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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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좋아 황제의 칙서지, 그건 사 과 편지였다.
그것도 종이가 한참을 펼쳐질 만큼 아주 구구절절 적은.
그 소식을 들은 나는 고운의 앞머 리를 조심스레 자르고 있던 손을 삐 끗해 뭉텅 잘라 버리고 말았다.
황제는 정말이지 이상했다.
내가 알고 있는 사실 안에서 그녀 의 행동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저게 정말로 아무도 사랑할 수 없 는 사람의 행동이라고?
설마 빙의된 건가? 이 세계 사람이 아닌 거야?
원작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황제 와 그녀를 사랑하는 남주들의 절절 한 로맨스였다.
하지만 내가 개입함으로써 황제는 귀여워졌고, 미리내는 말랑해졌으며
가람은•••
머릿속에 그의 행동들이 주르륵 스 쳐 지나갔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음, 원래대로다.
'아, 이게 아니라.'
슬그머니 개입하려는 딴생각을 머  ~들어 치워 낸 나는 다시 심 각해졌다.
원작이 이렇게 바뀔 수가 있나? 생각해 보면 요즘에는 후궁들 사이 에서의 싸움도 잘 일어나지 않았卍다.
사소한 다툼부터 시작해서 커다란 싸움도 마찬가지였다.
원작에서는 가람이 미리내에게 덤 볐다가 가문의 돈줄이 끊겨 울며 겨 자 먹기로 사과하러 가는 것이 허다 했는데.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후궁들 또한 조용했다. 궁이 아무리 넓다 해도 누군가 싸우니 궁이 부서지면 큰 소리가 났는데, 요즘에 는 그런 일이 없었다.
가끔 다른 후궁들을 마주치는 경우 가 있었는데, 대부분 그-= 0 1 르  어져라 보다가 자그마한 주머니를 쥐여 주곤 했다. 그 주머니 안에는 대부분 간식이나 보석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요즈음 황제가 내 처소만을 꼬박꼬 박 찾는데도 그랬다.
설마 싸우지 않는 것도 날 위해서?
아, 아니. 이건 좀 과대망상이고.
그럼 뭐지?
기껏 반쯤 푼 실타래가 다시 마구 엉켰다.
나는 착잡한 일굴로 내가 두 번 이 상 읽은 황제의 편지를 다시 가져왔 다.
그것을 끝까지 다 읽은 나는 아연 한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편지에는 지금껏 보낸 선물들이 부 담스러웠으면 미안하다고, 기분 나쁘 게 할 생각은 아니었다고 쓰여 있었
다.
나는 그걸 보고 월 이런 걸 다 사 과하냐며 웃어야 할지, 그 순수함에 울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만약 이게 연기라면 이 소설의 최 고 흑막은 미리내가 아니라 예화였 다.
단단히 못 박아 둔 '황제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라는 명제에 예화가 마구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
아, 어렵다. 정말 너무 어렵다.
만약 내가 알던 설정이 틀렸다면, 예화가 평범한 사람처럼 사고한다면 내가 지금까지 한 짓은 뭐가 되는 거지?
본의 아니게 상처를 준 행동들이 눈앞을 스쳤다.
새삼 내가 쓰레기가 되는 기분이다. 아니, 그렇지만 이건 솔직히 백 퍼 센트 내 잘못이라고 말하기는 힘들 어!
초반의 예화는 내게 죄책감을 느꼈 고, 아이인지라 챙겨 주려 했으며 학 대당한 나를 연민했다. 하지만 그뿐 이었다.
그 점잖은 황제가 계속 있을 줄 알 았지, 나는!
내가 생각한 황제의 애정은 하하 웃으며 잘 지냈느냐, 하고 안부를 묻 는 정도가 다였다.
나를 졸졸 따라다니는 강아지가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예화는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모두 거짓이라 고 믿는 것이 힘겨웠다.
하지만 그녀가 내게 잘 대해 주는 적 연기해서 얻을 것이 대체 뭐가 있지?
곰곰이 생각하던 내 머릿속에 불이 켜지듯 생각 하나가 퍼뜩 떠올랐다.
맞아. 이능.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황제가 많은 후궁을 두는 것은 후 계자를 생산해아 한다는 의무도 있 지만, 그들의 이능을 이용하려는 의 도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정계에 투입될 수 있었던 이유는 황제를 맹목적으로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사용 방법이 무궁무진한 염력이라 는 능력을 가진 여란 가의 후궁을 이용하지 않은 것은, 내가 어려서가 아니라 황제에게 시큰둥했기 때문이 있나?
나풀대는 실타래 같던 머릿속이 천 천히 가라앉았다. 결론이 났다.
'이거였구나.
왜 팔자에도 없는 푼수 짓을 하나 했더니.
답답했던 생각이 뚫리며 옅은 실망 감이 밀려왔다.
미운 정도 정이라고, 누군가의 에정 이 몽땅 거짓이었다는 걸 알아차리 는 건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황제에게 가서 사실대로 털어놓자. 나는 이능이 쥐공만큼도 없는, 사생 아로 인정받지도 못했던 혼외자라고. 그렇게 된다면 나는 후궁의 의무 두 가지를 모두 해내지 못하는 후궁 이 되겠지.
'쫓겨나려나.
불행의 가정은 언제나 쉽다.
머릿속에 만약 황궁을 나가게 되었 을 때의 내 모습이 주르륵 스쳐 지 나갔다.
내가 이능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진 다면 황제는 여란 가에서 새로운 후 궁을 맞을 것이고, 나는 본가로 돌아 가게 될 것이다.
피가 싹 식었다.
그렇게 될 경우, 기윤이 날 평온하 게 죽여 주기나 할까?
전생에서도 사고로 죽은 뒤에 산아 의 몸에 들어왔다.
五百=又0 0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 길에 깔려 있는 아픔은 끔찍하게 싫었다.
몸이 조각조각 바스러지는 것 같았 다. 기절할 수도 없을 만큼 아팠다.
기윤이 내게 가할 수 있는 고문은 몇 가지가 될까.
나는 한 가지를 강하게 다짐했다.
'황궁에서 쫓겨나지만 않게 해 달라 고 하자.
내게 이능이 없음을 앎으로서 황제 는 내게 관심이 식었겠지만 그럼에 도 그녀는 자애로운 황제였다. 미리내와 가람은 나를 제법 아낀다. 지금의 신분을 유지하는 것은 티끌 만큼도 바라지 않지만, 궁녀로라도 받아 줄지 몰랐다.
가능하다면 입을 다물고 있고 싶었 지만, 황제가 내 이능을 사용하고 싶 이 하는 이상 들기는 건 시간문제였 다.
물론 지금껏 속인 죄가 있으니 또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현장 검 거가 아닌 자수잖아.
좀 봐주겠지. 여태껏 지낸 시간도 있는데.
•••봐주겠지?
'모다• •• 모르겠다•••
기력이 쭉 빠진 나는 그대로 침대 에 털썩 누웠다.
궁녀들이 또다시 부산을 떨었다.
그 일굴들을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몸을 호떡 뒤집듯 뒤집어 베개에 일 굴을 묻었다.
그래. 뭐 별일이나 있겠어.
냉정하게 생각해 보아도 내가 끔찍 하게 죽을 확률은 낮았다.
만약 황제가 더 이상 내게 신경을 쓰지 않고, 그래서 기윤 여란이 내게
손쉽게 뻗질 수 있게 된다면 다시 황제의 관심을 돌리면 된다.
쓸모 있을 만한 현대의 지식을 떠 올리던 나는 픽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어떻게든 황제의 관심 을 피하겠답시고 끙끙대던 나날이 떠올라 우스웠다.
내가 황제를 피해 다니는 것을 거 진 포기한 것은 약 한 달 전부터였
다.
내 안전이 그림자와 궁녀들, 그리고 그 셋의 공식적인 지지로 발 뻗고 잘 만큼 든든해지기도 했고, 내가 아 무리 끼려 해도 눈치 보는 강아지처 럼 슬금슬금 다가오는 것을 매정하 게 발로 걷어찰 수 없어서였다.
어느 햇살 좋은 날에, 예화가 피크 닉을 가자고 한 탓에 미리내와 가람, 예화와 도시락을 싸 들고 후원에 나 간 적이 있었다.
음식은 맛있었고, 햇볕은 따뜻했다. 미리내와 가람이 나를 무릎에 앉히 겠다고 싸워 대고, 예화는 내 눈치를
보는 모습이 우스워서 조금 웃으니 싸움이 멎었다.
그들이 바보같이 웃었다. 그 웃음이 눈부셨다.
즐거웠지.
생각은 거기에서 멈췄다. 고작 네 음절을 곱씹는 생각을 몰아내려 나 는 머리를 깐들었다.
아쉽지 않아.
나는 그렇게 애정에 굶주리지 않았 다.
그러니 그들의 관심과 애정 또한
그리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만약 그들이 내게 등을 돌린다고 해도 나는 상처받지 않을 거야.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고, 당장은 조금 슬프더라도 이튿날 아침에 눈 을 뜨면 또 괜찮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그래. 그러면 돼.
서연도, 희사도, 여류도, 고운까지 모두 내 곁을 떠나더라도 무너질 만 큼 서글프지 않아.
곁에 아무도 없어 정 외로우면 정 붙일 만한 작은 것을 찾을 수 있다.
그건 꽤 버틸 만했다.
혼자 있어도 괜찮아.
지금껏 그랬잖아.
나는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내쉬 었다.
숨이 명지께에서 턱 막히는 기분이 들어 얼굴을 찌푸렸다. 이 몸에 빙의한 뒤로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다시 이러네.
베개에 얼굴을 파묻자 조심스러운 손길이 내 어깨를 쓸었다.
“마마. 왜 그러서요.”
그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희사가 울상을 지으며 내 옆에 쪼그 리고 앉아 있었다.
희사뿐만이 아니었다. 서연도, 고운 과 여류와 다른 궁녀들도 나를 걱정 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애정이 포근해 나는 웃으려다 말고 얼굴을 잠시 찡그렸다.
나는 금세 괜찮아질 테지만, 얼마 가지 않아 저들은 나와 언제 만났나  는 듯이 멀어지겠지만.
해어지게 되면 정말 많이 아쉬울 거야.
“아니. 괜찮아.”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무렇 지 않은 얼굴로 다시 웃었다.
“하지만 마마•••  희사가 우물쭈물 내게 말을 붙이려 했으나, 서연의 제지로 그쳤다.
가만히 고개를 내저은 서연이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마마. 송구하오나•••  그녀는 말수가 없었고 표정도 딱딱 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그녀가 내게 화 낸다는 기분은 들지 않은 것이 신기 한 일이다.
지금 또한 그랬다.
서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 지만, 나는 그게 긴장이라는 것을 알 았다.
“한 번 안아 드려도 괜찮으시겠습
니까.”
내게 깍듯이 예를 지카던 서연답지 않은 말이었다.
나는 어색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 다가 어정쩡히 팔을 벌렸고, 폭 끌어 안겼다.
희사도, 다른 궁녀들도 그렇듯 서연 의 품은 딱딱했다.
누군가와 포옹을 해 본 적이 없는 지 자세도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하 지만 따뜻했다.
“마마.
“저는 이곳에 있습니다.” 토닥, 토닥.
고생을 많이 해 뒤틀리고 거친 손 이 내 등을 투박하게 두드렸다.
“마마께서 하명 하시면, 저는 그 자 리에 있을 겁니다.”
그 품 안에 안긴 나는 서연의 어깨 너머로 잔뜩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궁녀들을 보고 푸스스 웃음을 터트 리고 말았다.
참 상냥한 사람들.
“고마워.”
조금 울고 싶었다. 하지만 눈물이 나지 않았다.
산야의 몸으로 들어오고 난 뒤에 일어난 변화였다.
아이의 눈은 지독하게도 메말라 있 었다.
하지만 그렇게 불만스럽지 않았다. 나는 눈물로 흐려지지 않아 맑은 눈 으로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찬찬 히 뜯어보았다.
시간이 지나도 기억할 수 있을 만 큼 자세히.
“화룡궁으로 가야겠구나. 기별을 넣 어 주렴.” 다시 돌아올 수 있다면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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