마! 이 지 하, 정말 한참을 기다렸답니다.” 한껏 밝은 척을 하지만 이를 악물 었다는 게 여실히 나지는 목소리 였다.
얼굴 또한 마찬가지였다.
웃고는 있지만 눈을 얼마나 부릅떴 는지 핏발이 다 섰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팔을 움직였 다.
손가락이 넝쿨처럼 파고들어 어깨 가 아팠다.
하지만 그럴수록 내 앞에 선 처음 보는 궁녀는 더 손에 힘을 주었다.
이게 지금 뭐 하자는 건지.
내가 아무리 어린 후궁이라고 해도 당장 목을 날려도 이상하지 않을 처 사였다.
나는 이번만큼은 표정을 숨기지 않 았다.
내 가라앉은 얼굴에 궁녀는 잠시 움찔했지만 이내 입이 찢어져라 입 꼬리를 올렸다. 제깟 게 월 할 수 있겠어? 하는 생각이 여기까지 들리 는 것 같았다.
서릿발 같은 목소리는 고저 없이 차가웠다.
내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도자기같이 말끔한 얼굴로 그 렇게 말하며 흘끔 궁녀의 뒤를 바라 보았다. 가람은 갔나 보다.
그럼 목격자도 없고. 여기 있는 동 안 못 봤으니 중요한 궁녀는 아닌 것 같고.
자, 이 사랑스러운 궁녀님을 어떻 게 족쳐야 될까?
“네 이년! 감히 누구에게 는 것이나!”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내 곁에 있던 궁녀가 먼저 선수를 졌
다.
호랑이 같은 목소리에 나는 잠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래. 괜히 내가 나서 봤자 여덟 살짜리 에 말을 누가 듣겠나.
죽이겠다, 사지를 찢겠다 협박하면
011 같지 않다고 미움이나 받지.
그래도 뭔가 아쉬워서 손끝을 한 번 꼼지락거리는데, 다시 한 번 고 성이 들려왔다.
“너야말로 지금 감히 누구에게 리를 쳐! 나는 귀비 마마를 지척에 서 모시는 궁녀란 말이다! 네깟 시 비 따위가-
나는 그녀의 말을 뚝 끊고 끼어들 었다.
내가 들어도 퍽 다급해 보이는 어 조였고, 실제로도 그랬다.
씩씩대던 궁녀는 악귀같이 눈을 부 뜬 얼굴을 내게 돌렸다.
“귀비 마마께서 당신을 부르신다는 지령을 전하러 이리 왔는데, 이런 대접이라니! 귀비 마마께서 이 일을 알고도 가만히 계실 것 같습니까?” 그 뒤로도 무슨 말이 더 있었는데, 내 귀에는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려다 말고 아파 오는 머리에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
다.
그래. 그냥 넘어갈 리가 없지.
올 것이 왔구나.
미리내는 그 철저한 자기관리와 달 리 궁녀를 아주 대충 뽑는 편이었 다.
어디서 누가 어떤 사람을 넣어 주 든 그냥 그대로 받았다.
용인 미리내를 해질 만큼 대단한 인간이 없기도 했고, 그를 지척에서 모시는 궁녀는 정해져 있는 탓도 있 었다.
그 외에 자질구레한 일을 하는 궁 녀들은 수틀리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거나 없앨 수 있으니까.
아니, 애초에 그를 지적에서 모시 는 궁녀는 나에게 저렇게 건방질 수 가 없지.
조용히 눈으로 킬각을 재면 모를 까, 자신의 지위를 떠벌리며 날 조 롱할 리가.
이 궁녀의 얼굴이 익숙하지 않았던 이유가 직책이 낮아서가 아니라 이 궁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니. 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조용 하고 밋밋한 궁녀가 스르록 미끄러 져 들어온다면 보자마자 '아, 미리 내가 보냈구나.' 했을 텐데, 이렇게 멍청한 애가 굴러 들어오니 영 이어 지질 않았다.
실제로 소설 속에 등장했던 미리내 의 궁녀들은 모두 자분했고, 내가 저번에 보았던 안대를 가져다준 궁 녀도 그랬으니 말이다.
미리내는 궁녀를 들이는 건 까다롭 지 않았지만 그 후에는 달랐다.
머리가 덜 돌아가는 게 눈에 보이 면 곧바로 내쫓았다.
이 궁녀가 쫓겨나지 않은 건 정말 신기한 일이다.
아니, 오히려 실세라는 걸 알아서 납작 엎드린 건가.
보아하니 다른 궁녀들 등쌀에 기세 도 못 피고 있다가 미리내가 직접 무언가를 시기니 기고만장해진 것 같은데, 거기에 상대가 새로 들어온 꼬맹이 후궁이니 더 기뻤겠지.
내가 황제와 사이가 좋지 않은 여 란 가의 딸이라는 것만 생각하고 방 자하게 군 것 같은데,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궁녀였다.
본인이 얼마나 대단한 가문의 딸인 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여란 가보다 는 약할 텐데, 그럼 산아 여란이었 던 내가 가주에게 쪼르르 일러바칠 거라는 건 생각하지 못했나 보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저런 애가 아직까지 미리내의 궁녀라는 게 놀 라울 지경이다.
그러니까 단번에 알아보지 못한 건, 분명히 내 책임이 아니라고
나는 그대로 몸을 푹 내려 코까지 물에 잠기게 했다.
연한 꽃향기가 나는 물에서 김이 폴폴 올라왔다.
흙바닥에서 뒹군 모습으로 귀비를 만나러 갈 수 없다는 명목하에 나는 지금 씻겨지고 있었다.
아니, 빨래 되고 있는 건가.
한숨을 내쉬자 물방울이 뽀글뽀글 올라왔다.
나는 인중까지 목욕물에 잠긴 채로 부산하게 향유니 빗 같은 것을 찾고 있던 희사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게 얼음 띄운 과즙을 주 있던 궁녀였다.
아까 목욕통을 준비하고 물을 받아 두는 사이에 물어보았다.
가장 앞에 있던 궁녀의 이름은 서 연이라고 했다.
이름을 물어보길 잘했다고 뿌듯해 하고 있는데, 희사가 내게 고개를 돌렸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의 눈이 휘 등그레졌다.
“마마! 목욕물 드시면 안 돼요!"
“안 돼!”
그 외침에 방 안에 있던 모든 사 람들의 경악한 시선이 내게 쏠렸다.
깜짝 놀라 어깨를 떤 나는 엉거주 춤 고개를 들었다.
“아, 안 먹었다.”
“어떡해! 이 꽃 먹어도 되는 건
가?”
“마마, 메. 하세요. 페!”
아니, 안 먹었다니까. 내게 조금이라도 살갑게 대해 준 것은 희사가 전부였다.
그녀 스스로도 자신이 말이 좀 많 은 편이라고 했고, 다른 사람들0 조용해서 재미가 없다고 했다.
한 시간 만에 그것들을 본인의 입 으로 떠들었으니 신빙성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왜 이렇게 부산해진 거지. 꽃 하나 먹었다고 해도 죽진 않지 않나.
이 세상에는 화학 약품도 없을 테 니 말이다.
한 궁녀가 어딘가로 뛰어가더니 책 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한 페이지에서 그녀의 손이 멈춘 것을 나는 보았다.
“꺅! 유라꽃에 독성 있어!”
“뭐? 그걸 어떤 미친 새_, 아, 아 니. 미친놈이 마마 목욕물에 넣었 어! 마마, 어서 나오세요!”
“아, 아, 아니야. 미안해. 이름 잘 못 봤어.”
“죽을래?” 뭐야. 진짜 갑자기 왜 이래.
나는 슬쩍 순을 들며 작게 말했고, 그 순간 모든 소음이 멈추며 내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나는 그 타이밍에 맞춰 입을 아, 하고 벌렸다.
“안 먹었어.” 그 순간 궁녀들의 얼굴에 스친 뻘 쭘함을 나는 근 십 년 동안은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용히 자기 자리로 돌아7갔다.
내 팔을 씻기는 희사만이 기득기득 웃고 있었다.
그때 문을 열고 서연이 들어왔다. 미리내에게 내가 늦는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하고 온 그녀가 궁녀들0 한 번 둘러보다 희사를 보고는 얼굴 을 찌푸렸다.
“희사. 조용히 해라. 어느 안전이라 고
“하지만 마마님, 아까 저 에들도
“귀비 마마께서 오래 기다리고 계 실 듯합니다.”
재잘거리려는 희사의 목소리를 다 른 궁녀가 뚝 끊었다.
곧바로 눈을 부라리는 희사의 모습 에 말을 끊은 궁녀가 눈을 부릅떴 다. 그 모습을 나는 어색하게 바라보0갔 다.
죄다 인형 같을 줄 알았던 궁녀들 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는 것이 낯설 었다.
원작에서는 산아가 황제와 붙어 있 거나, 후궁들과 기 싸움하는 장면만 나오다 보니 그녀의 궁녀들이 어땠 는지는 몰랐다.
초반에는 아예 서술이 없었고, 후 반부에서는 아이 같지 않은 독살스 러운 모습에 혀를 자는 대사만 두엇 나오니 말이다.
아이 같지 않은 건 나도 지지 않 을 텐데.
고작 여덟 살짜리 이린 애가 표정 변화도 없이 조용하면 그건 또 얼마 나 징그럽겠는가?
굳이 아이 같은 활달함을 연기해 사랑받을 생각 같은 건 딱히 없었기 에 방금 전의 반응이 조금 신기했
다.
“마마, 일어나 주시겠습니까.” 몸을 다 닦았는지 서연이 내게 말 했다.
그녀의 말대로 일어나자 몸이 목욕 통에서 번쩍 들려졌다.
어찌 되었든 지금 중요한 건 미리 내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일단 뭐가 됐든 납작 엎드려야겠 다.
아무리 여란 가가 날고 긴다고 해 도 황제를 능가할 수는 없다.
그건 황제가 사는 황궁에서 더욱 강조되는 말이었다.
그런데 왜 나에게 그렇게나 큰 궁 을 주었을까? 내 의문은 미리내의 궁에 들어서자 마자 풀렸다.
•이게 한 사람의 궁이라고?' 이 정도면 성이 아닌가?
그러니까, 한 사람의 처소가 아니 라 왕족 일가가 모두 사는 성.
어렸을 때, 그러니까 한국에 살 때 한 대학 캠퍼스를 가 보고 놀란 적 이 있었다.
사촌 언니의 대학이었는데, 언니는 내가 놀라는 것을 보고 웃으며 어떤 대학 안에는 버스도 다닌다고 했었
지.
약간 그런 기분이다.
이 시대는 동양적인 느낌으로 작가 가 만든 허구의 세계였지만, 복식이 나 생활양식 같은 것은 한국보다는 중국에 가까웠다.
스케일까지 중국이었구나.
총에받는 귀비의 궁에 비해 내 궁 은 한참 작았다.
특별 대우가 아니었다는 걸 알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아이참! 서두르시라니까요! 우리 마마를 얼마나 기다리게 할 셈이세 요!"
상념에 빠져 있는 내 팔을 아까의 그 시건방진 궁녀가 휙 잡아끌었다.
여전히 손힘을 조절할 생각은 없는 지, 잡힌 팔이 욱신욱신 아팠다.
미리내의 궁에 도착했을 때, 이 궁 녀는 내 궁녀들이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다고 엄포를 놓았다.
초대받은 것은 나이니 들어올 수 있는 것도 나밖에 없다는 억지를 쓴 것이다.
애초에 후궁들이 궁녀를 데리고 다 니지 않기도 했고, 상전의 힘이 더 약했기에 내 궁녀들은 낭패라는 얼 굴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아까까지는 서연이 용호상박으로 싸워 주기라도 했는데, 그녀마저 없 자 궁녀는 내게 마음껏 패악을 부리 기 시작했다.
폐하께 총이1받는 귀비 마마께 초대 받았으니 기뻐해야 한다는 등, 이리 왈가닥인 후궁이 어디 있겠냐는 등
입으로 떠들어 대기 시작하더니, 정 자가 가까워지자 이제 아예 내 팔을 잡고 질질 끌고 가고 있었다. 어린아이인 내 보폭이 성인인 제 보폭보다 느리다는 이유였다.
죽이고 싶다, 정말.
전에 가람이 데려갔던 시비보다 얘 가 다섯 배 정도 더 짜증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