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화

3 0 0
                                    

1. 당신의 행복을 바랍니다.
고운이 밤의 산야를 처음 마주한 것은, 그가 산아를 만나고 얼마 되 지 않은 어느 날 밤이었다.
산야는 얇은 침의를 입고 복도에 앉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잔뜩 웅크린 몸이 유독 작아 보였 다. 잠이 오지 않아 궁을 돌아다니 던 고운은 동물인 줄 알있卍던 작은 존재가 제 상전이라는 것에 놀랐다.
제 위로 그림자가 지자 산아가 흠 짓 놀라 고개를 들었다.
드러난 보랏빛 눈동자가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놀랐잖아!”
고운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산 야가 비명을 지르듯 히스테릭하게 소리쳤다.
그녀를 오래 보지 않았지만, 대부 분 자분한 모습이던 산아가 소리를 지르는 것을 고운은 처음 보았다.
고운은 놀랐지만, 그에 반응하기보 다는 두 발짝 물러나 부복했다.
감히 상전을 놀라게 한 것에 대한 처벌을 기다렸으나, 산야는 아무것 도 하지 않았다.
머리 위로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 느껴져 고운은 결국 다시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불안한 눈의 산야가 울 듯 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산야는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듯 보였지만, 동시에 힘겨워 보였다.
고운은 몇 시간이고 기다릴 수 있 있으나, 얇은 옷을 입은 산야의 어 깨가 덜덜 떨리는 것이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결국 고운은 이번에야말로 산야가 경을 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겉옷을 벗어 조심스레 산야의 어깨에 걸쳤다. 감색 무복은 투박하 고 무거웠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바람이 아직 잡니다.” 나지막한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뜬 산야가 고운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입을 달싹거리다 꾹 물있
다. 일마 지나지 않아 큰 눈에 그렁 그렁 눈물이 맺혔다.
그 눈물에 고운이 흠칫 놀랐다.
날이 너무 추운가. 아니면 앉아 있 는 복도가 딱딱한가.
옷이 너무 무겁거나, 아니면 이상
한 냄새라도 나는 걸까?
“송구합니다. 마마의 처소에 함부 로 발 들일 수 없어 우선은 이리하 였습니다.” 고운은 그렇게 말하며 산야에게  심스레 八1-으 내밀었다. 후에 혼이 나더라도 다른 옷을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산야는 움찔 몸을 떨더니 고운이 덮어 준 옷의 옷것을 꽉 붙 잡았다.
“아, 아나. 괜찮다.”
목소리는 여전히 불안정히 떨렸지 만, 아까보다는 안정을 되찾아 있었
다.
“이거면 돼. 이거면•••  산야가 중얼거리며 고개를 푹 숙였 다.
고운은 그 모습을 보며 무어라 표 현하지 못할 감정에 휩싸였다.
낮의 산야에게도 어렴풋이 느껴지 던 것이 지금의 산야에게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고운은 기민했지만 아직 어렸고, 그 탓에 어떻게 표현해아 할지도,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알지 못했다.
그저 유독 작아 보이는 몸이 가없 고 서글퍼서, 고운은 그 앞에서 숨 죽였다.
•••화내려는 게 아니었어. 그냥, 놀라서.” 산아가 웅얼거렸다. 고운은 망설임 없이 개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자 산야가 천천히 고개를 들있 다. 여전히 눈물이 고인 눈과 시선 이 마주치고, 아이가 어설프게 웃었
다.
“안녕.” 처음으로 상냥하게 말해 보-1-1- -八 이, 어색한 목소리였다.
“나는 너를 처음 봐•••••• 너 같이 어린아이도 궁에서 일을 하는구나.”
“왜 자지 않고 여기 있니. 선배들 이 텃세를 부렸어?”
고운은 산아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 다. 자신을 처음 본다는 산아의 말 에 당황한 탓이었다.
하지만 산아는 그 침묵을 다르게 해석했는지, 011써 웃던 얼굴에 당황 이 서렸다.
•••혹시, 내가 무섭니?” 또다시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고운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 에 산야가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았 다.
“그래, 내 평판이 좋지 않다는 건 나도 알아. 네 선배들이 네게 말해 줬을 테지만, 내가 그렇게까지 나쁜 상전은 아니었어. 물론 대부분의 나 쁜 사람들은 본인 입으로 그걸 말하 지 않지만•••  말을 이어 가던 산야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더니 제 작은 손을 펼쳐 보였다.
“저, 정말이야. 화내지 않을게. 때 리지도 않아. 자, 봐. 손도 이렇게나 작고, 든 것도 없잖아?” 여전히 고운은 이해할 수 있는 것 이 없었지만, 더는 산아의 필사적인 말을 외면할 수 없었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산아의 얼굴이 확 피었다. 고작 이 정도로 기뻐하는 이린 주인 을 고운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궁에 후원이 있다는 걸 아니?” 산야가 밝게 말했다. 제법 들떴는 지 고운이 대답하기도 전 말을 덧붙 였다.
“아니지. 후원이라 할 수 있을까? 조경된 곳은 아니니까.” 산야가 씩씩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더니 고운에게 손을 내밀었다.
“같이 가 보겠니? 나만 알고 있던 곳이지만 너한테도 알려 줄게." 그렇게 말하는 산아의 얼굴이 달빛 아래에서 처음으로 밝아 보였다. 고 운은 두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고운이 따라와 주지 않을까 걱정했던 산아가 그 모습에 더욱 환 하게 웃었다.
둘은 발걸음 소리를 죽여 궁을 빠 져나왔다. 화서궁 뒤의 작은 숲은 밤중인 탓에 어둡고 으스스해 보였 지만, 산아는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걸어갔다.
산아의 반 발자국 정도 뒤에서 걷 던 고운은 어느 순간 자신을 이끄는 손길을 느꼈다.
투박한 자신의 손 위에 산야의 보 드랍고 작은 손이 겹쳐져 있었다.
혹시라도 놓칠까 꼭 붙든 손에 고 운이 소리 없이 놀랐을 때, 어둡던 시야에 화악 빛이 비겼다.
“여기아.” 잡초가 조금 나 있는 동그란 공터 였다. 새파란 달빛이 한가득 비추기 는 했지만, 그다지 화려하거나 신비 롭지는 않은 곳이었다.
그러나 고즈넉한 고요가 낮게 깔린
곳이다. 한가운데에 선 산아가 그제 아 수줍게 웃었다. “초라하지. 그래도 난 여길 좋아
“미 지 고입 니 다
고운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산야에 게 동조했다.
산야가 공터 한가운데로 걸어가더 니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행히 어깨에 걸쳐져 있던 고운의 옷을 깔고 앉은 덕에 흰 침의에 흙 이 묻지는 않았지만, 땅에서 올라오
는 한기가 따뜻하지는 않을 것이다. 고운이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을 보 이자 산아가 잠시 망설이다가 자신 의 옆을 조심스레 톡톡 졌다.
고운은 그 말간 얼굴에 자마 일어 나시라 말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 는 얌전히 산아의 곁에 앉았다.
둘은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낮과 같은 점은 둘 다 낮을 가리 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점은 지금 의 산야가 낮만큼 친화력 있게 아이 를 다루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나마 조금 더 말이 많은 쪽은 산아였기에, 이번에 도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놀랐지?”
고운은 그 말에 속절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산야의 바뀐 태도와 자신을 기억하 지 못하는 것. 제 평판이 좋지 않다 는 말 등 고운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여전히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고운은 무어라 캐묻는 대신 묵묵히 산야의 곁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래 아 한다는 생각이 예언처럼 들었다.
산야는 고운의 그런 속사정 설명 없는 대답에 멋쩍게 웃었다.
제 또래와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이 거의 없었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감 이 잡히질 않았다.
무작정 데리고 나왔지만, 사실 그 리 능숙한 방법은 아니었다.
하지만 고운도 산아도 미숙했고, 그건 제법 잘 맞물렸다.
“널 만나서 다행이야.”
산아는 또다시 용기를 내어 말했 고, 고운은 성심성의껏 의문스러운 눈빛을 했다.
“네가 환영 같은 것인지, 아니면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지 잘 모르 겠지만•••••• 그래도 너 참 다정하구 나.”
산아의 눈동자가 또다시 쓸쓸해졌 다. 가장 처음 산아를 발견했을 때 의 눈과 비슷했다.
“저는 환영이 아닙니다.”
“맞아. 손이 따뜻하던걸?” 위로를 고르지 못해 조심스레 건넨 말에 산야가 웃으며 답했다.
순순한 긍정에도 고운은 괜스레 착 잡해졌다.
잠시 하늘을 바라보던 산야가 구름 에 달이 가려지자 자리에서 일어났 다.
고운이 따라 일어나자 그녀는 왔던 길을 따라 화서궁으로 돌아갔다.
산야는 언제 복도에서 떨고 있었나
1- 듯이 제 방으로 향했다. 느릿한 걸음은 언뜻 비장하게 보였다.
그러나 고운은 문 앞에 선 산야의 손이 작게 떨리고 있음을 보았다.
산야는 작게 숨을 내쉬고는 문을 열었고, 고운에게 옷을 돌려주며 옅 게 웃은 뒤 제 침상에 누웠다.
하지만 편하지 않은 듯 뒤척이던 산야가 작게 속삭였다.
“잠들 때까지만 곁에 있어 줄 수 있니?” 옷자락을 정돈하고 방을 나서려던 고운은 멈칫했다. 그러고는 곧장 산 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고마워.” 산야가 가물거리는 눈을 하고 고운 을 올려다보았다. 그 눈에는 이미 졸음이 그득했지만, 산야는 잠들기 싫은 사람처럼 굴었다.
“다음에도 비밀 장소에 데려가 주 실 겁니까?” 유치한 단어에 산야의 눈이 동그래 지더니 이내 환하게 휘어졌다.
산야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의 대답은 목소리도 들리지 않 을 만큼 자그마해서 입 모양을 읽어 야 했다.
다시 만나면 꼭 데려가 줄게.
눈을 깜빡이던 산야가 작게 하품을 했다.
고운은 이번에야말로 그 말뜻을 물 으려 했지만, 산야가 졸린 듯해 그 만두있다.
어차피 이튿날 아침에 다시 뵐 분 이니 그때 가서 물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안녕.”
완전히 눈을 감은 산아가 말했다.
“고마웠어.
이번에는 조금 더 뚜렷하게 들렸 다.
그 평범한 인사가 자꾸 고운을 붙 잡았다. 고운은 곤히 잠든 산야를 몇 번이고 되돌아보다 방을 나섰고, 이튿날 산아의 반응을 살폈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굴었다. 밤 사이 보았던 불안정하고 서글픈 모 습은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여전히 속내를 알 수 없는 보랏빛
눈동자.
산야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17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