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1 0 0
                                    


잠시 감은 눈앞이 새하얘졌다가, 이내 다시 평소처럼 돌아왔다.
코끝에 이국적인 향이 났다.
서라국의 황궁에서 늘 풍기던 향이 사라지니 기분이 묘했다.
나는 천천히 눈을 떴고, 그 이국적
인 향만큼 익숙하지 않은 풍경을 마 주했다. 높은 아치형의 하안 천장과 화려한 샹들리에.
왕좌의 장식 하나조차 서라국과 같 은 것이 없다.
물론 이 상황이 불편한 것은 풍경 탓이 아니었지만.
“실바누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 다, 서라국의 귀빈 여러분
단상 아래, 맨 앞줄에 서 있던 귀 족 여성이 우리에게 먼저 말을 걸었 다.
사투리를 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제법 해학적인 탓에, 이런 엄숙한 자리에서 사투리가 들린다면 웃음을 참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서 대륙에 오기 전 언령을 쌌고, 다행히도 실바누스의 언어는 표준어로 들렸다.
나는 활짝 웃는 그녀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한 뒤, 고개를 들어 왕좌 에 앉아 있는 왕을 바라보았다. 서글서글한 인상의 왕, 유리가 나 와 눈이 마주치자 활짝 웃었다.
얼굴을 보자마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유리는 어릴 때와 똑같았다.
“서라국의 태자, 산아 아륜이 실바 누스의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그 성정마저 변하지 않았는지, 유 리는 환하게 웃으며 내 인사를 받아 주었다.
나는 그에 마주 웃었지만, 슬쩍 시 선이 옆을 향했다.
'얼굴이 따끔따끔하네.' 유리는 상냥했지만, 사실 상황이 씩 좋은 편은 아니었다.
넓은 홀. 왕의 양쪽에 선 귀족들의 눈동자가 매섭다.
수군대는 소리들도 씩 좋게 들리지 는 않았다.
•••그렇게나 강대국이라더니, 사 절은 고작 둘을 보내는군요.”
“공물 하나 없이 오다니 뻔뻔하기 도 하지.”
“제 나라에 어려움이 있어 도움을 청하러 온 것이 아닌가요? 하면 전 하께 무릎 꿇고 예라도 올릴 것이
글쎄••  그렇다기엔 내가 맨손으로 온 건 아니고.
도움을 청하러 왔다기엔 11년 전 만만찮게 무례했던 너희를 우린 도 와줬고, 우린 제국이고 너흰 왕국이
라.
나는 그렇게 말하는 대신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귀족이 흠칫 놀 라더니 부채로 입을 가렸다.
나는 그에게 빙긋 웃어 주었지만,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우리를 마음에 들이 하 지 않는 이들에게 물어뜯길 건수를 주고 싶진 않았다.
참아 봅시다, 오늘은 첫날이니.
움찔하는 고운의 손을 꾹 잡아 나 서지 말라는 의사를 전한 나는 고운 에게서 함을 받아 들었다.
“이것은 제 모후이신 서라국의 황 제께서 보내신 성의의 표현이니, 부 디 받아 주시어요.”
함을 우리에게 처음 말을 걸었던 이에게 함을 넘기자 그녀가 유리에 게 그것을 내밀었다.
작은 소리를 내며 열린 함 안에는 옥가락지 하나가 들어 있었다.
멀리서 그것을 본 귀족들이 또다시 좋지 않은 목소리로 웅성거렸고, 나 는 즉시 덧붙였다.
“서라국의 초대 황제이셨던 화륜 님의 물건입니다.”
그 목소리에 수군거림이 뚝 멎었 다.
고작 하나이지만 그것만으로도 11 년 전 실바누스가 바리바리 싸 들고 온 공물들보다 값졌다.
용의 반려였던 초대 황제의 물건. 용에게서 파생된 수많은 이능과 마 법이 있는 만큼 이것 또한 강한 힘 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치명상을 입어도 세 번까 지 지유할 수 있는 황가의 보물입니 다. 왕께서 부강하심이 곧 나라의 안녕이라 하시며 모후께서 고심하여 고르셨답니다.”
어마무시한 힘이긴 하지만, 기실 서라국에 별로 필요가 없긴 했다. '우린 미리내 있으니까.'
그렇지만 보물은 맞으니 문제 될 것도 없지. 필요 없는 것을 처분도 하고, 생색 도 내고.
급하게 오느라 감자 고구마까지 쓸 어 담아야 했던 너희랑은 다르다고.
“이리 귀한 것을 기꺼이 보내신 서 라국의 황제께 감사하다 전해 주시
오.”
그 말에 나는 숨을 참았다.
난데없는 동 대륙의 말투가 튀어나 와 나는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고개를 드니 유리가 빙그레 웃고 있어서, 나는 무릎을 굽히고 치맛자 락을 들어 그에게 인사했다.
동 대륙의 복식을 입고 서 대륙의 인사를 하는 게 웃겼던지 크흠, 하 는 헛기침 소리가 났다.
“오는 길이 고단하셨을 텐데, 궁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저를 따라오 세요.”
앞에 서 있던 귀족이 웃는 얼굴로 나를 안내했다.
나는 생각보다 유쾌했던 인사를 마 치고 얌전히 그녀를 따랐다.
홀에서도 느꼈지만, 서 대륙은 동 대륙과 정말 달랐다.
흰 대리석으로 만든 회랑을 걷는데 정원이 보였다.
정원이 얼마나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지, 잔디가 자라 있는 간격조차 도 일정했다.
서라국의 정원도 조경을 아예 안 하지는 않지만 비교적 본연의 모습 그대로 남겨 두는 편이었다.
서라국은 숲 같다면 실바누스는 온 실 같네.
회랑을 얼마 걷지 않아 예쁜 덩굴 식물이 벽을 타고 자라 있는 궁이 보였다.
나를 안내해 준 귀족이 기르온 궁 이라고 일러 주었고, 나는 우아하고 커다란 방으로 안내되었다.
나는 연녹색 개노피가 달린 널찍한 침대에 앉아 발을 동당거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방 문을 똑똑 두드렸다.
나는 피식 웃으며 문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고, 기쁨으로 빛나는 금색 눈동자를 마주했다.
예를 표하려다 나는 슬쩍 눈치를 보았고, 넓은 복도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생긋 웃었다. “유리, 오랜만이야.” “정말이요!”
유리는 일이 해결된 뒤에도 얼마간 서라국에 머물렀다.
그동안 나와 -1-正,그 0 유리와 서련은 자주 만남을 가졌고, 유리가 서 대 륙으로 돌아갈 때쯤에는 아주 진해 져 있었다.
고운을 만났을 때와는 결이 다른
반가움이 밀려왔다.
건강했구나, 이 녀석.
한 발짝 물러서자 유리가 활짝 웃 으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 뒤로 나를 이곳으로 안내해 주 있던 여인이 웃으며 들어왔다.
“벌써 11년 만이지요. 그간 잘 지 내셨나요?” 활짝 웃으며 내게 느을 뻗던 유리 가 멈칫했다. 그의 손이 크고 두툼한 손에 가로 막혀 있었다.
“송구하오나, 함부로 손을 대시면 아니 됩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운의 목소리만 들렸을 때에는 몰 랐는데, 유리의 목소리를 듣다가 들 으니 내 생각보다 훨씬 낮았구나.
“아, 아. 그렇지. 미안하네. 너무 반가워서 그만. 죄송합니다, 전하.” 유리는 민망하다는 듯 손을 뗐다. 나는 괜찮다는 말 없이 웃이 주있 다.
반가워서 손을 잡고 싶은 건 이해 하지만, 고운의 말이 맞았다.
“내가 말을 놓는데 네가 내게 존대 해서야 되겠니. 가뜩이나 네가 나보 다 신분도 높은 판국에.”
나는 부드럽게 말을 돌리며 응접실 로 이동했다.
모두 자리에 앉자 유리를 따라온 여인이 자를 우리기 시작했다.
내 말에 유리가 머쓱하게 웃었다.
“그때 잠시였는데 그게 습관이 되 있나 봐요. 이게 편합니다. 이곳엔 이 넷밖에 없으니 괜찮을 거예요.”
그러려나. 사실 나도 이게 더 편하 기도 하고.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들자 유리가 해실 웃었다.
완전히 성인의 모습인 유리의 일굴 에 눈물 콧물 다 짜던 어린아이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잘 컸네.  그때 그 꼬맹이가 어떻게 커서 왕 까지 했담.
내가 기운 것도 아니지만 기특하
다.
“그런가요?” 칭찬이 기쁜지 유리의 웃음이 더 활짝 펴졌다.
“모두 전하의 덕이지요.” “아나. 내가 했다고.” “아닙니다. 그때 도와주시지 않으 셨다면 실바누스는 진작에 망했을 거예요.
그 말이 답지 않게 단호했다. 마침 찻잔이 내밀어진 탓에 나는 말할 타 이밍을 놓졌다.
“도와주셨던 것을 잊지 않고 있습 니다.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서, 그 리고 은혜를 갚을 수 있어서 정말 기뻐요. 성심성의껏 돕겠습니다.”
의젓한 유리의 말이 이어졌다. 그 말에 가슴이 찡했다.
아이고, 착해라.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고 싶네. “그래서, 서라국의 문제가 많이 심 각한가요?”
내가 감동에 젖어 있는 사이 유리 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렇게 물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 다.
“전체적으로 이능의 힘이 모두 약 해졌어. 황궁의 결계도 황후 폐하가 계심에도 흔들렸고, 이능을 아예 잃 은 가문도 벌써 세 가문이야.” 이능의 약화, 불안정, 소멸.
그건 우발적으로, 또는 동시다발적 으로 일어났다.
서라국 내에 그 정도의 일을 가능 하게 하는 것은 엄마조차도 불가능 했다.
“용께서 노하셨나 싶어 제사도 지 내 봤지만 결과는 똑같았고.” 그러게 그 제사 지내지 말자니까. 아까운 국고만 잔뜩 당진했어.
나는 다시 떠오른 기억에 이를 갈 았다.
“11년 전 너희도 비슷한 일이 있 있지. 그때 여의주로 해결할 수 있 지 않았니?” “그랬습니다만•••
으음. 유리가 난처하다느1- 침음 을 홀렸다.
“서 대륙은 동 대륙과 달리 모두가 마법사는 아닙니다. 마력의 양이 훨 씬 적지요.”
이것만으로도 승낙의 의미는 아닌 것 같았지만, 나는 경청했다.
“여의주의 수가 몇 개인지는 모르 지만, 동 대륙의 마력 양을 모두 복 구하려면 꽤나 많은 양이 필요할 거 예요.” 여기까지 말한 유리가 잠시 주저했 다.
“그리고, 여의주 안에 담긴 힘의 총량이 크다 보니 그 과정에서 몇 명의 마법사가 희생되있습니다. 동 대륙에서 똑같은 일을 하려면 그의 몇 배가 될 텐데, 그것은•••
끝까지 들었지만 결과는 같을 것 같았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를 위해 실바누스의 마법사를 지원해 드리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 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나, 괜찮아.” 유리의 깔끔한 결론과 사과에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서 대륙에서 마법사는 소중한 자원 이고, 그 이전에 한 생명이다.
유리는 왕으로서 국민을 지길 의무 가 있었다.
'서라국의 태자 입장에서 착잡하기 는 하지만.'
응접실 안에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 았다.
다른 방법은 없나는 의미로 유리를 바라보자, 고민하던 유리가 입을 열 었다.
“용의 등지를 찾아가 보는 건 어떨 까요?”

17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