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내와 대화를 끝냈을 때에는 장 밖이 어둑어둑해진 뒤였다.
나는 후다닥 선유에게 달려갔지만, 그는 그냥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분에 못 이겨 하는 말이 아닌 정말 로 괜찮다는 듯 대답하는 그의 모습 에 나는 괜히 미안해졌다.
여의주에 대해 물어보려고 했는데, 저렇게 처량 맞으면 남으라고 말도 못 하잖아.
선유는 정말로 괜찮다며 나를 다독 이고는 동궁을 떠났다.
그를 배웅하던 나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황후 폐하께서는 가졌니?' 다시 나를 찾아온 미리내가 묻기에 그렇다고 대답하니 그는 잠시 머뭇 거렸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눈빛이 꼭 미안해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싫어하는 건 아닌가?' 정말 싫으면 상대가 무슨 일을 당 하든 아무 신경도 안 쓸 것 같은데.
둘이 어린애들 장난 정도로 투닥거 린 것도 아니었고••• 그 둘만의 사정일까.
괜히 내가 궁금해 하면 안 되는 이 아기일까 봐 조금 걱정되긴 한다.
“기윤 여란은 고개를 들어라.”
그때, 서릿발 같은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제야 내가 꽤 한가로운 생 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맞아. 여기 추국장이었지.
물론 내가 범죄자로 저 아래에 서 있는 건 아니고, 공주로서 황제의 오 른편에 앉아 있지만 말이다.
'날이 참 좋네.'
제법 엄숙한 분위기였지만 나는 여 전히 한가로웠다. 내가 굳이 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추국장에 선 것은 둘이었다.
죄인의 혐의를 받고 끌려온 기윤과 그를 고발한 유리.
유리가 손을 꼭 움켜쥐는 것이 멀 리서 보였다. 의연해 보이지만 정말 그렇지는 않 은 모양이다.
기윤이 심문을 받는다는 소식은 금 세 퍼졌고, 내로라하는 귀족들은 모 두 추국장으로 모여들었다.
빈 늑대 굴의 여우 노릇을 하던 작 자가 잡혀갔다니 궁금하기도 하겠지. 나는 보는 눈이 많아 좋았지만, 유 리는 아무래도 불편해 보였다.
나는 유리와 눈이 마주치자 아주 살짝 웃어 주었다.
혹시 몰라 대본도 썼고, 달달 외운 걸 말하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괜찮 을 거야.
'힘내라. 어려운 건 엄마가 할 거니 개' 나는 슬쩍 옆을 보았다. 엄마는 내 게 눈길조차 안 주고 냉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대는 어찌 이곳에 끌려왔는지 그 연유를 아는가?” 그 말에 기윤이 고개를 가볍게 숙 였다.
“송구하오나 소신, 폐하의 의중을 헤아리지 못하였나이다.” 여전히 대담한 인간이었다.
죄를 판결하는 자리에서 황제의 의 중을 묻다니, 꼭 황제가 누명을 씌웠 다는 말로 들리잖아.
“그래?” 엄마는 느른한 목소리로 그렇게 묻 더니, 이미 무릎을 꿇고 있는 유리에 게 시선을 돌렸다.
“저 아이가 얼마 전 짐을 찾아와 고하더군.”
“자신은 실바누스의 사신 플린트 공작의 하인이며, 공작과 여란 가의 가주가 내통한 것을 안다며 말이야.” 그 말에도 추국장은 조용했다. 다들 그리 동요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왜 이런 것으로 기윤을 추 국장에 세웠는지 의아해하는 듯 했
다.
사신과 몰래 거래해 희귀한 서 대 륙의 물건들을 독점하는 것 정도야 흔한 일이었다는 의미겠지.
“경들이 늘 말하듯 짐은 너그러운 황제가 아닌가. 아무리 아이라 해도 어찌 간곡한 호소를 무시할 수 있겠 나.”
엄마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그리 고는 유리에게 말을 걸었다.
“네가 고하고자 하는 것을 상세히 고하라.”
“예, 폐하.”
유리는 머리를 조아리며 가냘프게 대답했다.
그 모습이 정말 순박한 시종 같았
다.
유리가 왕자임을 밝히지 말 것.
그건 내가 가장 먼저 엄마와 유리 에게 당부한 말이었다.
이곳은 실바누스가 아니다. 동등한 위지와 시기는 것을 했을 뿐인 하인은 의미가 달랐다.
또한, 서라국에는 서 대륙의 나라들 에 대한 정보가 극히 적다.
왕국의 사정을 모르는 이들에게는 입국할 때에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 가 이제야 갑작스레 밝히는 것을 의 심스럽게 여길 것이고, 도리어 믿지 않을 확률도 있었다.
굳이 왕자인 것을 밝혀 도박하느니, 안전하게 하인인 쪽으로 가는 것이 나았다.
'하인이라 해도 왜 그 일을 알게 되 었는지 변명할 거리도 있고.'
유리는 몸을 벌벌 떨면서도 의연하 게 계속 말을 이었다.
“공작 각하께서 여란 가의 가주께 넘긴 것은, 현재 여란 가에서 판매 중인 그 약이옵니다.” 이번에는 제법 사람들이 술렁였다.
여란 가가 그 약으로 이익을 많이 보고 있는 만큼, 독점했다는 말이 속 이 쓰리겠지.
“허허. 어디에서 그런 영약을 얻었 나 했더니, 그 먼 곳에서 구해 온 약 이었구려.”
“그 약이 지금껏 고지지 못한 고질 0드으己근 모두 깨끗이 낫게 하였으니, 나라의 홍복입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화기애애한 말을 불안한 유리의 목 소리가 갈랐다.
유리의 목소리는 바들바들 떨렸지 만 추국장 안에 뚜렷하게 들렸다. 모 인 이들이 모두 들을 수 있을 만큼.
잠시 유리가 머뭇거렸다.
그 침묵에 모두의 시선이 유리에게 집중되있다.
“여란 가의 가주께서 판매하시는 약은 만병통치약이 아닙니다.” 간결한 그 말에 귀족들의 자리에서 작은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아마 그 약을 복용한 사람이나 그 진지이 겠지.
“그것은 아편이라 불리는 약이온데, 진통과 진정 작용이 뛰어나지만 약 의 복용을 중단하였을 때에 금단 증 상이 매우 심각하옵니다.” 그 말에는 반응이 나뉘었다.
누군가는 믿는 듯이 심각한 얼굴을 했고, 누군가는 혼란스러운 듯 보였 으며, 누군가는 기윤의 눈치를 보며 얼굴을 붉혔다.
마지막 경우는 이미 약에 중독되었 거나, 약의 판매권을 나눠 갖고 싶은 모양이겠지.
“감히 주제도 모르고 여란 가의 가 주를 고발했다기에 무슨 일인가 했 더니, 이리 터무니없는 말이었구나!” 그리고, 이렇게 비리 소리치며 일어 난 것은 마지막 경우의 이였다.
묵직하고 끝이 갈라지는 호통 소리 에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나이 지긋한 노귀족이 분노로 수염을 파 르르 떨고 있었다.
“내 그 약을 먹은 뒤로 아프던 온 몸이 회춘이라도 한 것처럼 가뿐하
다. 네놈 같은 천한 것이 이 귀한 영 약을 구경이라도 해 보았느냐!” 아이고. 나는 슬그머니 얼굴을 찌푸 렸다.
그는 마약이 얼마나 마음에 들었는 지, 기진 광신도처럼 보였다.
저만큼 나이가 들고도 허리가 꼿꼿 하고 얼굴에 기백이 있는데, 어쩌다 가 마약을 해서는••• 내가 그를 안타까워하는 사이, 유리 는 어깨를 움츠리면서도 야무지게 입을 열었다.
“허나 거짓을 어찌 진실이라 하겠 습니까. 서 대륙에서 만든 것이니 서 라국인보다는 제가 그 약에 대해 잘 알 것입니다.” 따박따박 내리꽂힌 말대꾸에 노대 신이 뒷목을 잡으려 했다.
잠시 조용해진 추국장 안에서, 가만 히 입을 다물고 있던 엄마가 나지막 이 말했다.
“네 말대로라면 저자가 그러한 위 험한 약을 다른 이들에게 중독시기 고 있다는 의미이구나.” 유리의 말에 힘을 실어 주는 듯한 발언에 노대신이 얼굴이 붉어졌다.
“폐하! 어찌 충신을 저버리시고 오 랑개의 말을 귀담아 들으십니까. 터 무니없는 이야기이니 씩 내쫒으십시 오!”
저 할아버지가 약을 해서 눈에 뵈
는 게 없나.
나도 모르게 성질이 확 솟구쳤다. 황제에게 명령질이라니. 뭐 하는 짓 010b
“진정하시게. 짐 또한 증좌 없이 처 벌할 생각은 없으니 말이야.” 엄마는 이번에도 익숙하다는 듯 그 말을 넘겼다.
“너는 어찌 그것을 알게 되었느
일반적인 시종이라면 모를 만한 일 이었으니 제법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그 말에 유리가 고개를 숙였다.
“낯부끄러운 말이지만, 공작 전하께 서는 서라국어에 능하지 못하십니
다.”
이건 놀랍게도 진실이었다.
대체 남의 나라에 사신으로 오면서 그 나라의 언어조차 제대로 익히지 못하면 어떡하나 싶고, 저런 인간이 섭정이라니 실바누스 나라 꼴도 참 볼만하겠다 싶고.
내가 한가롭게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유리의 말은 이어졌다. “하여 제 영특함을 높게 사 저를 통역사로 데려오셨고, 제가 그 서신 을 대필하였습니다.” 말을 마진 유리가 한 발짝 나아갔 다.
“주고받은 서신이 그 증좌입니다.
환희전의 서랍 안에 그 서신을 보관 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말에 황제가 환희전으로 궁인들 을 보냈다.
마침 추국장과 환희전은 가까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돌아왔다. 환관은 어두운 표정으로 계단을 올 랐고, 서신 두 개를 황제에게 내밀었
다.
서신을 펼친 그녀가 피식 웃었다.
그 서신은 당연하게도, 내가 위조한 그 두 서신이었다.
몰래 나눈 서신인 탓에 가문의 인 장은 없지만, 필적 확인을 하기만 해 도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을. “경들은 어찌 생각하시오?”
그 말투가 마치 조롱하는 것 같았
다.
여란 가의 힘이 강했던 탓에, 다른 귀족가들은 비교적 세력을 기우지 못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 목이 아까워 엎드린 것이지, 정말로 목에 칼을 가져다 대면 누구라도 발버둥 지는 법이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귀족들 중 그 약을 구매하지 않은 이가 몇이나 될 까.
그리고 기윤이 그 약으로 자신들을 손아귀 안에 넣으려 했다는 것을 알 고도 가만히 있을 위인은?
나는 내가 짜 놓은 판이 아주 잘 굴러간다고 생각하면서, 슬슬 눈물을 짜냈다.
기윤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안절부 절못하며 주먹을 꼭 쥐는 성의도 보 였다.
아, 어떡한담. 정말 안 됐어요, 아비
지.
그것 자체는 진심이기는 했다.
물론 뉘앙스는 안타까워하는 그것 과는 조금 다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