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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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휘청 기울어져 파란 하늘이 보였다. 시아 반을 가리는 어두운 남자의 얼굴도.
가라앉은 청회색 눈동자와 눈이 마 주진1 나는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
다.
내가 다시 넘어지려는 줄 알았는지 남자가 다시 나를 붙들었다. “조심하십시오. 넘어지신다면 큰일
퍽 다급하게 붙든 것치고는 손아귀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 말랑말랑했 다.
나는 남자에게서 떨어지며 슬쩍 눈 빛으로 그를 훑었다.
도와준 건 고마웠지만, 남자는 몹 시 의심스러웠다.
고급 비단이지만 자수 하나 없는 흑색 옷.
그리고 얼굴을 가린 검은색 멱리.
누가 보아도 저는 비밀을 숨기고 있습니다. 정체를 드러내서는 안 됩니다, 라 는 모양새.
그런 모습을 하고 그냥 지I-PA갔어도 의심스러웠을 판국에, 굳이 내 뒤에 서 내가 넘어지려는 타이밍을 잡아 서 날 붙들었다고.
소매에 작은 표식이 없는 걸 보아 날 몰래 따라온 그림자도 아니었다.
'살수인가?'
자연스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옷을 평민의 복색으로 바꾸었지만 종종 상인들이 나를 귀한 집 아씨라 고 칭할 때가 있었다.
황실에서 예법을 배우며 자라다 보 니 몸에 익은 것이 있나 본데, 그러 다 보니 종종 타깃이 되는 경우가 있었다.
“이리 도와주시다니, 참으로 감사 합니다. 그대로 넘어졌다간 얼굴에 흉이 졌을 거예요.” 어머니. 오늘 한 놈 더 갑니다.
나는 빙긋 웃으며 생각했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은 인이신 분을 그냥 보낼 수가 있나 요. 부디 제가 은혜를 갚을 수 있게 해 주세요.”
살갑게 말을 걸자 남자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뜻대로 하십시오.” 목소리가 오묘했다. 동굴 같은 저음인데, 탁하다는 생 각이 들지 않았다.
저 좋은 목소리로 왜 이런 일을 하는지.
나는 속으로 혀를 자며 남자를 안 내했다.
“제가 머물고 있는 기루가 있습니 다. 나리의 마음에 차지 않으실 수 도 있지만, 제법 아름다우니 너그러 이 넘어가 주셔요.”
나는 저잣거리를 지나 민가 쪽으로 걸어가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뒤따르는 발걸음 소리가 조 금 주춤했다.
“저는 기녀는 아니에요. 그저 기루 에서 일하는 시비랍니다.”
그런 반응을 예상하고 있었던 나는 태연히 덧붙였다.
종종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위와 똑같이 말했다.
반응은 두 가지로 갈렸는데, 첫 번 째는 급한 일이 생겼다며 자리를 뜨 는 것이었다.
이 경우엔 조금 처벌을 감해 주있 다.
적어도 이유 없이 상대를 죽이지는 않았다는 의미이니까.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나는 생각을 끊어 내며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남자는 멈추지 않았고, 조용히 내 뒤를 따랐다.
이내 완전히 인기척이 없는 곳에 다다랐을 때,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돌았다.
여전히 온통 새카만 남자가 서 있 었다.
어떻게 나오나 보자는 생각으로 나 는 가만히 그를 지켜보았고, 남자가 천천히 제 머리로 손을 가져갔다. 남자가 먹리를 벗었고, 베일 아래 에 가려져 있던 얼굴이 드러났다.
짙은 잿빛 머리카락, 그리고 새벽 하늘 같은 청회색 눈동자.
아까 얼핏 마주친 눈동자로 어렴풋 이 알았지만, 남자는 그리운 색채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그 외모와 성정은 고운과 몹 시 달랐지만. 그 또한 한 번쯤 돌아볼 만한 미 인이기는 했다.
하지만 선이 얇은 고운과 달리 남 자는 뚜렷하고 남성적인 외모와 제 법 큰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표정이 없다.
'살수의 대표적인 특징이지.'
고운은 표정 변화가 크지는 않아도 다양했다.
울상 짓고, 볼을 붉히고 부끄러워했다.
아, 고운 보고 싶다. 나는 문득 치민 그리움을 내리누르 며 이 상황에 집중했다.
언령이 아무리 강력하다 하더라도 단번에 내 목이 썰리면 말짱 도루묵 이니.
하지만 남자는 멱리를 벗어 놓고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 예의 서늘한 무표정으로 주위를 두어 번 둘러보더니 내게 물 었다.
“이곳이 기루입니까?”
그 고저 없는 목소리가 너무 덤덤 해서 나는 그가 비꼬고 있는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뒤로도 대답이 없었고, 남자가 꼭 대답을 원하는 듯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야 당연히••
“아니지요?” 왜 묻는 거지?
아니, 그리고 왜 아무것도 안 하 지?
“어찌 따라오셨어요?”
•••가시는 길을 따라 걸었습니
다.”
“그러니까, 이유 말입니다.” “은혜를 갚는다 하시었으니.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눈동자가 맑 았다.
“살수가 아니었어••
•••아닙니다.”
홀로 중얼거린 마지막 말에도 남자 가 대답했다.
여전히 표정 변화는 없었지만 그 눈빛이 아까보다 더 가라앉아 있어 서,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 대체 오늘 처음 만난 이를 아무 의심 없이 따라가는 양반이 어 디 있답니까?”
내 말에 남자가 대답하지 못했다. 여기 있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 이고, 내가 따라오라 해 놓고 제법 뻔뻔한 질문인 것도 인정하겠다.
그렇지만 참 이이가 없긴 하다.
겉으로는 별 위험한 척 다 해 놓 고 왜 저리 맹해.
'누가 보면 십 년쯤 산에서 살다 내려온 줄 알겠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작게 혀를 내찼다.
괜히 애먼 사람을 잡은 것 같은데.
이대로 보내기 조금 미안하다. “잠시 기다려 주실 수 있을까요?”
남자를 대충 토담에라도 앉혀 둔 뒤, 나는 다시 저잣거리로 나가 당 호로 두 개를 사 왔다.
변변찮은 대접이기는 하지만 하는 수 없었다.
데리고 음식점에 가자니 사람이 너 무 많았고, 그렇다고 내가 태자이니 궁에 가서 이 무례를 씻겠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다행히도 남자는 별다른 말 없이 당호로를 받아 들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간식이었지만, 나는 먹지도 못하고 그의 반응을 살 폈다.
이게, 보기엔 이래도 제법 맛있는
아작, 하고 설탕이 부서지는 소리 가 났다.
남자는 용케 흘리지도 않고 예쁘게 당호로를 입 안에 넣었다.
몇 번 씹고, 금세 삼킨다. “괜찮으신가요?”
아, 다행이네. 단 것 안 좋아할까 봐 걱정했는데.
“죄송해요. 종종 불미스러운 일이 있다 보니 그만 착각하고 말0갔네 요.”
사과를 이런 걸로 때우는 것도 마 잔가지로 죄송합니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말하자 한 쪽 볼이 볼록 튀어나온 남자가 고개 를 내저었다.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한 제 탓도 있으니 심려치 마십시오.”
오.
제법 착한 사람.
안심하고 나도 한 입 베어 무는데, 그와 눈이 마주쳤다.
저 눈동자 정말 고운이랑 비슷하
네.
하도 오래전 일이라 내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지 만, 꼭 같은 사람 같았다.
얼마 전에 받은 서신에는 특별한 내용이 적혀 있지 않았다.
그러니 아직 올라올 수 없을 텐데. “혹시 마호 가문의 분이신가요?” 나는 그의 눈동자를 유심히 바라보 다 물었고, 당호로를 열심히 씹던 남자가 멈칫했다.
이내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고운의 눈 색이 유전이라는 걸 알 아낸 것보다, 눈앞의 남자가 고운과 동향 사람이라는 게 더 반가웠다.
“허면 지금껏 마호 가의 장원에 계 시다가 수도로 올라오신 건가요?” 쏟아진 내 질문에 남자가 입 안에 든 과일을 꿀꺽 삼키고는 말했다.
“이제 막이요?”
“그렇다면 혹시 친지 중에 고운이 라는 아이를 아나요?”
단답이어도 대답은 빨랐던 남자가 그 말에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의아해하던 나는 곧 내 실수를 깨 달았다.
“아, 이제 아이는 아니겠군요.” 고운도 벌써 스물이 넘었을 테니
까.
“예. 압니다.”
덧붙인 내 말에 그가 대답했다. 나 는 곧바로 되물었다.
“그 아이 잘 지내던가요? 아, 미안 해요.”
어릴 때 봐서 그런지 아직도 아이 라는 호칭이 입에 붙어 있었다. “그와 친분이 있으십니까?”
입을 다물자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남자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 친우예요. •••못 본 지는 한참 되었지만.”
좀 많이 오래되기는 했지. 그래도 여전히 애틋한 아이였다.
“혹시 그의 수련이 언제쯤 끝나는 지 아시나요?”
나는 내친김에 궁금했던 것을 마저 물었다.
고운 이야기만 하는 게 조금 양심 이 찔리기는 했지만,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오겠나.
“빠른 시일 내에 좋은 소식을 들을 수 있으실 겁니다.”
그 말에 나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
다.
좀 뻔뻔하게 물어보길 잘했다.
“고마워요!” 금방 볼 수 있겠다.
얼마나 컸을까?
날 아직 기억하고 있겠지?
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막지 못 한 채 남은 당호로를 해치우는데, 얼굴 한쪽이 따끔따끔한 느낌이 들 었다.
왜 자꾸 본대.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자 그는 시 선을 피하지도 않았다.
참 독특한 사람이야.
대답은 그렇게 짧게 하고, 말투도 무뚝뚝한데 이 대화를 싫어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으니.
“아, 그러고 보니 여태 통성명도 하지 않았군요.”
나는 쾌활히 말을 붙였다. 황궁에 돌아가더라도 한 번쯤 더 만나 보 고 싶은 사람이었다.
“저는 이화 가의 상회입니다. 귀인 의 성함을 여쭈어도 괜찮을까요?”
바깥나들이를 위해 적당히 만들어 둔 이름을 댔다.
남자는 여전히 예의 그 의미를 알  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읊조렸다.
“반야. 반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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