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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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때로는 의지만으로 가능하 지 않은 일들이 있다.
가령 대체 어느 정도의 역사가 기 록되어 있는지 추정 불가한 서라국 의 실록을 하루 만에 훑는 일이 그 렇다.
'절반도 못 봤어.
내가 책 읽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 기는 하지만, 이건 선을 넘었다. 처음 한두 권이나 재미있었지, 점 점 시간이 지날수록 짜증이 났다.
1- -「正 채로 시선만 굴려 책장 을 바라보았다.
아직 못 본 실록이 수두룩했다.
절반이 뭐야. 3분의 1도 못 본 것 같아. 이렇게 단순노동을 한다고 해서 될 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뿐더러, 내 가 내용을 건너뛰지 않을 거라는 보 장도 없다.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보는 게 나 을 것 같은데.'
시간이 꽤 지나서 이제 나가야 한 다. 나는 일어나 옷을 툭툭 털며 생 각했다.
엄마는 몰랐지만, 미리내나 초은 같은 사람들은 알지도 모르니까.
장서관 밖으로 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던 궁인들과 만났다.
동궁으로 돌아오는 길, 잠시 멈취 산화정 구경을 하고 있던 내 눈에 멀리서 백금빛 머리카락이 보였다.
마침 찾아갈까 했더니, 기가 막히 게 보이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정 말 엄청난 우연이다.
나는 당장에 미리내를 부르려고 했 지만, 얼핏 드러난 그의 얼굴을 보 고 멈칫했다.
•••왜 저렇게 침을해?'
정말이지 반가운 우연이었지만, 그 이야기를 꺼내 놓기엔 미리내가 조 금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쭈뼛쭈뼛 그에게 다가갔다. 미리내는 산화정의 정자에 앉아 있 었다.
장소만 백목정에서 산화정으로 변 했을 뿐, 저번에 선유를 만났을 때 와 꽤 흡사한 분위기였다.
궁녀들도 모두 물리고 조심조심 다 가간 터라 미리내는 내가 그의 뒤에 섰을 때아 의아한 얼굴로 뒤를 돌았
다.
“산화정엔 웬일이니?”
그가 곧장 일이나 내게 자리를 내 주며 물었다.
“지나가던 자에 마마께서 보이시기 에 와 보았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탁자에 이미 놓여 있는 다기를 바라보았다.
내가 올 걸 기가 막히게 알아서 미리 준비해 둔 건 아닌 것 같았다. 다완에 미묘하게 물기가 남아 있는 걸 보면 선객이 있었던 모양인데.
“혹 황후 폐하께서 다녀가셨는지 요?” 반쯤 찔러 본 말에 미리내가 흠칫 했다.
•••황후 폐하를 뵈었니?”
선유 맞았네. 나는 그렇게 생각하 며 고개를 내저었다.
“어림짐작했을 뿐인걸요.”
미리내가 그나마 친분이 있는 사람 은 가람과 선유, 그리고 엄마 정도. 가람과 겸상한다는 게 믿기 어려울 뿐더러, 가람이 떠난 뒤 저런 얼굴 을 하고 있을 리가 없으니까.
엄마랑 선유 중에 찍었는데 기가 막히게 맞춘 모양이다. “무슨 이야기를 하셨습니까?”
나는 자연스레 선유가 앉았던 자리 -미리내의 맞은편-에 앉으며 물었
다.
그러자 미리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황후 폐하께서 요양을 떠나신다기 에, 오늘 떠나시기 전 잠시 만나 뵈 있단다.”
어쩐지 엄마가 조금 바빠 보이더 니, 일 처리가 빨랐구나.
선유는 왔을 때처럼 누구에게도 밝 히지 않고 조용히 사라졌다.
내게도 일언반구 없었다는 게 조금 서운하지만, 음•••  “편안해 보이시더구나.”
가라앉은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 었다. “좋은 것이지요.”
“그래. 좋은 것이지.”
미리내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는 조금 혼란스러운 듯 보였다.
“조용히 위로해 드릴까요, 아니면 연유를 여쭐까요?”
내 질문에 미리내가 예상치 못했다 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가 푸스스 웃었다.
“정말 예상치 못한 말들만 하는구 나, 산야.”
조금 웃으니 보기 좋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다.
머뭇대던 미리내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너만 괜찮다면, 물어봐 주겠니?” 그거야 어렵지 않다. 나는 고민하 지 않고 곧바로 물었다. “황후 폐하를 어찌 싫어하셨어요?” 제법 정곡이 찔린 모양이다.
미리내는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머뭇댔다.
“보기 싫은 투기였단다. 군주는 하 나의 비를 둘 수 없음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미워지더구나.”
그건 나도 알고 있었다. 황제의 비 들은 모두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까. “헌데, 이제 그저•••  미리내가 덤덤히 말을 이었다.
“조금 안쓰러웠다.”
그 말은 정말 놀라웠다.
황궁은 확실히, 원작보다 평화로워 졌다.
다들 좀 더 부드러워졌다고 해야 하나, 너그러워졌다고 해야 하나.
가족을 잃고 슬퍼하는 사람을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감하는 것이 맞지만, 그 평범함은 원작에서 거의 적용되지 않았던 것이니 말이다.
정말 많이 변했다.
미리내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정도이니.
'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말하고 보니 네 덕이구나."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부정당했 다.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나?
'네가 황궁을 얼마나 바꿔 두었는 지 모르겠니?” 나는 얼떨떨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모르겠는데요•••  '내가 뭘 했다고?'
나는 후궁들이 싸우든 말든 내 신 변만 안전하면 그만인 사람이었다.
내가 한 게 있어야 감이라도 잡지.
백 퍼센트 진심이었지만, 미리내는 내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철 석같이 믿는 모양이었다.
저 느긋한 미소 좀 봐. “우리 산야가 복덩이지. 암.” 아•••••• 예. 그렇지요.
'칭찬 어색에'
늘 어떻게 받아쳐야 할지 모르겠 다.
어색함에 손만 꼼지락대던 나는 미 리내를 흘끔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 어두운 기운이 이제 완전히 걷혀 있었다. 기분이 나아진 모양이다.
그래. 웃으니 됐지. “그래서, 진정 목적은 무엇이니?”
조용히 다가온 궁녀가 내 앞에 새 다완을 놓아 주었다.
미리내가 자를 따라 주며 물었다.
그 물음에 기분이 조금 묘해졌다.
다들 왜 이렇게 나한테 목적을 묻 지.
그냥 한 번 얼굴 보러 왔을 수도 있는 거잖아.
내가 분명히 그냥 지나가다 들렀다 고 말했던 것 같은데, 미리내는 그 걸 믿지 않은 모양이다.
물론 오늘 미리내를 찾으려 했던 건 목적이 있었으니 할 말도 없지 마••
'하여튼 귀신 같은 양반이야.'
그래도 다음번엔 그냥 놀러 와야 지, 하고 다짐하며 나는 미리내에게 물었다.
“후천적으로 이능이 생긴 사례를 아시나요?”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는지 미리 내가 의아한 듯 내게 되물었다. “그것은 어찌 묻니?”
왜 묻나니. 당연한 걸 정말 모르겠 다는 건가.
“이능이 가지고 싶어서요.”
그렇게 대답하자 미리내는 조금 놀 란 듯했다.
'네가 가지고 싶다 말하는 것이 처 음이구나.”
그랬지. 다른 건 갖고 싶다고 말하 기도 전에 이미 다 있었으니까. “축복을 내려 주련?” 미리내가 다정히 물었다.
나는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굳이 치유의 이능을 받고 제윤 가 의 자식이라는 소문이 퍼져 족보를 꼬이게 하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 치유는 좀•••
•••쓸모없지.' 기윤한테 가서 치유의 이능으로 이 떻게 협박을 해.
“강한 이능이 필요해요.”
적당히 돌려 말하자 미리내가 조금 서운한 듯 보이기는 했지만 수긍했 다.
“다른 신수가 서라국에 남아 있다 는 이야기는 듣지 못하였는데.”
그런 것도 들어?
용이라서 그런가. 신수들끼리 커뮤 니티라도 있는 모양이다.
“이능을 가지고 태어나지 못한 자 가 워낙 드물어, 그중에서도 후천적 으로 이능이 것드는 것은••
말끝을 흐리는 게 본인도 모르겠다 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내심 이해했다.
그래. 모를 수도 있지.
좀 아쉽지만 모르는 걸 뭐 어떻
“이 사례를 후천적으로 이능이 생 겼다 말하기는 에매하지만, 아마 가 장 가까울 듯하구나.” 뭐야. 알아?
눈을 빛내자 미리내가 작게 웃었
다.
“아마 미르 1520년 즈음일 텐데.” 기다렸던 대답이었으나, 그 말을  =은 나는 그대로 얼굴이 굳고 말았 다.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착잡한 한숨을 삼키기 위함이었다.
확실치 못하다는 말에 실망한 것은 아니었다.
연호가 미르라는 것도 실록을 읽으 며 알 수 있었다.
•••바로 전이었잖아.'
미르 1519년. 폐하께서 승하하셨
다. 그게 내가 마지막으로 읽은 실록이 었다.
아. 몇 장만 더 넘겨 볼 걸•••
나는 미리내와 해어지자마자 곧바 로 다시 금서실로 향했다.
미르 1520년의 기록은 25대 황제 의 실록에 쓰여 있었다.
해가 지나자마자 새로운 황제가 즉 위한 모양이다.
다른 실록에도 황제의 즉위는 서술 되어 있지만, 그 실록에는 조금 특 이하게 쓰여 있었다.
'즉위식 도중에 황제의 머리가 새 하얗게 세었다고?'
대대로 서라국의 황제들은 검은 머 리칼이었다.
유일하게 백발을 가진 황제인 것이
다.
또한, 25대 황제인 바리 아륜은 특 별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축복을 내리고 이능을 퍼트린 초대 용과 같은 이능을 가졌다 하여, 천 룡이라 불리며 칭송받았다는 힘.
언령의 이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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