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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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라국은 이양법을 이용해 농사를 짓는다.
밭에서 쌀을 기우는 것보다 수확량 이 훨씬 늘지만, 그해의 강수량에 따 라 농사의 흥망이 결정되었다.
비가 오랫동안 오지 않으면 논이
쩍쩍 말라 벼가 죄 죽어 비리기 때 문이었다.
그로 인해 서라국은 수도가 발전했 으나, 저수지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 아 물이 썩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제사를 지낸다는 = 해결하기 어려 운 일들이 종종 발생했다.
저 둘이 비를 가지고 옥신각신하는 걸 보면 물의 문제라는 건데•••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누 군가 그랬지.
쌀이 없으면 감자나 고구마를 먹으
면 될 것 아닌가?
물론 쌀보다는 효용성이 떨어지고 맛도 없겠지만 굶어 죽지 않으려면 그것도 감지덕지였다.
구황작물은 논에서 키우지 않아 벼 보다 물을 덜 필요로 했고, 추운 지 방에서도 잘 자랐다.
1년 내내 여름인 중앙에서는 쌀만 기우고, 나머지 지역에서 구황작물을 재배하면 식량은 훨씬 많아질 것이 다.
백안의 말대로 당장 굶어 죽겠다는
사람 앞에 구황작물을 가져다 대면 쌀을 가져오라 패악을 부리는 것도 아닐 텐데, 왜 그렇게 식량을 쌀에만 국한할까?
그런 의문에서 나온 물음이었으
1-正- 己 도르록 굴렸다.
후궁들이 아무런 반응도 없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꽤 당황스러웠다.
구황작물을 키우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해 줄 줄 알았는데.
혹시 구황작물이라는 말은 이 세계 에 없나?
“감자나, 고구마 같은 것 말입니다. 차갑고 척박한 북쪽 땅에서도 충분 히 잘 자랄 테고, 하나만 먹어도 배 부르니 말이에요.” 첨언한 말에도 여전히 회장은 조용 했다.
나는 내게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참으려 손을 꼼지락했다.
색색의 눈동자들이 휘둥그래져서 나만 바라보고 있는 광경은 솔직히 좀 무서웠다.
저기, 반응 좀.
“대체 그 신묘한 작물이 무엇입니
후궁 하나가 얼빠진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나는 그 말에 얼굴을 찌푸렸다.
그걸 모른다고?
혹시 너무 곱게 자라서 구황작물은 구경도 못 해 본 걸까?
아니면 이 세계에서는 이름이 다른 가?
“그, 뿌리는 식사 대용이 되고, 줄 기는 나물로 무질 수 있는 식물이 요.”
내 설명에도 그들의 얼굴에 드리워 진 의아함은 사라지지 않0갔다.
그에 나는 정말로 당황했다.
뭐야. 진짜 몰라?
그리고 그 순간, 작은 웃음소리가 정적을 깨트렸다.
수원과 싸우던 여면이라는 후궁이 었다.
시선이 마주친 그녀의 분홍빛 눈동 자가 겨울바람처럼 서늘했다.
“공주께서 창의력이 뛰어나시군요. 서라국의 미래가 밝습니다.”  뜬금없는 창의력 칭찬에 나는 입을 자그맣게 벌렸다.
상냥한 말이었으나 뼈가 있었다.
“이른 시간이니 침상에 계셔도 되 거늘, 아직 잠이 덜 깨셨음에도 이리 나오시다니 기특합니다.”
o十6
웃고 있음에도 날카로운 인상의 여 인을 향해 나는 배시시 웃었다.
어휴, 그래. 월 모르면 조용히 하고 잠이나 자라고?
'그럴 수 있지.'
나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당과나 씹었다.
하긴, 구황작물의 수를 늘린다는 간 단한 방법을 생각해내지 못했을 리 가 없지.
구황작물이라는 이름에 놀란 건 이 세계에서는 부르는 이름이 다르거나, 아니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바보 같아 보일 수 있는 질문이라 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나는 괜히 입술을 조금 삐 죽거렸다.
“화비,”
그리고 그때, 상냥한 미리내의 목소 리가 들려왔다.
“올해로 연치가 어찌 되십니까?”
“이립이 되기까지 여덟 해가 남았
지요.”
“그러신가요. 공주 마마께오서는 올 해로 여덟입니다.” 스물둘이라는 말을 어렵게 하는 그 녀에게 미리내는 쉬운 단어로 대답 했다.
그는 아이처럼 손가락으로 수를 세 더니 빙긋 웃으며 말했다. “화비가 열네 해나 더 살았군요.”
그- 久고久고 1- -1- 1- 가는 6 말에 분위기가 싸해 졌다.
웃고 있는 사람이 미리내밖에 없었
다.
나는 강 건너 불구경을 하는 심정 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상냥히 가르쳐 주셔요. 공주께서는 아직 어리시지 않습니까.” 그거지.
속이 뻥 뚫렸다.
그래. 어른은 하루아침에 쑥 커서 어른이 되는 게 아니지.
차근차근 가르쳐 주면 될 걸 어린 이1 상대로 살벌하기도 해라.
올챙이 적 모르는 개구리 같으니.
어린아이 보듯 하는 말에 화비의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미리내는 그 눈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웃으며 그녀를 응시했다.
나는 미리내의 행동에 소심하게 동 감했다.
할 일 많아 바쁘고 피곤한 건 알겠 지만, 자라나는 새싹은 좀 보호합시 다. 나름 호적상 어머니이신데.
분위기가 싸늘해진 탓인지 더 이상 말소리가 오가지 않았다.
고요해지자 무섭게 졸음이 몰려왔
다.
일찍 일어난 데다 벌써 해가 중천 이다. 슬슬 졸릴 때였다.
나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는 눈에 서린 졸음을 굳이 몰아내지 않았다.
이러고 있으면 사람들이_높은 확 률로 예화- 당장에 호들갑을 떨며 가서 자라고 구령을 내려 주었다. “산야. 많이 졸린 거니?” 그리고 역시나 내 옆에 있던 미리 내가 걱정스레 이마를 쓸었다.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수고했구나. 어서 가서 쉬렴' 하고 속삭인 그가 조용히 내 뒤에 서 있 던 서연에게 손짓했다.
안아 달라는 의미로 그녀에게 소1-으 뻗으려던 찰나, 예화의 목소리가 들 려왔다.
“화비.”
여전히 다정했으나 애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차가운 목소리.
역시나 익숙치 않은 어조였다.
고개를 돌린 나는 그녀의 시선이
여면에게 향했다는 것을 금세 눈치 챘다.
미리내와 가람의 시선 또한 그 뒤 를 따른다는 것도.
졸음이 싹 달아났다.
맞아. 그랬지.
지금껏 잊고 있었지만, 저 인간 원 작에서는 몹시도 냉혈한 인간이었어.
그녀는 자애로운 군주였지만 선이 명확했다.
지금 황제는 내 어머니이고, 화비는 나를•••••• 모욕이라고 해야 하나. 하 여튼 괴롭힌 상대였다.
저, 저거 그대로 두면 안 될 거 같 은데.
“어이구, 우리 공주 마마 졸리십니 개” 내가 서연에게 안기지 않자 여류가 넉살 좋게 말을 붙이며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나는 그 품 안에서 파닥거렸으나 여류는 나를 내려 주지 않았다.
“송구하오나 폐하. 공주께오서 오수 에 드실 시간입니다.”
“물러가도 좋다.” 아니, 잠깐만.
저거 저대로 뒀다간 큰일 난다고. “여류. 잠시만. 나-
“예, 예. 마마. 서둘러 가겠습니다.” 아냐. 그거 아니라고!
천천히 닫히는 문 사이로 여면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여전히 느긋하게 웃고 있었 다.
나는 어정쩡히 손을 휘적대다 이미
느 八여 口으흐己 깨닫고는 조용히 주먹을 꼭 쥐어 속으로 외쳐 주었다.
•••파이팅.
궁에 돌아온 나는 늘 그렇듯이 그 대로 침상 위에 엎어졌다.
“마마! 환복도 않으시고 그대로 누 우시면 어쩌시려고요!” 궁녀들이 세상이 무너진 듯 소리를 질렀지만 나는 못 들은 적 귀를 이
불로 덮었다.
'진짜로 없을 줄은 몰랐는데.'
놀랍게도, 정말로 서라국에는 감자 나 고구마 같은 구황작물이 없었다.
오는 길에 만나는 이들에게 족족 물어보고, 서고에 들어가 책을 뒤져 봤지만 그런 식물은 뿌리 하나 보지 못했다.
1-
왜일까 곰곰이 고민하던 나= 아주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닫고 말았다.
감자와 고구마 등의 구황작물은, 지 구에서도 아메리카에서 아시아와 유 럽으로 들여 왔던 식물이라는 것을.
이 세계에서 서라국, 즉 동 대륙은 동양, 서 대륙은 서양에 가까웠다.
그러니 아직 서 대륙에서 들여오지 않은, 동 대륙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식물인 것이다.
중요한 강연에서 존재하지도 않는 식물을 대안이랍시고 꺼내 놓다니.
어린애의 공상으로 보일 법도 했
'으아아아•••
내가 나 때문에 수치스러워서 살 수가 없어!
나는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머릿 속에서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호통을 졌다.
발버둥 치지 않으려 주먹을 꼭 쥐 고 있는데, 몸이 이불째로 번쩍 들렸 다.
누가 나를 들었는지는 굳이 확인하 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어째 이제는 상전으로도 대해 주 지 않는 것 같구나.”
“아이고, 전 여전히 우리 마마가 세 상에서 가장 무섭지요.”
“그럼요. 우리 공주마마만큼 무서우 신 분이 이 세상에 어디 있으시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궁녀들의 손은 재빠르게 나를 이불에서 빼내어 머 리를 삭삭 빗어 주었다. “침의로 갈아입기도 귀찮은데.”
“우리 마마께서는 가만히 있으시기 만 하면 저희가 알아서 다아 하지 요!”
희사가 내 일도 다 알아서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무작정 고구마 감자 찾아오라고 떼 쓰면 눈앞에 대령해 줄까?
•••혹하네.'
솔직히 해 줄 것 같다.
하지만 나느1- 그 생각을 머릿속 에서 지웠다.
그렇게 될 거였으면 예화가 먼저 찾아다 북부에 심었겠지.
무작정 서 대륙에 가겠다고 떼를 쓸 수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식물을 찾아오라고 사람을 보낼 수도 없다.
아니, 애초에 이 세계에 구황작물이 존재할 거라 확답할 수도 없었다.
그럼 구황작물은 안 되고, 다른 좋 은 방법이 없을까. '조 0 •• 좋은 방법•••  없다, 그딴 거.
기세기의 지식을 가진 머릿속을 뒤 져 봐도 상황을 타개할 만한 것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아 정규 교육 과정에서 중국의 두 배 정도 되는 땅의 가뭄과 구휼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았으니까! '역시 정공법일까.' 뛰어난 계책도, 상황에 적합한 새로 운 식물도 없다.
그럼 가지고 있는 자산을 어떻게든 돌려막기 하는 수밖에 없었다.
돈 많은 귀족가 털어먹으면 참 좋
을 텐데•••
하지만 그게 몹시도 어렵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서라국은 나라가 큰 만큼 나라를
도는 돈 또한 천문학적인 수치였다.
봉건제는 아니었지만 각 고을의 호 족에게 꽤나 많은 권리를 부여하는 편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초대의 공신 가문들이 대 를 걸쳐 튼튼하게 자본과 권력을 쌓 아 둔 탓에 그들의 장고를 털면 구 홀 문제는 단번에 해결할 수 있었다.
문제라면 황제와 귀족들이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것에 있다.
서라국은 황제와 귀족들의 사이가 좋은 편에 속했다.
그건 황가의 그 특징 탓도 있지만, 황제가 그들을 대하는 대도가 상당 히 온화하다는 이유도 있었다.
이능이 물리적이지 않다 보니 황가 는 상대적으로 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중 황제가 가장 견제해아 하는 것은 단연 공신 가인 일곱 가문이었 고
내 일도 아니니 그래도 뭔가 기분 이 찜찜했다.
역시 초대 용은 좀 이상한 용이었 던 게 분명하다.
모든 이능의 시초인 만큼 가늠할 수 없는 힘이 있었을 텐데, 정작 자 신이 축복한 인간에게 준 능력이 고 작 저거라니.
'모두에게 사랑받는' 것이라는 추상 적인 이능 탓에 황제는 적당히 그들 의 비위를 맞춰야 했다.
혹시라도 귀족들이 황제에게 반기 를 들 생각으로 황제의 뒷조사를 한 다면, 그렇게 황제가 이능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정권 교체가 일 어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다. '역시 황제는 못 하겠어.'
새삼 지금껏 황권 교체가 없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리고, 기윤 여란.
나는 베개에 얼굴을 푹 묻은 채 생 각에 잠겼다.
방금 전, 화선궁으로 돌아오며 있었 던 일이 떠올랐다. 

17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