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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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드디어 그들이 나를 꽤나 아 낀다는 것을 완전히 인정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 정도로 말하자면 과하지만, 귀여운 조카 아 끼는 정도로 말이다.
그리고 그건 꽤나 좋은 일이었다. 미리내와 가람이 나를 아낀다는 것 만으로도 황제에게 귀여움받은 것 탓에 들어오는 암살 시도가 많이 줄 있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웬만하면 안 왔으면.'
아무리 그래도 속마음을 다 털어놓 으며 머리채를 잡을 수는 없는 상대 이기에 껄끄러운 건 어쩔 수가 없었 다.
표면적인 아낌만 보여 주면 참 좋 겠는데 말이야.
당장 어제만 해도 화령궁의 후원에 서 미리내와 하하호호 산책을 하고 온 나는 꽤나 피곤했다.
하지만 인생은 등가 교환이라는 법 칙답게, 오늘은 퍽 평화로웠다.
'그러고 보니 축제 준비를 한다고 했던 것도 같은데.' 뭐라고 했더라. 아, 맞아. 아륜.
여름의 초입, 서라국에서 열리는 축제인 아륜은 하늘이 열린, 그러니 까 나라의 건국을 기념하는 건국제 였다.
황제가 용에게 올리는 제를 시작으 로 삼일 동안 밤낮으로 축제를 벌이 는 그 축제는 수확이 끝난 뒤 열리 는 추수를 감사하는 영춘, 씨앗을 뿌리기 전 풍년을 기원하는 은정과 더불어 세 손가락에 꼽히는 큰 행사 였다.
세금 감면, 죄질이 가벼운 죄수들 의 석방부터 시작해서 타국 사절의 방문까지. 그것들을 모두 준비해야 하니 바쁠 수밖에.
여름의 초입•• •• 6월 말인가.'
물론 나는 그 소란의 한가운데에서 한가롭게 이런 생각이나 했다.
여덟 살짜리에게 무엇을 시기겠는 가.
일부러 실수해 봐라, 하고 시기는 것이라면 또 모르지만 아륜은 그런 수작이 통할 만큼 가벼운 행사가 아 니었다.
조대 황제의 이름이자 황가의 성을 이름으로 내걸고 있는 축제인데, 허 투루 준비할 수 있을 리가.
찾아오는 이 없는 화선궁이 조용했
다.
다시 쾌적해진 실내에 나는 그대로 침상에 푹 퍼졌다.
“하아암.” 햇볕은 따뜻하고, 공기는 시원하고.
살짝 열어 둔 장에서 불어오는 바람 에는 마지막 남은 봄 향기가 난다.
낮잠을 자고 일어난 지 일마 되지 도 않0갔는데 또 잠이 솔솔 왔다.
하지만 더 잤다간 심심해진 고운을 울릴 판이다.
나는 탁자로 손을 뻗어 희사가 가 져다준 과즙에 띄워져 있는 얼음을 아작아작 씹었다.
나는 얼음을 씹이 먹는 것을 좋아 했다. 아무 맛도 없는 그게 그냥 좋 았다.
하지만 서연은 배탈이 나고 이가 안 좋아진다며 내가 얼음을 먹는 것 을 엄격하게 제한했다.
그게 못내 아쉬웠는데, 서연이 일 을 도우러 가고 없으니 희사는 내가 조금만 시무룩한 얼굴을 해도 금세 못 이기겠다는 듯이 얼음을 내어 주 었다.
다른 어린아이들처럼 단것을 많이 먹어서 이 썩는 것보다는 아무렴 얼 음이 낫겠지.
나는 입 안에 남은 얼음을 와작 씹으며 내 눈앞에서 당과를 집어먹 고 있는 고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대부분의 살수들이 그렇듯이 고운 도 달거나 짜고 매운 음식들을 거의 접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조금만 자극적인 음식을 먹 어도 금세 눈을 동그랗게 뜨곤 했
다.
역시 어린아이라 그런 것인지, 고 운은 유난히 단것을 좋아했다.
아닌 척하면서도 내가 내 몫으로 나온 간식을 밀어 주면 눈치를 보다 가 하나둘씩 집어먹곤 했다.
처음엔 내가 단 것을 좋아하지 않 는다는 말을 믿지 않았지만, 정말로 내가 간식에 잘 손을 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편한 얼굴로 야금 야금 먹는 게 귀엽기는 하다만•••
'내 이보다 고운의 이가 더 빨리 썩겠는데.'
희사가 헤벌쭉 웃으며 담아 준 당 과는 접시 가득이었는데, 어느새 바 닥을 드러냈다. 꽤 달았는데 혀가 안 아릴까.
한국에서 먹던 것처럼 캐러멜이나 초콜릿같이 진득하게 단 것은 없지 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것은 사실 이다.
이곳에서 치과 치료를 제대로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기도 어렵고.
입을 오물거리던 고운이 시선을 느 꼈는지 고개를 들었고,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맑은 정회안이 동그래
졌다.
깜짝 놀라 굳은 그의 모습에 내가 의아한 얼굴을 하자 고운이 손에 당 과를 들고 어쩔 줄 몰라 했다.
••••송구합니다.”
먹던 것을 놓지도 먹지도 못한 채 어물어물 내놓은 사과에 나는 화들 짝 놀라 손을 내저었다.
눈치 준 거 아니야! “아나. 괜찮아. 먹어!”
“마마의 것을 제가 감히•••
“난 이거 있이. 먹고 싶으면 더 먹 을 수도 있고. 괜찮아!” 들고 있던 과즙을 흔들며 그렇게 소리치자 그제야 고운은 제 손에 있 던 당과를 입에 넣었다.
가만히 시선을 내리깐 모습이 어쩐 지 처연해 나는 자리에서 일이나 그 에게 다가가 입가를 닦아 주었다.
“많이 먹으면 이 썩을까 봐 그랬
어. 먹는 게 아까워서 그런 게 아니 아.
내 말에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고운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온순한 그 얼굴에 설핏 웃은 나는 이내 크게 하품을 했다.
“피곤하십니까.”
•••좀 그렇네.”
나는 고운의 물음에 대답하며 눈을 비볐다.
아. 정말 왜 이렇게 피곤하지.
단지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언 제부터인가 간간이 그랬다.
좀 괜찮아지나 했더니 최근에 좀
더 심해졌다.
혹시 밤에 고운이랑 논 것 때문에 그런가 싶지만, 그래도 10시 전에는 잤는데.
아무리 어린아이들이 잠을 많이 자 아 한다고 해도, 하루에 낮잠 포함 해서 12시간을 자는데 또 졸린 건 너무하지 않나.
내가 다른 이린에들처럼 뛰어노는 것도 아닌데.
밤에 내가 기억 못 하는 무엇이라
도 했나•••
“어머, 마마! 졸리시면 주무셔요!” 재차 하품을 하는데, 희사가 호들 갑스럽게 말했다.
당장이라도 나를 번쩍 들어 침상에 내려놓을 것처럼 다가오는 희사의 모습에 나는 주춤 뒷걸음질을 졌다.
희사는 정말•••••• 행동력이 빨랐고, 힘이 셌다.
얼마 전에도 내가 열린 장에 이마 를 부딪쳤다고 그 창을 뜯어 버리려 는 것을 간신히 말린 참이었다.
서연이 있을 때에는 적당히 제어가 되었는데••
“안 잘 거다. 이미 자고 일어나지 않았느냐.”
“더 주무셔도 괜찮은걸요! 자, 제 가 자장가를 불러 드릴게요! 선물로 들어온 음악 상자가 어디 있더
“내가 잔다고 해도 네 자장가는 들 을 생각 없다.”
나는 오르골을 찾으려 부산히 움직 이는 희사에게 딱 잘라 말했다.
내게 고개를 돌린 희사의 얼굴이 한껏 울망해져 있었다.
“하지마안•••
대체 나한테 왜 자장가를 불러 주 고 싶어 하는지 모르겠지만, 유난히 내 궁녀들은 그것을 좋아했다.
마침 궁녀들이 자리를 비워 본인밖 에 없으니 냉큼 자지하려 하는 모양 인데, 나는 그 유아적인 것을 두 번 들을 생각이 없을뿐더러 희사밖에 없는 지금 잘 생각도 없었다.
“지금 자면 분명 날 깨우지 않을 것 아니나.”
“제가 어찌 마마의 명을 이기겠습 니까! 이 희사, 하늘이 무너져도 지 기겠습니다!” 희사는 세 손가락을 들며 의기양양 하게 말했다.
하늘과 땅과 자기 자신에게 맹세하 는 건가, 신에게 가문을 걸고 맹세 하는 건가.
확실히 기억나진 않지만 아주 강한 맹세라는 건 분명했다.
하지만 희사, 네가 그 세 손가락 맹세를 너무 자주 써먹었다는 것도
기억해야지. “안 믿는다.”
DI-111-•
시무룩해진 희사에게서 시선을 돌 리는데, 고운이 내 소맷자락을 작게 끌어당겼다.
그에게 시선을 돌리자 고운이 들고 다니는 작은 수첩에 조그마한 붓으 로 무언가를 끄적거렸다.
단시간에 수어를 배우기 어려워하 는 날 위해 선택한 방법이었다.
글자를 적어 내려가던 손이 멈칫했
다. 이내 두 줄을 죽죽 그은 고운이 다시 무언가를 썼고, 또 두 줄을 그 었다.
고심하듯 앙다문 입이 꽤나 고전하  듯해, 나는 슬쩍 그 수첩에 고개 를 들이밀었다.
[비밀 ••이 있으시다고 하셨ㆍ
검은색으로 질해진 부분에 여러 글 자들의 흔적이 보였다.
정원, 화원? 끝말도 어떻게 맺어야 할지 모르겠는지 '습니다', '지 않습 니까' 등이 남아 있었다.
“비밀 정원?” 대충 알아들은 나는 그렇게 물있 고, 고운은 조금 발개진 얼굴로 고 개를 끄덕였다.
비밀 정원•••••• 있긴 하다.
거길 비밀 정원이라고 불러도 좋을 지는 모르겠지만.
화서궁의 후원에 있던 작은 공터.
사방이 막히고 햇살이 내리쬐던 “있긴 하다만, 왜?” 내 말에 고운이 무언가를 끄적거린 수첩을 내밀었다. [데려가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 았다.
내가?

내 물음에 고운이 주저했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다시 수첩에 대답을 적어 내밀었다.
[어젯밤에요.] 어젯밤에 내가 그렇게 말했다고?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질 않0갔 다.
애초에 나도 거의 잊고 있던 그곳 을 대체 언제 고운에게 말해 주있 지?
고운이 장난을 치는 거라고 하기엔 그릴 성격도 아니고, 무엇보다 그걸 고운이 알아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잠결에 중얼거린 건가. 어찌 됐든 간에 민망하게 되었다. 거긴 다시 갈 수 없으니 말이다.
“거긴 더 이상 내 궁이 아니니 갈 수가 없어. 미안에” 내 말에 고운이 얌전히 고개를 주 억거렸다.
그리 상심한 얼굴이 아니라 다행이 라 생각하는데, 그 말을 들은 희사 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마마의 궁이 맞아요.
“화서궁은 여전히 마마의 궁이에
요. 그저 궁이 늘어난 것뿐이랍니
그 발랄한 말에 나는 말문이 막히 고 말았다.
어이없다는 기색이 역력한 내 얼굴 에도 아랑곳없이 희사는 즐겁게 재 잘했다.
“물론 지금은 마마께서 그 궁에 거 주하지 않으시니 다른 용도로 쓰고 있긴 해요. 그렇지만 궁의 주인은 여전히 마마시지요! 혁, 혹시 싫으 시다면 당장 나오라고 할게요!”
“아, 아나. 괜찮다.”
당장이라도 화서궁으로 달려갈 것 같은 희사를 나는 황급히 만류했다. 궁이 두 개인 후궁이라니.
당황스럽긴 하지만, 희사의 말에 따르면 궁인들의 숙소 정도로 사용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화서궁이 작은 편이긴 했으니 그릴 수도 있지.
어찌 되었든 갈 수 있다니 상관은 없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희사는 재빨리 나갈 채비를 해 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고운과 함 께 화서궁으로 출발했다.
화선궁과 화서궁은 이름이 비슷한 만큼 가까웠고, 얼마 걷지 않아 도 착할 수 있었다.
나는 오랜만에 보는 궁의 대문을 보고 작게 미소지었다.
내가 있었을 때와 다르게 궁 안에 서는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다.
쇳소리가 나는 것으로 보아 대장장 이들이나 호위 무사들이 있는 모양 이었다.
•••문을 열자마자 칼이 날아오진 않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열있 고, 예상과 별반 다르지 않은 광경 을 마주했다. 후자가 맞았는지, 호위 무사들이 가득 있었다.
아름답게 꾸며져 있던 정원의 나무  亡은 모두 그대로였는데, 어찌 그것 들을 훼손하지 않고 훈련을 하고 있 는 모양이었다.
천천히 안으로 들어가니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를 발견했다.
그중 한 사람이 놀란 얼굴로 내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시선을 맞췄다.
“여긴 들어오면 안 된다. 저이기, 저 바깥에 꽃나무가 있으니 그곳 가 서 놀거라. 아, 부모를 잃어버린 것 이나?” 그 말에 나는 조금 당황스러워졌 다. 그는 내 신분을 모르는 모양이 었다.
내가 입은 옷이 수수하긴 하지
만••
그래도 그렇게 쫓겨날 수는 없어 내 신분을 이야기하려는데, 일순 내 옆으로 시선을 준 남자가 멈칫했다.
한참을 굳어 있는 모습에 나는 뒤 를 돌았고, 처음 보는 고운의 모습 을 보았다.
•••왜 저렇게 화가 난 거지? “혹, 초비 마마 되십니까?” 남자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 온 것도 그때였다.
고운에게 무어라 물으려던 나는 고
개를 돌렸고, 기묘하게 반짝이는 남 자의 눈동자를 보았다.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정체 를 알아봐 주었는데 아니라고 대답 하기도 그랬다.
무엇을 보고 알아보았는지는 모르
겠지만•••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남자가 자리 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그대로 손을 입으로 가져가 기이한 휘파람 소리를 내었고, 그 순간 서 있던 사람들의 인영이 지푸 라기처럼 스러졌다.
그와 동시에 어디선가 장정들이 투] 어나와 나를 둘러싼 것은 눈 깜짝할 새에 이루어졌다.
살기는 띠지 않은 채로, 하지만 커 다란 곰 같은 모습을 한 그들이 한 마디씩 내뱉었다. “초비 마마다.”
“진짜 초비 마마다.”
“초비 마마네.
뭐, 뭐야.
나는 순간 놀라 뒤로 한 발짝 물 러섰다.
그러자 내 뒤에 있던 고운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곰 떼처럼 몰려들었던 남자들이 움 칠했다. 하지만 이내 그들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그래. 우스워 보이기도 하겠지.
고운은 나보다는 크지만 성인들이 보기에는 나와 별반 다를 것이 없으 니 말이다.
하지만, 음•••••• 착각의 결과는 본 인이 받아들이는 것으로 하자.
고운을 앞에 세우자 미약하게 남아 있었던 불안감이 사그라들었다.
이제 저 남자들이 불시에 날 후려 질 수도 없었다.
처음엔 호위 무사처럼 위장까지 해 서 숨어 있기에 자신의 신분을 속이 려는 그림자들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기엔 고운이 그들0  두려워하지 않았다.
제 동료들에게 학대당한 고운이 그 가해자 앞에서 동요하지 않을 리가.
그림자를 제외한 또 다른 암대가 황궁에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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