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4 0 0
                                    


어디 있는지 몰라 대충 허공을 째 려보니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내 분노는 제법 귀엽게 본 모양이 지만, 여전히 나를 보내 줄 생각은 없는 듯했다.
한숨을 내쉰 나는 손에 들린 용 비녀를 더 꽉 움켜잡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냥 생각만 하면 되나?
서라국 금서실로 이동, 이렇게?
그리고 놀랍게도, 그렇게 생각하고 눈을 뜨자 나는 금서실에 와 있었 다.
꿈인가 싶었지만 손에 쥔 여의주에 작게 금이 가 있었다.
신기하게 여의주를 내려다보던 나 는 고개를 들고는 조금 민망했다.
고운이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해 주는 거 까먹었다.'
꽃을 장식하지 않은 사람들이 사라 졌다고 했으니까, 나도 잠시 몸이 사라졌을 텐데.
잠을 못 자서 머리가 멍하다 보니 잊어버리고 말았다.
“나 잠깐 사라졌었지. 미안해. 내가 설명을 잊어버렸어.”
내 말에 고운이 얼떨떨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이 자리에 계셨습니다." 그랬어?
나는 고개를 가웃했다. 아예 사라 지지 않아서 그랬던 건가?
“그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시기
청회색 눈동자가 불안으로 떨렸다. 내 몸이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그래 도 뭔가 이상하다는 건 느낀 모양이
다.
“대의를 부를까요?” “아나, 괜찮아.”
고운의 손을 잡아 주며 나는 바닥 에 떨어진 꽃을 눈으로 찾았다.
다시 꽂아야 해. 안 그러면 또 그 하안 공간으로 끌려갈지 모른다.
두 개 남은 기회인데, 또 거기서 빠져나오는 걸로 하나를 소비할 수 는 없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꽃이 둥실 떠 올라 내 얼굴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의아한 얼굴로 꽃이 내 귓가에 꽂 히는 것을 지켜보던 나는 문득 손에 쥐이진 여의주에서 파삭, 소리가 나 는 것을 들었다.
아, 세상에. 이능.
'아냐, 이거 아나. 취소!' 황급히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미 꽃 은 내 귓가에 꽂힌 뒤였다.
그나마도 두 개 남았던 기회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하나를 날려 버리 다니.
너무 허무해서 웃음도 울음도 나오 지 않는데, 순간 세상이 휘청대며 고안에서 무언가 주록 흘렀다.
인중이 축축해 만져 보니 피가 흐 르고 있었다.
고운이 대경해 내게 헝겊을 내밀있
다.
나는 그것으로 코를 막으며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와, 엄청 어지러워. 사람이 두세 개로 보이네.
후폭풍이라는 게 이 정도였다니. '고작 꽃 하나 든 걸로?'
나는 손안에 든 여의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여러 갈래로 금이 간 여의주는 한 번만 더 충격을 가하면 완전히 부서 질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맞겠지.
그 이상한 공간에서 금서실로 돌아 오는 것으로 한 번, 방금 꽃을 주워 꽂는 것으로 한 번.
'앞으로 한 번 남은 거야.' 쓸 수 있는 힘의 종류는 상관없다. 다만 문제라면 그 후폭풍이다.
고작 꽃을 들어 올리는 가벼운 힘.
그것만으로 코피가 났다.
모르긴 몰라도, 기윤을 막을 수 있 는 이능은 가볍디가벼운 꽃 두 송이 를 들어 올리는 것보다 많은 힘이 필요할 것이다.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이미 여의주 안에 담긴, 새로 부여 하지 않아도 되는 힘.
그런데도 굳이 한 번이라고 말했던 이유는, 제대로 된 힘을 한 번밖에 사용할 수 없다는 의미 아니었을까? 크게 힘을 쓰면, 그 후폭풍도 그만 큼 클 것이다.
그러니까 기윤을, 여란 가를 막을 정도의 이능을 쓴다면.
'죽겠구나.'
물 흐르듯 결론이 연결되었다. 본 능적인 생각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머리카락에 비 녀를 대강 돌려 꽂았다.
'이제 포기하자.  내가 이능을 쓸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찾아봤는데도 없다면, 희망을 버릴 때도 됐다. 기윤을 막는 건 조금 번거롭기는 해도 다른 방법이 있다.
'귀족들을 설득하면 돼.
마침 그들 모두가 여란 가를 경계 하고 있을 테니, 명분을 던져 주고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건 어렵지 않 을 것이다.
물론 어렵긴 하겠지만, 이능 한 번 쓰고 절명하는 것보다야 낫겠지.
나는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불안한  을 달랬다.
이튿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까 맣게 모른 채로.
이튿날 아침. 나는 기묘한 분위기를 느끼며 잠에 서 깨어났다.
여느 때와 같은 아침인데, 조금 달 랐다.
황궁 안이 무섭도록 조용했다.
발걸음 소리 하나, 말소리 하나 나 지 않았다.
마치 궁 안이 텅 빈 것처럼.
나는 나지막이 그 이름을 불렀다. 평소라면 문 앞에서 대기하다가 내 가 부르자마자 들어왔을 아이였다.
하지만 여전히 문 앞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게 누구 없느냐.” 재차 물어도 결과는 같았다. 이 상 황이 낯설지 않았다.
지수를 만나러 동궁을 빠져나가야 했을 때, 그리고 기윤이 황궁을 찾 아왔을 때.
그때도 꼭 이렇게 궁이 조용했있
다. 나는 인기척을 죽여 침상에서 일어 났다.
그리고 경대의 서랍을 열어 깨지기 직전의 검은 구슬을 꺼냈다.
비녀를 늘 들고 다닐 수 없으니 구슬을 빼내어 둔 것이 얼마나 다행 인지 몰랐다.
쓸 일이 없다면 좋겠지만, 그래도 혼자 죽을 수는 없지 않나.
한 손에 여의주를 든 나는 천천히 문을 열었다.
복도는 고요했다.
복도가 고요한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늘 궁인들 몇몇이 서 있었고, 늦은 밤에도 돌아가며 불침번을 섰다.
이 기묘한 고요가 우연이 아니라는 걸 정면으로 마주하는 건 꽤 소름 끼쳤다.
나는 조용히 복도를 걸었다. 머릿 속이 복잡했다.
'왜 벌써?'
기윤이 온 것은 맞는 듯했다.
그렇다면 동궁에 남아 있어야 할 까?
하지만 단순히 나와 이야기를 나누 러 황궁에 침입했다기엔 조금 이상 했다.
지금 기윤의 입지는 위태로웠다. 죄인의 신분으로 황궁에 침입하는 것은 반역이라 비취질 수도 있을 턴-1
쭉 이어지던 생각이 멈췄다.
나는 걸음을 멈춰 섰다.
결단을 내려서는 아니었다.
저벅, 저벅.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이내 멈춘다. 나는 웃으며 소리의 근원을 바라보 았다.
•••아버지.”
나와 시선을 마주한 기윤이 가만히 웃었다. 나는 반갑다는 듯 웃으면서도 그를 타박했다.
“황궁엔 어쩐 일이세요? 어찌 언질 도 없이 이리 오신 거예요.” 하지만 기윤은 대답하지 않고 내게 한 발짝 더 다가왔다.
빛을 등진 그 얼굴이 어두웠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내 얼굴에서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 을 때, 기윤이 말했다.
“놀라질 않는구나.”
“아비가 올 것을 예상이라도 하고 있었느냐?”
꼭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듯한 의 미심장한 말이었다.
내가 대답하지 못하자, 기윤이 피 식 웃었다.
“그동안 아비를 잘도 속여 왔더구
나. 산아.” 그 말에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온몸의 피가 식었다. 태연하려 노 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들켰어.'
어디까지 알고 있지? 대체 어떻
기윤이 내게 손을 뻗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고, 그는 나를 안아 들었다.
'네 말썽 정도야, 아비 된 도리로 받아 주어야겠지.”
그가 한가롭게 말을 이었다. 내 등 을 토닥이는 손길이 다정했다.
“서운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이번 한 번만 눈 감아 주마.”
0 0
  내가 그에게 적의를 가진 것을 안다. 그런데도 그냥 넘어가겠 다고?
“너는 영민하니 아비가 무슨 생각 을 하는지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단 다.”
그런 내 의문을 안다는 듯이, 기윤 이 상냥하게 말했다.
“허나 산아. 아비와 대적하기엔 년 아직 어리구나.” 그 말에 나는 깨달았다.
그는 내가 필요해서 살려 둔 것이 아니었다.
적의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아도,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걸 알아도 그 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니
까.
언제든지 쥐고 휘두를 수 있는 약 한 존재라서 넘어가겠다는 거야.
“오늘은 너와 폐하를 뵈러 왔단 다.”
그의 목소리가 가벼웠다. 정말 목 적이 그것뿐이라는 듯이.
“폐하께서 먼 길을 떠나신다 하니, 내가 배웅해 드리는 것이 응당 맞지 않겠느나.” 이어진 뒷말에 나는 숨을 삼켰다.
못 알아들을 수 없는 노골적인 은
그는 오늘 황제를 죽이려 한다.
나는 인형처럼 기윤에게 안긴 채 화룡궁으로 갔다.
화룡궁으로 향하는 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고요함이 황궁이 텅 빈 것처럼 보였다.
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반역을, 살해를 시도할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시기가 너무 빨랐다.
그것도 이런 방식일 거라고는 예상 조차 못 했다.
독을 먹여 병사로 포장하지도, 살 수를 보내 암살을 시도하지도 않았 다.
대놓고 황궁에 발을 들 01 |느 1- 고고여0 0 1한 반역.
지금 당장은 목격자가 아무도 없지 만, 밝혀지지 않을 리가 없다.
귀족들이 반발할 테고, 기윤 또한 그걸 알고 있겠지.
그럼에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이런 일을 벌였다.
내가 틀렸다. 그에게는 다른 귀족 들의 견제 따위는 상관이 없었다.
결국에는 모두 그의 손바닥 안에 있었던 것이다.
그가 움켜쥐려 마음먹는다면, 속 절없이 모두 바스러지고 말.
황궁의 모든 이들을 처리하고, 단 번에 황제를 고립시킬 수 있을 만큼 의 능력이라니.
어디까지 이능을 쓸 수 있는지 가 늠조차 할 수가 없었다.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바닥 안에서 이물감이 느껴지며 따끔거렸다.
금이 간 여의주였다.
나는 문득 여의주를 쥔 소을 내려 다보았다.
만약, 지금 이능을 쓴다면?
기윤은 내가 이능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러니 단 한 번. 그 한 번에 사력 을 다한다면, 그를 막을 수 있을지 몰라. 심장이 뛰는 소리가 내 귓가에 들 렸다.
극도의 긴장 상태라는 의미였지만, 그건 꼭 내가 살아 있음을 알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능을 쓰고 난다면, 나는 죽게 될까?
하지만 이대로 간다면 엄마가 죽는 다.
그녀는 내 어머니였다. 어느샌가 스며들어 이제 부정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를 위해 스 스럼없이 죽겠다고 나설 수가 없 었다.
“폐하께서 마중을 나오셨구나.”
어느새 도착한 화룡궁. 넓은 대전 한가운데에 화려한 용포 자림의 여 인이 홀로 서 있었다.
발걸음 소리를 들었는지 엄마가 뒤를 돌았고,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엄마가 활짝 웃으며 입 모 양으로 중얼거렸다.
엄마 괜찮아. 하고.

17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