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람이 나를 죽이고자 마음먹으 면 내가 그 발치에 엎드려 에원해 도 바꾸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살고 싶었다.
내 말에 가람의 얼굴이 바뀌었다.
그러니까, 아주 황당한 것을 들은 사람처럼 말이다.
“안 죽에”
툭 내뱉은 그 말은 너무나 평온 했다.
어?
순간 맥이 탁 풀렸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나는 그 자 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런 나를 보고 혀를 찬 가람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저벅, 저벅, 다시 발소리가 울렸 다.
아까의 섬뜩함이 다시 상기되어 반사적으로 눈을 꾹 감고 몸을 움 츠렸으나, 내 몸에 무언가가 닿는 일은 없었다.
털썩. 대신 흙먼지가 날리는 소리가 났
다.
코끝에 스치는 먼지에 한 번 기 침한 나는 다시 눈을 떴고, 내 앞 에 앉아 있는 가람을 마주하고 놀 라고 말았다.
모든 후궁들이 그랬지만, 가람은 조금 더 제 외모에 신경을 쓰는 편이었다.
황제가 용모가 아름다운 남자를 선호하기도 했고, 바람에 머리칼과 옷이 날리도록 뛰어다녀도 잘생기 려면 관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제 옷에 얼룩 하나만 묻어도 무 섭게 짜증을 내는 사람이 지금 맨 바닥에 앉았다고?
내 놀란 일굴에 가람이 곰처럼 눈을 두어 번 껌뻑였다.
그가 허리춤을 뒤지더니 검을 풀 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품속을 뒤져서 단검과 암기들도 모두 꺼냈다.
그것들을 한곳에 모은 뒤 멀찍이 던져 비린 그가 양손을 쫙 펴서 내 앞에 보였다.
“안 죽에”
•• 렇구나. 음.
나는 엉거주춤 그 모습 보다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아직도 심장은 쿵쿵 뛰었지만 확 실히 나를 죽이지는 않을 것 같았 다.
아, 아까는 진짜 놀랐어. 정말 죽 는 줄 알았어.
화형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고 통 중 가장 고통스럽다고 했다.
그 문턱에서 돌아온 기분이다.
나는 다시금 안도의 한숨을 내쉬 었다.
•••많이 무서웠나?”
내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는 사 이 가람이 슬그머니 내게 물었다.
나는 그 불편해 보이는 얼굴을 마주했다.
저번에 보여 줬던 '그나마' 격식 있는 말투는 벌써 내팽개친 걸까. 역시 들어가기 전에 보좌관이나 시종이 막무가내로 쳐들어갈 거면 말이라도 곱게 쓰라고 했던 것 같
다.
아니, 그렇다기엔 오늘 여기도 화 서궁인데. 궁녀들이 그가 온다는 서신을 빼 돌린 건가?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 내 눈앞에 큰 손바닥이 한 번 왔다 갔다.
나는 그제야 아, 하고 고개를 들 었다.
맞아. 가람이 뭐라고 말했었지.
나는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는 말했다.
“송구합니다. 선비 마마.”
“아니, 그걸 묻는 게 아니라-
그는 그렇게 말하다 말고 한숨을 한 번 내뱉었다.
가람은 몇 번 말하려는 2.' 달싹이다가 결국 제 머리나 헝클 어트렸다.
“아, 진짜.” 그 작태가 기가 막혔다.
방금 죽을 줄 알았던 나도 지금 이렇게 멀쩡한데, 년 뭐가 문제니. “사과하러 왔어.”
툭 내뱉은 말에 나는 다시금 의 아한 얼굴을 했다.
사과하러 왔다고?
“네 시비 되찾아 왔고. 다시 오늘 부터 이 궁에 있을 거야.”
가람은 상당히 불편하다는 얼굴 로 그렇게 말했다.
나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눈 썸은 한껏 꿈틀대는 상태였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살며시 웃었
다.
'누가 압박을 넣었구나••• 물론 애매한 미소였다.
그리고 아마 오늘부터 황제 예화 아륜과 여란 가 가주인 기윤 여란 은 이름을 '누고 개명해아 할 것 이다.
전자라면 그나마 낫겠지만, 후자 라면 그 이름 모를 시비가 확실히 첩자라는 것이 밝혀지는 건데••• 첩자면 황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 니 내 침대나 뺏지 말게 해야겠다. “감사합니다.”
전혀 감사하지 않았지만, 우선 나 는 아까의 사과처럼 공손하게 예 를 자렸다.
그런데 또 뭐가 문제인지 고개를 들어 바라본 가람의 얼굴에 주름
이 가득했다.
매번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주름 이 남지 않게 하려고 그렇게 애쓰 더니 다 이 순간을 위해서였을까.
굳이 왜?
“화 안 내?" “낼 이유가 있나요?” 어떻게 감히 화를 내겠니.
난 방금 네 무서운 얼굴에도 살 수인 줄 알고 덜덜 떨었는데 말이
야.
내 매끄러운 대답에 가람이 또 머리를 벅벅 헝클어트렸다.
그럼에도 머리가 까치집이 되지 않는 것은 그의 궁녀와 그 궁녀들 을 닦달한 가람의 덕이겠지.
“내가 조윤이 네 시비를 빼앗아 가는 걸 그냥 두었잖아.”
으음. 나는 난처한 웃음을 지있 다.
그렇게 돌직구로 말하면 내가 '예. 그러셨죠.' 하고 대답하고 싶 어서 곤란해.
“아니에요. 설비 마마께는 제가 드 렸습니다.” 나는 슬슬 이 공방이 지겹기 시 작했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어서 불편하 기도 했고, 내 앞의 누군가도 일이 날 생각이 없는 것 같아 더욱 그 랬다.
아. 세 번째다.
그가 세 번째로 머리를 헝클어트 렸고, 이번에는 꽤나 진심이었는지 머리가 까치집이 되어 가기 시작 했다.
“마마!”
그 순간, 들려온 우렁찬 목소리가 가람의 말을 뚝 끊었다.
그 목소리에 가람이 아자 하는 얼굴을 했고, 나는 의아한 얼굴을 재빨리 숨겼다.
하다가 도망쳐 나온 건가. 그 래서 이렇게 사람들이 소란스러운 거고?
“어디 계십니까, 마마!” 어던가 익숙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이능을 쓴 건가. 그러기엔 너무 생 목처럼 들리기는 하는데.
“초비 마마!” 그때까지만 해도 평온하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불린 이름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잠깐만. 없어진 나를 찾는다는 건,
“초비-
“나 여기 있어!” 나는 곧바로 일어나 쩌렁쩌렁 외졌 다.
내 목소리가 퍼지자마자 시끄럽던 사람들의 목소리가 뚝 멈췄다.
나는 그제야 소리치느라 한껏 들이 마셨던 숨을 내뱉었다.
내가 없어졌다는 이야기가 밖으로 퍼지면 내가 도망갔다는 말밖에 더 되나.
난 방 안에만 갇혀 있고 싶지 않
다급한 발소리가 나더니 이내 궁녀 가 내 앞에 나타났다.
문을 열면 가장 먼저 보였던 궁녀 였다.
아, 이름 꼭 물어봐야지. 매번 지 칭할 때마다 주문 외우는 것 같다. “마마•••
그녀의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눈썹은 내려가 있고 얼굴은 구겨진 그 모습을 나는 조금 주눅 든 채 바라보았다.
안도한 건가, 분노한 건가?
후자라면 곤란했다.
원작의 산아였다면 그것도 냉큼 황 제에게 일러바쳐 동정심을 얻겠지 만, 나는 그릴 수도 없으니까.
나는 얌전히 그녀의 다음 행동을 기다렸고, 그녀는 성큼성큼 다가와 내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마, 의관이••• 아차.
나는 찔끔해 입술을 깨물었다.
흰색 옷에 흙이 많이 묻은 모양이
다. 이 추운 날에 손세탁을 해야 하 니 힘들겠지.
•••미안하네.”
나는 꽤나 진심을 담아 그렇게 말 했다.
그러자 궁녀의 얼굴이 뭐라 형용기 어렵게 바뀌었다.
입을 두어 번 달싹거린 그녀는 아 까 나처럼 입술을 깨물고는, 조심스 느을 뻗어 나를 끌어안았다. “이제 괜찮아요.”
. 09
내 당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 는 내 등을 두어 번 토닥였다.
당장이라도 깨질 것 같은 유리를 만지듯 조심스러웠다.
아니, 일단 이 사람은 지금 옆에 다른 후궁이 멀뚱히 앉아서 자기를 보고 있다는 자각은 있는 건가.
“저, 이것 좀•••
“아, 송구합니다.” 내가 팔을 조심스레 툭툭 치자 그 녀가 금세 나를 놔주었다.
나는 필사적으로 옆을 눈짓했다. 자신보다 높은 신분의 이를 인사도 없이 씹어 비린 대가는 작지 않을 것이다.
•••나도 그러긴 했지만, 놀랐으니 그냥 넘어가는 걸로 하고.
다행히도 그녀는 황궁의 궁녀였고, 그만큼 눈치가 빨랐다.
금세 옆의 가람을 발견한 그녀가 예를 자려 인사했다.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선비 마마.”
“됐어.”
가람은 그 특유의 재수 없는-본인 은 멋있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한어조로 대답했다.
하지만 내 정신은 그 앞의 궁녀의 말에 쏠려 있었다.
도움이라고?
이 궁에서 무려 가람을 데려다가 도울 만한 일이 뭐가 있단 말인가.
아무리 화서궁의 궁녀들이 황제의 입김이 많이 닿은 이들이라고 해도 고작 궁녀가 후궁을 멋대로 부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분명히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무언가 불길한 느낌에 조심스레 물 었다.
•••혹시 절 찾으신 건가요?”
“으(2”
갑작스레 질문을 받은 가람이 놀란
얼굴을 했다.
날카로운 쾌남형의 얼굴이 금세 동 글동글해졌다.
눈을 두어 번 깜빡인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왜,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심 려를 끼쳐 드렸네요.”
왜요, 라고 물을 뻔한 나는 황급히 실수를 수습했다.
다행히도 앞말을 제대로 듣지 못한 탓인지 가람은 별말 없이 넘어7갔다.
사과하러 온 김에 할 일이 없었나 보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 어났다.
일어나서 치마에 묻은 먼지를 털려 는데, 눈앞에 손이 불쑥 내밀어졌다.
나는 고개를 들었고, 여전히 그 이 상한 얼굴의 가람을 마주했다.
눈썹은 치켜 올라가 있고 눈은 긴 장한,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는 일굴 이었다.
왜 이 사람들은 자꾸 얼굴로 나한 테 문제를 낼까? 가람이 제가 내밀고도 당황한 듯 순을 꿈지럭댔다.
월 달라는 건가?
잠시 고민하던 나는 옆에 떨어져 있던 그의 물건들을 떠올렸다.
내가 풀게 했으니 줍는 것도 내가 하라고?
으, 성가신 놈.
나는 그가 풀어 한데로 모아 둔 무기들 앞으로 갔다.
한 번에 들려고 했지만 크기는 작 은 주제에 무겁긴 더럽게 무거웠다.
결국 장검은 내버려 두고 암기와 단검만 겨우겨우 챙겨 그의 손에 올 려 두자 가람이 또 영문을 모르겠다 는 얼굴을 했다.
나는 정말로 얼굴을 구기고 싶었
다.
그렇게 한 삼 초쯤 지났을까.
가람이 잠에서 깨어난 인형처럼 파 드득 떨었다.
“이게 아나!”
뭐 어쩌라고.
“아니, 후••• •• 됐어. 이거 안 주위 줘도 돼.”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아까 내가 단검을 주웠던 자리로 성큼성큼 걸 어가 장검을 주워 허리에 찼다.
그러곤 머리를 두어 번 긁적인 가 람은 뒤를 돌아 나를 보았다.
•••고마워. 주워 줘서.” 그 얼굴에 나는 입가를 한 번 움 찔하고는 미소지있다.
하지만 팔에는 순간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홍조 집어넣어. 토 나올 것 같으 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