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햇살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살짝 열어 둔 창 사이로 서늘한 바 람이 불어왔다.
“벌써 2년인가.
이제 막 눈을 뜬 산야는 잠이 덜 깬 사람답게 문득 중얼거렸다.
그래, 벌써 2년.
용이 사라지고, 산아가 모든 것을 마무리 지은 날로부터 벌써 두 해나 지나 있었다.
“그간 바빴었지•• 산야는 느릿하게 웅얼대며 쭉 기지 개를 켰다.
이렇게나 느긋한 아침 덕에 떠오르 는 과거의 기억들이 꿈처럼 느껴졌 다.
신기하게도, 용이 눈을 감고 난 뒤 이능의 소멸 속도는 고정되었다. 많은 것을 재정비해아 했지만, 서 라국은 이능의 부재에 제법 빠르게 적응했다.
인구의 대부분을 자지하는 양민들 은 에초에 매우 약한 이능을 가지고 있었고, 이능이 몇 년에 걸쳐 천천 히 줄이든 탓에 일찍부터 방비를 해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의외로 황가의 입장에서는 얻은 것이 더 많았다. 강한 이능이 주력이었던 귀족들이 휘청했고, 그 사이 황실에서 적극적 으로 나라의 기틀을 다잡은 덕에 왕 권이 더욱 강해진 것이다.
생각을 이어 나가던 산야가 쓴웃음 을 지었다.
'그 덕에 고생을 좀 했지만.
이능이 사라진 귀족들은 최대한 황 실과 가까워지려 했고, 가장 최고의 동맹은 역시나 혼인이었다.
마침 후계자인 산야가 혼인 적령기 였고, 미혼인 탓에 모든 귀족들이 산야의 정비 자리를 원했다.
물론 당연하게도 그 자리에는 이미 주인이 있었기에 모두가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었지만 말이다.
산야와 고운은 여섯 달 전 혼약을 맺었다.
한창 혼인하시라는 상소가 빗발치 고, 궁 내에서 우연히 산야를 마주 지게 되는 귀족 자제들이 하루에 열 이 넘어가던 시기였다.
어차피 고운과 혼인하려 했던 산아 에게는 이 난장판을 수습할 겸 매우 좋은 기회였으나, 안타깝게도 혼약 으로 끝난 것은 황실의 어른들 탓이 었다.
••혼인9'
산야는 혼인하겠다는 제 말에 딱 한 마디를 내뱉었던 어머니를 떠올 렸다.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와도 그런 표정은 안 나올 것 같았다.
'아직 나라가 이리도 혼란한데 어 찌 혼인을 하겠다고!'
'허면 매일같이 날아드는 저 상소 들은요? 귀족들은 생각이 없답니 까?'
'그럼. 없지! 네 나이가 몇이라고
벌써부터 결혼을 시켜?'
'그래, 아가. 아직은 나라가 어지럽 지 않니?'
'황태자의 국혼을 성대히 치를 만 큼 들일 품이 없을 거란다. 대노하는 황제의 곁에서 그녀의 비
(妃)들이 산아를 살살 달랬다.
결국 산야는 혼약을 맺는 것으로 한발 물러났다.
무슨 속셈인지 모르는 바가 아니라 눈을 가늘게 떴지만, 그 핑계가 아 주 틀린 말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딸아이를 조금 더 오래 제 슬하에 두고 싶어 하는 어머니의 염원 또한 이해했다.
그리고, 기실 고운이 이미 황궁에 머물고 있었기에 산야의 입장에서는 손해 보는 것도 없었다.
둘은 침소만 함께 쓰지 않는다 뿐 이지, 거의 부부와 같은 생활을 했 다.
아니, 어쩌면 부부보다도 더했다. 고운이 호위무사라는 명목으로 산아 의 곁에 항상 붙어 있었기 때문이
다.
당장에 산아의 하루부터도 일어난 그녀를 고운이 찾아오는 것으로 시 작되었으니.
“그런데 왜 이렇게 안 와?” 흘러가던 긴긴 생각들마저 동이 났
다. 산야는 결국 침대에서 일어나며 중얼거렸다.
평소 같으면 산아가 잠이 덜 깨 꿈과 현실의 중간쯤에서 헤매고 있 을 때쯤 문을 두드리던 고운이다.
그 탓에 잠을 깨겠다고 이런저런 화젯거리를 떠올리던 산야의 노력이 무색하게 아직도 문 앞은 조용했다. “늦잠을 자나••••••?”
설마, 하며 중얼거리는 산아의 보 랏빛 눈에 장난기가 서렸다.
늦잠을 자는 고운이라니. 늦잠은커 명 잠든 모습도 손에 꼽게 보9갔는 데.
자고 있는 모습을 구경하고, 눈을 뜨면 웬일로 늦잠이냐며 실것 놀려 줘야지.
산아는 조금 구겨졌을 뿐인 제 침 의를 적당히 털고는 문가로 다가갔
다.
궁인들은 산야가 침의 자림으로 궁 을 돌아다닐 때마다 기겁했으니 용히 다녀올 생각이었다.
그러나 산야가 문에 으 대기 전 에 먼저 목소리가 들렸다.
“마마. 고운입니다.” 기대감에 부풀었던 산야의 어깨가 그 목소리에 축 처졌다.
역시 일어났던 모양이네.
산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대답 대신 문을 열었다. 문 앞에 서 있던 고운
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나가실 요량이셨습니까?”
응. 너 놀리러••• 그 말을 삼키며 산아가 고개를 내 저었다.
“너야말로 오늘 왜 이렇게 늦었나 했더니.” 항상 장식 없는 무복만을 입고 있 있던 것과 달리 오늘 그는 꽤 차려 입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길게 끌리는 비단 소맷단에는 섬세 한 자수가 놓여 있고, 늘어트린 매 듭도 정교하기 이를 데 없다.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으나 그렇다 해서 수수하지도 않은 우아한 차림. 귀족가 자제 같은 차림이다. 물론 고운의 신분이 귀족가 자제는 맞지 만, 평소 그는 거추장스럽다며 무복 을 고집했다.
“웬일로 이리-
“에그머니나! 마마, 어찌 아직 침 의 차림이십니까!” 산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운의 뒤에서 우렁찬 호들갑이 들려왔다. 산아는 단번에 인상을 북 쓰며 천 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여류?”
“이놈아, 네놈이라도 알고 있었다 면 말려야 할 것 아니나! 아주 네놈 이나, 마마나 어릴 적과 똑같아서
고운의 뒤에 서 있던 여류가 고운 의 등을 내리치며 소리졌다.
산야는 그 말에 픽 웃었다. 어릴 적의 기억들 중 유독 귀여운 조각 하나가 떠올랐다.
침의 자림으로 몰래 궁을 빠져나가 어머니를 뵙겠다는 산아의 말에 고 운은 수긍했고, 여류는 기함했다.
문제 될 것 없으면 평상시에도 침 의나 입고 다니란 말에 고운이 고개 를 끄덕였었지.' 오래되어 빛 바랬지만 여전히 떠올 리면 웃음이 나는 기억들.
그 시절과 지금의 고운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에 산아는 또 웃음이 났
다.
고운은 그런 산야의 웃음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여류가 짝짝 내리지는 소리가 제법 매서웠으나 그의 표정은 조금의 흔 들림도 없었다.
고운은 여류를 말리는 대신, 아무 말 없이 한 발짝 움직여 산아의 시 아에서 여류를 완전히 자단했다. “잠시 출궁하려 합니다.” 산야가 고운의 그 말에 눈을 동그 랗게 떴다.
“출궁? 어딜 가려고?” 산아의 물음에 고운이 입을 다물었
다. 난처한 듯한 반응이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고, 산야는 조금 민망해졌다.
꼭 모든 것을 말해 줄 필요가 있 는 건 아닌데, 너무 캐물었나.
. 다녀와.
•••오늘 안에 돌아오겠습니다.
그동안은 여류가 호위를 설 것이니 염려 마십시오.”
“저, 저 버르장머리 없는 놈. 다 기워 놨더니 어른 이름이나 냅다 부 고운은 이번에도 여류의 말을 무시 했다. 그러고는 산아를 빤히 바라보 았다.
그 표정에서 아쉬움을 읽은 산아가 빙그레 웃으며 속삭였다.
“여류가 나이 먹더니 말이 많아졌 어.”
작게 속삭인 말에 여류가 충격받았 는지 말이 뚝 멎었고, 산아는 기득 거리며 고운의 뺨을 한 손으로 감쌌 다.
산야는 고운이 연인스러운 인사를 원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류가 보는 앞에서 안거나 입맞춤을 하기 란 꽤나 민망한 것이다.
그 대신으로 뺨을 어루만지자 고운 이 무겁지 않게 산아의 손에 기대며 눈을 감았다. 산아는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용히 말했다.
“잘 다녀와, 고운.”
산아의 말에 고운이 눈을 떴다. 옅 은 미소가 서려 있는 얼굴에 산야는 마주 웃어 주었다.
고운은 산야의 손에서 완전히 떨어 지고는 그녀에게 작게 묵례했고, 망 설임 없이 뒤를 돌아 방을 나섰다.
산 같았던 고운이 사라진 덕에 여 류와 산아는 완전히 마주 보았다.
아까의 기세는 어디로 갔는지 여류 는 선뜻 산아에게 말을 붙이지 못했 다.
산야와 고운이 여류는 까맣게 잊은 것처럼 작별 인사를 할 때, 여류는 고운의 등 뒤에 있었지만 산야가 아 주 안 보이지는 않았다.
그 덕에 그는 고운이 눈을 감느라 보지 못한 산아의 표정을 보았다.
•••사, 살벌했는데?' 그리고 지금도 살벌하시고.
여류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할 말 을 꿀꺽 삼켰다.
산야의 표정이 원체 다양하지 않다 지만, 지금 저 표정은 딱딱하게 굳 은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의 예상대로 산아는 기분 이 좋지 않은 상태였다.
방금 전, 고운이 눈을 감았을 때 산아는 매우 가까이에서 그 얼굴을 보0갔다.
가만히 눈을 감은 그는 잠든 것처 럼 보였고, 그 모습에 산야는 어쩌 면 저 얼굴을 오늘 볼 수도 있었다 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걸 보지 못한 이 유가 고운의 이유도 밝히지 않은 외 출이라는 것도.
•••궤변이네.'
굳어 있던 산아의 얼굴이 스르록 풀렸다.
기실 산야는 항상 고운보다 늦게 일어났다. 고운이 외출하지 않았더 라도 산아는 고운이 잠든 모습을 보 지 못했을 것이다.
산아 또한 그걸 모르는 바가 아니 었다. 그럼에도 부득불 원망할 이유 를 찾은 건 아마도 그녀가 서운하기 때문이리라.
'속 좁게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산야는 스스로를 탓했다. 하지만 한 번 시작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오늘 안에 돌아온다면 본가에 가는 것도 아닐 텐데.
황궁 안에서 못 구하는 물건이 없 는데, 저잣거리에는 무슨 일로?
그것도 저렇게나 차려입고?
평소에는 그 칙칙한 무복이나 내리 입었으면서.
아, 유치하다. 이게 뭐 하는 짓이 람.
산아의 조금 남은 이성이 애써 제 동을 걸었다.
하지만 넘실대는 서운함은 기어이 멀쩡한 여류에게까지 불통을 튀겼 다.
'그리 걱정되면 같이 가지, 여류는 왜 두고 가.' 정말로 호위가 늘 필요해서 널 곁 에 둔 것도 아니었는데.
산야의 서운한 시선이 여류에게 닿 았다.
그 눈빛이 그저 서늘하게만 보이는 여류는 에꿎이 눈치를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