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뿔 걸리면 속곳 하나 남기고 내 보낼 줄 알아라.” 그런 그에게 지나가던 동료인 노을 이 차갑게 뇌까렸고, 여류는 그것을 비웃어 주려다 재차 재채기를 했다.
“푸엣취!”
“더러운 놈.” 노을이 질색하며 뒤로 물러났고, 그것에 여류가 눈을 희번덕 떴다.
“네놈은 팔을 자르면 얼음이 쏟아 지겠다! 하여간 인정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어서는.” 투덜거린 말에 노을에게서 암기가 날아왔다.
그것을 가볍게 잡아챈 여류가 어깨 를 다시금 부르르 떨었다.
“아, 거 참. 잎새달(4월)이 코앞인 데 고뿔이 들었나.
“그러게 내가 이제 새벽에게 보낼 서찰 먼저 쓰고 나가랬더니, 그 말 을 똥구멍으로 들은 값을 지르는 게 지.”
“행. 내가 그놈에게 보낼 서찰을 미룰 리가 있나! 당연히 가장 먼저 씨 두었지.”
“그럼 어찌 내가 물었을 때에는 아 직 쓰지 않았다 대답했이?” “약 오르라고 그런 거지.” 여류의 태연한 대답에 다시금 암기 가 날아왔다.이번에는 꽤나 빠른 속도로 날아와 여류의 뒤에 있는 벽에 꽂혔다.
여류는 그에 혀를 쯧쯧 찼지만, 내 심 숨길 수 없는 미소가 입가에 떠 올라 있었다.
화서궁, 이제는 화선궁의 주인이 된 후궁 마마님의 호위로 나간 막내 에게 서찰을 쓰는 것은 그림자들이 꽤나 고대하는 일이었다.
늘 음울한 얼굴을 하고 입도 뻥긋 하지 않는 데다, 이름조차 말해주지 않아 눈동자 색으로 '새벽'이라는 가명까지 지어 줘야 했던 아이이지 만, 그래도 막내 아닌가.
본인이 먼저 쓰겠다고 하도 싸워 대는 탓에 머무는 며칠 새에 궁을 두어 번 부숴 먹기까지 했으나, 그 들은 곧 아주 평화로우며 공정한 방 법을 찾아 냈다. 제비뽑기였다.
여류는 그 대망의 첫 순서로 뽑힌 그림자였다.
첫 번째로 새벽에게 서잘을 씨 보 냈다는 것에 여전히 싱글벙글인 여 류를 질린다는 얼굴로 바라보던 노 을이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
다.
“한데 자네가 갖다 드렸나?”
“아니. 나는 모르지. 두고 나가니 없던데?”
“새벽에게 다시 보내면 오체분시해 버리겠다는 답신이 온 것을 보면 제 대로 도작한 것인데.” 둘의 얼굴이 동시에 요상해졌다.
만나기만 하면 투닥거리는 그들은 웬일로 머리를 맞대고 생각에 빠졌
다.
먼저 고개를 든 것은 여류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폐하께서 잠시 왔다 가셨군.”
•••폐하께서?” 노을의 얼굴에 일순 불길한 표정이 스쳐 갔다.
노을은 여류를 붙들고 심각한 일굴 로 따져 묻기 시작했다.
“안에 뭐 이상한 내용을 적진 않았 겠지?”
“당연하지! 내가 새벽에게 보내는 서찰에 이상한 내용 적을 것이 무에 있다고.” 노을은 그 당당한 대답에도 의심스 러운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무어라 적어 보냈기에.”
“그저 마마는 잘 모시느냐. 밥은 잘 먹나 걱정되는구나. 후궁 마마님 의 처소이니 식사가 맛이 좋겠구나.
이리 씨 보냈지.” 놀랍게도 여류는 진심이었다.
모든 그림자들은 나이도 어리고 조 그마한 새벽을 귀여워했고, 그 감정 을 아낌없이 표현했다.
다만 문제라면 그들의 표현 방식이 과격했다는 것에 있었다.
여류의 의기양양한 얼굴에 노을이 미간을 팩 찌푸렸다.
“뱃속이 아니라 머릿속에 거지가 들었나. 안부 편지를 그따위로 보냈 는가?” 쐐액, 콱.
다시금 암기가 두어 번 허공을 날 았다.
속 암기를 피한 노을이 그제야 안 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폐하께서 그것을 열어 보시 기라도 하셨겠나.”
“그렇지?” 여류는 장난기 넘치는 얼굴로 씨익 웃으며 말했다.
화선궁의 어린 후궁 마마께서 그 내용을 본 뒤 칼을 갈고 있다는 사 실은 새카맣게 모르는 말이었다.
정말로 한기가 든 것인지, 누군가 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에서 오 싹함인지 모를 것에 여류가 다시금 재채기를 했다.
“엣취!”
“내 옆에서 열 보 떨어지게.”
다음 날이 되어서야 나는 황제가 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강연에 참석하서아 되옵니다.” 고운에게 공기놀이를 가르쳐 주려 던 나는, 내가 제대로 들은 것이 맞 는지 의심스러워졌다.
그 생각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는 지 서연은 진절하게도 다시 한 번 반복했다.
서라국의 황제는 후궁들과도 강연 을 했다.
후궁들과의 강연이라니, 하고 의심 하는 자들이 있었지만, 놀랍게도 한 국의 회의와 비슷한 강연이었다.
힘이 강한 명문가 자제이기도 한데 모두 황제를 사랑하니 황제의 입장 에서는 그것만큼 써먹기 좋은 패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당연하게도 맡고 있는 요직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왜?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는데, 이 찌하여 강연에 참석하느냐?”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강연 은 모든 후궁 마마께서 참석하시는 의무이자 권리입니다.” 그 의무도 권리도 지고 싶지 않았 고, 지금까지도 안 지었다. 그리고 앞으로 쭉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가야 한다니 뭐••• 나에게는 거부할 명분이 없었고, 결국 나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일어나자 고운도 따라 일어났 고, 그는 내 궁녀 중 하나인 전유를 따라 방에서 나7갔다.
내가 그것에 의아해할 시간도 없이 궁녀들이 내 옷을 가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뭐야. 지금 당장?
“초비 마마 드십니다.
나는 무거운 소매를 슬쩍 들이 보 다가 그 말을 듣고 화들짝 놀라 팔 을 내렸다.
옷매무시를 다듬을 시간도 없이 문 이 드르륵 열렸고, 곧바로 수많은 눈을 마주했다.
오. 젠장.
시선들 탓에 토할 것 같다. 잊고 살았던 혼례복 같은 정복의 불편함 때문이기도 했다.
서연과 궁녀들은 나를 빠르게 준비 시켜 곧바로 황제의 궁인 화룡궁으 로 보냈다.
이 자가 식기 전에 적장의 목을 따오겠다던 관우 같은 모습이었다.
고운은 따라올 수 없었고, 그나마 나를 안내해 준 서연은 이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었다.
' '폐하까//只7 보듬어 주절/ 겁니다.
나는 그 안으로 어쩔 수 없이 발 0 들이며 궁에서 출발하기 직전 서 연이 내게 속삭인 말을 떠올렸다.
그 폐하께서 보듬어 주시는 것이 안 되는 거야.
내가 천천히 걸어 들어갈 때마다 후궁들이 수군대는 것이 들렸다.
나는 그들을 곁눈질하지 않으려 노 력하며 내 자리를 찾았다.
후궁들의 강연에는 자리가 정해져 있다.
보통 궁에 들어온 순서대로 앉지만 총에받는 후궁의 경우는 황제와 가 까이 앉는다.
더 정확히는 황제에게 얼마나 도움 이 되느나이지만.
원작에서 황제의 왼편과 오른편을 자지했던 것은 산야와 미리내였다. 산아는 자신은 한참을 황제를 구슬 리고 공들여 얻은 자리를 미리내는 노력도 없이 냉큼 꿰찼다고 그를 증 오했다.
그리고 물론 지금의 나는 그 자리 에 앉을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었다. '저 끄트머리에 있을 텐데.' 나는 문에 가장 가까울 내 자리를 눈으로 찾았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내 이름 적힌 자리는 없었다.
내가 글자를 헷갈렸나 싶어 다시 찾으려는데, 꽤나 위쪽의.
그러니까 황제와 아주 가까운 자리 에 앉아 있던 남자가 자리에서 일이 나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나는 그 남자의 찰랑이는 백금발을 보았다.
남자가 입꼬리를 빙긋 올리며 나를 불렀다.
“산야.”
“귀비 마마를 뵙습니다.” 왜 왔어. 거기 눈독 안 들일 테니 까 저리 가.
그에게 인사하며 혹시 몰라 앞쪽을 찾으려는데, 머리 위에서 작은 웃음 소리가 들렸다.
“자리를 찾아 줄게요. 자.” 미리내가 온화하게 웃으며 내게 손 을 내밀었다.
순간 벙 찐 나는 이내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그의 손을 잡았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지 만, 이 정도는 해 주겠지.
하지만 미리내가 나를 데려간 곳은 뒤쪽이 아니라 앞쪽이었다.
그러니까, 그가 앉아 있던 자리.
내가 믿을 놈을 믿었어야 했는데. “저, 귀비 마마.”
“송구하오나, 제 자리는 그곳이 아 닌 듯싶습니다.”
난처하게 웃으며 말하는 내 얼굴에 미리내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는 그는 검지로 자신의 자리 바로 옆을 가리켰다. “산아의 자리는 저기인걸요.”
나는 웃는 얼굴에 조금 금이 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에는 정말 로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산야. 늘 예쁘다고 생각했던 이름 이지만 지금만큼 싫었던 적이 있었 을까.
“자아. 이곳에 오래 서 있을 수 없 지요. 곧 폐하께서 오실 테니까요.” 벌써부터 다른 후궁들의 시선이 느 껴지는 것 같0갔다.
나는 정말이지 만류로 충분했다.
다른 후궁들의 시선은 필요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미리내의 의도에 대 해 의문이 들었다.
남의 손을 빌려 죽이겠다는 건가?
•••예, 귀비 마마.”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그곳으로 걸어가 앉았고, 동시에 시선이 더욱 쏠렸다.
저리 가•••
강연은 아주 평범하게 흘러갔다.
내가 모르는 정치 이야기, 산업, 문 화 등등이 스쳐 지나7갔다.
나는 낄 생각이 없었고, 낄 수도 없었다.
다른 후궁들이 본인들의 일을 보고 하는 식으로 강연이 흘러가기도 했 고, 내가 하는 일이 없을뿐더러 껴 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할 게 뻔하 기 때문이다.
'이거 맛있네.'
나는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내 앞 에 놓인 간식이나 집어 먹었다.
다른 사람들의 상에는 모두 과일자편으로 보이는-이 올라왔는데, 내 상에만 유밀과가 올라왔다.
소리를 내지 않고 먹어야 해서 아 금아금 베이 무는 것이 나름 재미있 었다.
“그럼 오늘 강연은 이렇게 파하는 것으로 하지.” 드디어 내가 기다리던 소리가 나왔
다.
나는 손에 묻은 부스러기를 조심히 털고 치맛자락을 잡고 일어날 준비 를 했다.
“그리하면 오늘 폐하의 침전에는 누구를 들이시겠습니까?” 어느 후궁의 교태 이린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나는 하마터면 경악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들어 어린아이가 있는 자리 에서 그런 망언을 한 사람을 올려다 볼 뻔했다.
원래 강연의 끝이 이랬나?
나는 정말로 장담하지만, 황제와 후궁들의 밤 생활은 활자로 읽는 것 에 족했다.
이런 식으로 알고 싶지 않았다. “아. 그것 말이나.”
황제는 그 말을 아주 여상한 목소 리로 받았다. 늘 그래 왔다는 듯한 말투였다.
내가 구겨지려는 미간을 애써 피고 있을 때, 황제가 해사한 얼굴로 내 게 시선을 돌렸다.
다시 그대로 고개를 돌려 주었으면 좋겠다.
나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지만 황 제의 시선은 나를 끈질기게 따라붙 었다.
불길해. 불길하다.
“산야.”
황제가 내 이름을 불렀다. 묘하게 들뜬 목소리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들었고, 부담스럽게 빛나는 그녀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무슨 말을 할지 알겠는데 제발 하 지 마.
“오늘 밤에는 네가 내 침전에 오거 라. 내 서책을 읽어 주마!”
아. 왜 이런 예감은 늘 틀리지를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