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이 튀어 나7갔다.
무인으로 단련된 신체가 움직일 때 마다 몸에 꼭 맞춘 비단옷이 뜯어졌 다.
그의 옷을 만드는 궁인들이 수건을
물어뜯을 일이었다.
하지만 가람은 그것조차 신경 쓰이 지 않았다.
'미리내라니!' 그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 새끼.
면상에 금광석을 다섯 판은 깐 놈. 속에 구령이 열 마리는 들어앉은
그런 놈에게 그 조그마한 아이가 불려 갔다니!
가서 무슨 일을 당할지 누가 아는
가?
미리내는 그 자리에서 산아를 뼈째 로 씹이 먹고도 웃는 얼굴로 입을 닦을 놈이었다.
그런데 그 뱀 소굴에 산야가 갔다
“꺄악!”
“이, 이러시면 안 됩니다!”
가람은 미리내의 궁인 화령궁의 아 무나 붙들고는 귀비의 행방을 물은 뒤, 그곳으로 거침없이 돌진했다.
그를 막는 궁인들이 있었으나 가람
은 신경 쓰지 않고 미리내와 산아가 있는 방으로 향했고, 곧바로 문을 열어젖혔다.
“미리내!” 히끠
문을 열어젖히자마자 난 소리는 딸 꾹질 소리였다.
가람은 곧바로 입가를 가린 채 눈 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산야를 발견 했다.
원래도 새하안 쌀알 같았던 아이는
묵은쌀처럼 질려 쉴 새 없이 어깨를 떨고 있었다.
그 모습은 가람에게 미리내가 산아 를 괴롭힌 것을 사실로 만들기에 충 분했다.
가람은 잔뜩 겁에 질린 산아를 미 리내의 손아귀에서 구해 내야 한다 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무력을 쓰지 않고 미리내와 말로 싸운다는 진기한 상 황을 만들어 냈다.
가람이 누군가와 싸울 때 주먹이 먼저 나가지 않는 건 정말 특이한 경우였다.
그를 보고 벌벌 떨었던 산아가 있 있기에 존재했던 배려였다.
그리하여 가람은 떨던-딸국질이다 - 산아가 미리내의 품에서 너무도 태연하게 벗어나 인사를 하는 것에 인지 부조화가 왔다.
그러고는 그에게 돌아서 말도 없이 고개만 한 번 꾸벅한 것에는 더욱 충격 받았다.
미움받았나?
가람은 어릴 적부터 사고뭉지였고, 그가 사고를 친 후에는 누군가가 꼭 저런 눈빛으로 가람을 보고는 했다.
얼마 후 그는 지은 죄가 있었기에 할 말은 없었다만 조금 억울했다.
다만 그 순간에는 뒤통수를 맞은 듯이 굳이 있었을 뿐이다.
미리내의 앞이라는 것도 잊고 이렇 게 바보 같은 말을 내뱉을 만큼. 한편 미리내는 어땠을까.
놀랍게도 그는 가람의 멍청함을 비 웃지 못할 만큼 꽤나 의기소침했다. '마음에 안 들었나.
미리내는 얼마 전 산아에게 눈을 들킨 후 곧바로 뒷조사를 했다.
그리고 산아는 그의 눈을 알지 못 한다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미리내의 정체는 그의 가문에서도 가주밖에 모르는 비밀이었다. 미리내가 힘을 앗아 가면 가문은 무너지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아무리 깊은 동맹을 맺는다 하더라도 그 사 실을 알려 줄 리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미리내는 여란 가를 한 번 훑었고, 예상치 못한 사 실을 발견했다.
여란 가에서 산아 여란은 꿔다 놓 은 보릿자루 같은 존재였다.
저택 안에 이린 여자아이가 살았다 는 흔적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
다.
사랑받은 아이라면 응당 가져야 할 장난감이나 말썽을 부린 흔적 같은 것들 말이다.
사람들의 반응도 모두 펄쩍 뛰며 자신이 산아에게 얼마나 지대한 영 향을 끼졌는지만 주장하고 있었다.
모두가 산아를 극진히 모셨다는 그 절박한 말에 미리내는 반대로 진실 을 알아챘다.
산아가 그의 눈을 보고도 놀라지 않은 것은 감사한 일이다.
다만 미리내는 그 사실을 알리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할 필요성을 느 꼈다.
피죽 한 그릇 얻어먹지 못한 것처 럼 말랐으니 이번 기회에 식성을 파 악해 궁으로 음식을 보내 줘도 좋겠 지.
산야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지만, 미리내가 산아를 부른 속셈은 정말 로 이것이 다였다.
하여 그는 어째서 산아가 자신을 그렇게까지도 꺼리고 불편해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제 고작 여덟 살인 아이가 과하 게 의젓한 것이 마음이 쓰였다.
예법에 맞춰 경직된 얼굴도 그중 하나였다.
조금 더 아이 같이 굴어도 괜찮을 텐데.
미리내는 산야가 안쓰러웠다.
미리내가 산야에게 웃으면 예쁠 거 같다고 상냥히 말했을 때, 산아는 정말로 찬란하게 웃었다.
그 모습에 마음을 놓았구나, 하고 안도하기가 무섭게 산야는 다시금 미리내의 눈치를 보았다.
뭐가 문제였지.
위협 따위는 일절 하지 않았고, 오 히려 잘 챙겨 주었다고 생각했는데. 눈이 징그럽지 않다고 말했지만 역 시 어린아이가 보기에 두려웠을까?
그러고 보니 산아는 그와 눈도 잘 마주치지 않았다.
미리내는 진심이었고, 정말로 조금 서운했다.
다만 그가 간과한 것은 얼굴에서 눈은 표정에 아주 큰 영향을 차지한 다는 것이고, 미리내는 눈을 제외하 고 감정 표현을 할 수 있는 입을 아주 최소한으로 움직인다는 것이었 다.
만약 아까의 상황에 산야가 미리내 의 눈을 보았다면 안타까이 여긴다 는 것을 알아챘을 테지만, 산야는 그의 입밖에 볼 수 없었다.
눈을 가린 상대의 웃지 않는 입.
그건 미리내에게는 안타까움이었지 만 산아에게는 공포였다.
'음식이 별로였나?'
하지만 그것을 모르는 귀비 마마께 서는, 애꿎은 숙수 탓을 할 뿐이었 다.
쌀쌀한 바람이 볼을 어루만지자 절 로 앓는 소리가 났다.
해는 금세 져 비렸고, 그 덕에 기 은이 뚝 떨어졌다.
미리내의 궁, 그러니까 화령궁의 궁인들은 나를 씩 챙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아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에게 내 소문이 좋지 않을 거 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으니 말이
다.
미리내를 지근거리에서 모시던 궁 녀 하나가 간신히 빠져나와 나를 화 령궁의 문 앞까지 데려다주었고, 거 기서부터 내 궁인 화서궁까지는 나 혼자 걸어가아 했다.
그 사이는 걸어서 십 분 정도였고, 멀지는 않았으며 길도 기억하고 있 었지만 깜깜한 밤이라 무서운 건 어 썰 수가 없었다.
그 길을 걸으며 나는 내내 아까의 건방졌던 궁녀를 욕했다.
그래도 이제 다 왔다. 나는 화서궁 의 높은 대문에 문을 두드렸다.
작은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내가 두드려 놓고도 작게 인 상을 쌌다.
문지기가 듣고 문을 열려면 소리가 좀 더 커야 하는데, 이 소리는 인간 이 아니라 작은 고양이가 문을 긁는
것 같았다.
발로 걷어차아 하나, 하고 생각하 고 있을 때, 문이 벌컥 열리며 얼굴 들이 불쑥 다가왔다.
“마마!”
“오셨군요! 무사하서요? 어디 다치 신 곳은 없으시고요?"
나는 가장 앞에 있는 수다쟁이의 이름을 얼떨떨하게 불렀다.
희사는 내가 불러 준 것이 뭐가 좋다고 환하게 웃었다.
“네! 제 이름을 기억해 주셨네요!”
“너, 정말! 지금 뿌듯해할 때니! 마마부터 어서 안으로 드셔야지!” 아까 내게 꽂을 뱉으라고 종용했던 궁녀가 희사를 나무랐다.
그 말에 모여 있던 궁녀들이 일제 히 등에 채찍을 맞은 듯이 파드 떨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자린 서연이 내 순을 내밀었다.
나는 가만히 그녀를 올려보았다.
해가 진 뒤라 그녀의 표정이 보이 질 않았다.
“어서 들어오세요, 마마.” 손을 잡으라는 걸까?
잠시 망설이던 나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 위에 손을 올렸다.
차갑게 언 손에 따뜻한 기운이 폭 와 닿았다. 서연이 내 언 손을 꼭 감싸고는 살살 비볐다.
나는 코끝이 시려서 볼을 찡긋거렸
다.
“세상에. 이 밤에 마마를 혼자 보 내다니! 다들 어쩜 그리 피도 눈물 도 없답니까!” 희사가 분노에 자 씩씩댔다.
나는 그녀를 걱정스레 올려보0갔다. 그러다 미리내의 귀에 이야기가 들 어가기만 하면 크게 벌을 받을 텐
데.
“희사.”
무어라 말을 해 주려는 찰나 서연 이 엄중한 목소리로 희사를 불렀다.
궁녀들의 수장 격인 그녀는 실세가 누구인지 아는 모양이었다.
한시름 놓았다고 생각했을 때, 서 연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들어가서 하거라.” 나는 나도 모르게 씩은 동태 눈으 로 서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가 올려다보고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내 쪽으로 시선을 주 지 않0갔다.
결국 나는 그 눈을 풀고 픽 웃었 다.
사람이다 보니 챙겨 주는 게 달갑 지 않을 리가.
사실 반겨 주어 조금 좋았다.
다만 문제라면••• “산야 아가씨!” 저기 뛰어오고 있는 저 시비였다.
“아가씨! 너무 오랜만이에요. 제가 없어서 많이 불편하셨죠?” 시비는 단번에 서연의 손에서 내 손을 채 갔다 친근한 척 팔짱을 끼며 달라붙는 것이 참 뻔뻔했다.
기 차이가 나 내 팔이 위로 한껏 들렸는데도 아득바득 팔짱을 끼는 작태 또한 그랬다.
그래도 다른 궁녀들이 있다고 대놓 고 쌍욕은 못 하는 건가.
“오랜만인가. 난 널 보았던 것이 방금 전 같은데. 한 삼십 년 후에 왔으면 좋을 것을.” “아이참, 아가씨도!”
내 심드렁한 말에 시비가 이를 꽉 깨물고도 애써 발랄한 목소리로 말 했다.
그러면서도 슬그머니 을 뻗어 내 옆구리를 꼬집기에, 나는 단번에 인 상을 썼다.
“아파. 노}.”
힘을 주어 뿌리치니 그녀가 밀려났 다.
시비의 눈에는 내가 어떻게 이럴 수 있나는 눈빛이 가득했다. “아가씨!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조금만 더 뒀다간 내 머리채도 잡 겠네.
“여긴 왜 왔니.”
“왜 왔긴요! 제가 있을 곳이 아가 씨 곁 말고 더 있어요?” “필요 없으니 나가.” 족칠까, 하는 생각이 안 드는 것은 아니다.
원작의 산야의 복수를 하려는 건 아니지만, 이 시비는 산야뿐만 아니 라 나에게도 무례하고 건방졌다.
다만 이 먼지 같은 걸 족쳐다가 어디에 쓸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 다.
그래 봤자 더 날뛰기만 할 거고, 그냥 궁 밖으로 쫓아내고 얼굴도 안 보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았다.
내 나가라는 말에 시비는 또다시 날뛰기 시작했다.
八슬 개 짖는 소리로 들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며 인상을 찡 그리는데, 궁녀들이 슬슬 그녀를 둘 러싸기 시작했다.
“마마께 친근한 줄 알고 가만히 두
있더니•••
“이 건방진 것이.”
02
나는 순식간에 변한 그들의 분위기 에 놀라 눈을 깜빡였다.
희사가 내게 다가와 붙임성 좋게 어깨를 감쌌다.
“들어갈까요, 마마?” 그 애교스러운 목소리에 나는 픽 웃었다.
누가 보아도 시선을 돌리려는 모습 이지만 씩 화내고 싶지 않았다.
내 손으로 안 치워도 되니 고마울 노릇이지.
밤바람을 오래 맞았더니 0 스 己-0 스
했다.
벌써 목구멍이 붓는 기분이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은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 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