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주에는 이능을 담을 수 있다. 그리고 아마도, 황후. 그러니까 선 유의 가분의 이능은 다른 이의 이능 을 빼앗아다 여의주에 담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했을 때 문제가 되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렇다면 왜 황제들은 그 여의주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그 안에 담긴 이능들을 모두 사용 할 수 있다면 황제의 이능은 지금처 럼 황제의 소수 측근만 아는 도화가 아닌, 현존하는 모든 이능을 다 사 용할 수 있다고 밝혀졌을 텐데.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오래 고민하 지 않았다.
'물어보면 되지.'
당장 현 황제가 내 어머니인데 못 물어볼 건 또 뭐가 있어.
어제 기윤이 황제의 눈 밖에 나지 말라 했으니 아양 떨 겸 간다는 핑 계도 좋았다.
나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채비했 고, 그대로 화룡궁으로 향했다.
이 시간이면 엄마도 아침 수라를 들고 있을 때이니 간 김에 몇 입 얻어먹으면서 대화나 하지.
그렇게 도착한 화룡궁에 도착하자 대감이 나를 맞았다.
“폐하께 문안을 드리러 오신 겝니 까?” 그런 편이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대감이 주름살이 패이도록 푸근하게 웃고는 안내했다.
“오늘부터 두 분 폐하께 문안을 드 리시려나 봅니다.” 그 말에 나는 조금 민망해졌다.
관례대로라면 공주인 내가 아침마 다 황제와 황후에게 문안 인사를 드 리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내가 워낙 번갯불에 공 구 워 먹듯 공주가 되었고, 또 황궁이 한동안 바빴다 보니••• '아니, 사실 다 핑계지.'
아침마다 얼굴 보는 게 껄끄러워서 슬그머니 피했고, 그걸 다들 묵인해 줬을 뿐이다.
앞으로는 자주 해야겠다고 새삼 생 각하며, 나는 멈춰 섰다. “폐하. 공주 마마께서 오셨습니다.”
엄마가 미리 언질을 주었는지 대답 이 돌아오지 않고 문이 열렸다.
방 안으로 뛰듯이 걸어 들어간 나 는 예상외의 선객에 우뚝 멈춰 섰 다.
선유가 놀란 눈으로 나를 부르려다 말았다.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제야 아까 대감의 말을 곱 씹었다.
'두 뿐 폐하기/ 문안을 드己/자려나 봅니다.'
그게 황제와 황후를 각각 찾아간다 는 의미가 아니라, 여기에 둘 다 있 다는 의미였나••••••!
잠시 정적이 지나고, 엄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산아, 황후와 이야기 중이었으니 잠시 기다려 주겠느냐?”
“괜찮습니다. 이제 돌아갈 터이니 공주와 말씀 나누시지요.”
선유가 웃음 띤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화급히 을 내저었다.
“두 분이 말씀 더 나누셔요. 저는 괜찮습니다.”
“진정 돌아가려던 참이었으니 걱정 말거라, 아해아.”
뜬금없이 나온 호칭에 또다시 정적 이 찾아왔다.
나는 어색하게 웃었고 엄마는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황후. 공주의 이름을 모르는가?”
“알고 있으나 공주의 이름을 부를 권리는 아직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 말에 엄마는 의아한 얼굴을 했 고, 선유는 가만히 웃었다.
•••미리내가 내 이름 이상하게 알려 줘서 저러는 거지?'
나는 그 태연한 대답에 선유의 평 가를 조금 바꾸었다.
우직하고 다정하고, 마음 넓은 사 람인 줄 알았는데, 역시 황제의 남 자들이기는 한 모양이다.
은근슬쩍 일러바치는 것 바••
의미심장한 말이었으나 엄마는 그 세 이해한 얼굴을 했다.
“공주가 낮을 가려 그러니 그대가 이해하라.”
미안하다는 듯한 말투에 나는 기분 이 묘해졌다.
그, 상대방은 왜 그러냐는 물음을 기대한 것 같은데 말이에요.
'애초에 내가 이름도 못 부르게 할 만큼 까칠할 것 같나고.'
선유가 있는 자리에서 그렇게 말할 수 없어 엄마를 째려보자 엄마가 웃 었다.
“공주를 많이 아끼시는군요.” 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리니 선유가 꼭 그 말투 와 닮은 눈을 하고 웃고 있었다. “아까 제게 이유를 물으셨지요.”
하지만 곧 그는 가법게 말을 이있 다. 언뜻 홀가분해 보일 정도의 말투였 다.
“이유는 그저 그것입니다. 폐하께 서 변하신 만큼, 저 또한 변했을
“황후.”
“떠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이 자리는 제게 어울리지 않을 뿐입 니다."
갑자기 급속도로 냉각된 분위기에 나는 슬쩍 눈치를 봤다.
둘이 아침부터 대화를 나눴던 내용 인 듯한데.
이거 내가 들어도 되는 건가.
이야기가 이어지면 슬그머니 나갈 생각이었는데, 다행히도 둘 모두 내 존재를 잊지 않은 듯했다.
엄마가 한숨을 쉬더니 나를 안아 들었다.
그녀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나는 자연스레 전유의 얼굴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폐하.”
선유의 묵직한 목소리가 들리고, 그는 곧 방을 나섰다.
품에 안긴 나는 그제야 한숨을 푹 내쉬었다.
“대체 무슨 일이랍니까.”
나를 의자에 앉힌 엄마가 한숨처럼 대답했다.
•••자신을 폐위시켜 달라 하더구
나.” 그건 믿기 어려운 일이었다.
선유는 엄마를 사랑할 텐데?
“어째서요?” 황후라는 직위만큼 황제인 그녀와
가까운 것은 없다.
특별히 총애하는 후궁이 없는 엄마 이니 더더욱.
황제가 총애하는 후궁은 그 이능이 도움이 되기 때문.
그러니 황후 자리를 꿰찬 만큼 선 유의 이능은 중요하고 꼭 필요할 것 이다.
불안해졌다. 자꾸 예상할 수 없는 것들이 늘어난다.
기윤이 황제를 죽이려는 것도, 원 작에는 없었던 황후의 등장도, 그 황후가 스스로 폐위되기를 원하는 것도.
꼭 더는 황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 람들 같잖아.
“이능이 약해지고 있는 것 같아
요.”
나도 모르게, 나는 그렇게 중얼거 렸다. 그리고 조금 충격받았다.
그러게. 그런 거 아닌가?
유리가 서라국에 온 것은 서 대륙 에 발생한 정체 모를 마력 고갈 때 문이다.
황실의 결계 또한 흐트러졌고, 기 윤은 황제를 죽이려 하고 황후인 선 는 폐위를 원한다.
이능에, 용의 힘에 문제가 생긴 것 아닌가?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서 대륙이 그렇듯, 동 대륙의 서라 국도 이능은 일상에 큰 부분을 차지 하고 있다. 만약 이능이 다 없어진다면 문제가 심각할 거야.
하지만 반대로, 이능이 없어진다면 더 이상 귀족들에게 쩔쩔맬 이유도 없어지는데.
아니, 일단 이게 맞는 거야?
다급하게 엄마를 올려다보자 그녀 가 대답했다.
“아, 그렇지.”
너무 태연한 대답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입만 뻐끔대던 나는 간신히 목소리 를 냈다.
•••알고 계셨습니까?”
믿을 수 없다는 내 질문에 엄마가 이상하다는 듯한 얼굴을 하며 고개 를 끄덕였다.
뭐야. 그게 왜 그렇게나 당연한 대 답이야?
데자뷰였다. 이거 내가 이능 없는 거 알고 있었냐고 물었을 때도 딱 이런 느낌이었는데.
“아륜 중에 종종 나라 전체의 이능 이 흔들릴 때가 있으니 말이다.”
내 당황스러운 얼굴에 엄마가 차근 히 설명을 해 주었다.
“이능을 실현케 하는 용의 힘은 마 지 물과 같아서, 한 곳에서 끌어다 쓰면 필히 다른 곳에서는 부족해지 고 말지.”
그걸 반대로 생각하면, 이번에 이 능이 부족해진 건 후에 그게 쓸 일 이 있다는 걸까?
“이번 해에는 아기씨가 찾아올 것 이라는 의미란다.”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엄마가 말을 이었다.
“복사꽃이 피면 나타난다는 그 아 이 말입니까?”
“그래.”
그 해에 풍년을 가져다준다는 정체 불명의 아이.
그러고 보니 그렇구나. 그 기현상 도 당연하게 용의 힘이겠네.
한 해 동안 풍년을 가져올 정도의 이능이니, 잠시 부족해질 만도 하다. 잠시 기윤이 처리되서 기뻐해야 하 나, 나라가 망하게 돼서 슬퍼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던 나는 조금 민망해졌다.
역시 사람은 입을 함부로 놀리면 안 돼.
입 밖으로 꺼냈어 봐. 더 민망했
“그래서, 황후 폐하의 이능이 무엇 이기에 폐위되면 곤란한 건가요?” 슬그머니 말을 돌려 물었다. 잠시 딴 길로 샜지만, 오늘 내 용건은 이 것이었다.
“말소(抹消)이지. 황궁의 결계를 만드는 그 이능 말이다.”
엄마는 이번에도 순순히 대답해 주 었다. 그렇지만 내가 생각한 대답은 아니 있다.
“말소라고요?”
의아하게 되묻자 엄마가 고개를 끄 덕였다.
“하지만 그 빼앗은 이능이 여의주 에 담기는 것 같았는데•• “그 또한 맞을 수도 있겠구나.”
맞으면 맞는 거지, 맞을 수도 있겠 다는 건 또 뭐야.
그런 눈빛으로 엄마를 째려보자 엄 마가 설명을 이어 갔다.
“모든 이능은 결국 용의 힘이니, 그 힘을 빼앗아 소멸시킨다 하여도 결국 그 본체에게 돌아가는 것이지. 여의주는 용의 심장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그러면, 그 빼앗은 이능은 그저 그대로 사라지는 건가요?”
“그건 아닐 것이다. 이능을 빼앗긴 이들도 황궁 안에 오래 머물거나 결 계를 나서면 이능이 차오르지 않느
나.” 아, 그러게. 생각해 보니 그랬다. 황궁의 결계 는 평생토록 그 힘을 빼앗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서 대륙의 아티팩트 와 다르구나.'
아티팩트는 평생 압수라면, 여의주 는 대여 서비스 정도•••
그러면 아티팩트로도 못 써먹는다 는 의미잖아.
내심 먼치킨이 될 꿈에 부풀어 있 있던가. 깨진 꿈이 아팠다.
나는 시무룩하게 어깨를 늘어트리 려다 번쩍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황후 폐하가 떠나시고 나 서도 황궁의 결계가 꽤나 오래 유지 되지 않았습니까.” 뜬금없는 내 말에 엄마가 의아하다 는 얼굴을 했다.
나는 답답함에 발을 동동 구르며 설명했다.
“이능은 의지로 실현되고, 그 의지 와 함께 사라지지 않습니까. 헌데 어찌 황후 폐하께서는 그 결계를 그 리도 오래 유지하셨을까요?”
그러니까, 자신의 이능을 여의주에 불어넣어 아티팩트를 만들었다면? 그러면 가능성이라도 있는 것 아닐 까?
“그러니 어쩌면, 여의주에 이능을 저장해 두셨다는•••
“어미 또한 그것이 의문이었단다. 지금껏 소연 가의 비들이 한시도 빠 짐없이 이능을 시전하였으니, 그 잔 재가 황궁에 고여 있었던 모양이더 구나."
엄마가 아주 태연하게 내 부푼 꿈 을 터트렸다.
그러니까 이유는 모르지만, 아마 한 수백 년쯤 이능을 부으면 아티팩 트를 만들 수도 있다•••
거참 퍽이나 쓸모가 있겠군.
나는 숙연히 고개를 숙였다.
'좋다 말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