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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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둘, 셋. 정적이 벌떡 일어난 가람에 의해 깨졌다. “독살이다!” 어? 누구?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다 들 멀쩡했다. 좀 놀란 얼굴이었을
입을 벌린 채 눈을 깜빡이자 가람 이 빠른 걸음으로 내게 다가와 양 뺨을 쥐었다. 토실토실한 볼살이 눌리며 시야가 가늘어졌다.
“지금까지 먹은 것 말해 봐. 아침에 뭐 먹었어? 평소랑 다른 음식이라거 나, 맛이 다른 것 같은 거 말이야.” 아니야, 미친놈아!
말을 하고 싶어도 양 볼이 붕어처 럼 눌려 있는 터라 으우우우, 하는 소리밖에 나오지 않았다.
나는 팔다리를 퍼덕거리며 가람을 퍽퍽 때렸다.
“이 미친 작자가. 아이가 멀쩡히 살 아 있는데 무슨 불길한 소릴!” 미리내가 버럭 소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성큼성큼 내려 와 내 양 뺨을 붙드는 것이 가람과 똑같았다.
절박한 눈과 마주치게 된 나는 일 굴을 구겼다.
믿는 거 맞아?
내 얼굴이 씩어가거나 말거나, 미리 내가 작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노래를 부르면 발휘되는, 꽤나 동화 적인 방법으로 발동되는 그의 이능 이었다.
억만금을 주고도 받을 수 없는 용 의 치유력을 몸소 체험하면서도 나 는 뚱한 얼굴을 했다.
그런 내 얼굴을 미리내가 걱정스러 운 듯 살폈다.
“여전히 아프니?” 잠깐이라도 널 구세주로 여긴 과거 의 나, 죽어라. “안 아파요.”
“그럼 혹시•••
“정신적인 것도 아니고, 독살도 아 니고, 꾀병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 에요. 난 멀쩡하다고요!” 그냥 내가 애교 좀 부릴 수도 있지   이렇게 유난이야!
짜증이 치밀어 이를 갈며 외치자 그제야 모두의 얼굴에 안도가 스쳤
다.
내가 한숨을 푹 내쉬자 가람과 미 리내가 실없이 웃었다.
그러고는 서로를 바라보며 얼굴을 팩 구겼다.
미리내는 나를 번쩍 들어 안았고, 가람은 미처 줍지 못한 고구마 포대 를 들어 올렸다.
하지만 둘 다 제자리로 가지 못하 고 예화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예화가 시선을 내게 돌렸고, 그녀가 속을 알 수 없는 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지레 긴장해 침을 삼켰다.
•••안 해 줄 거야?
나 혀 짧은 소리까지 했는데?
1- 0
1- 도르록 굴리자 예화가 한숨처 럼 웃었다. 허탈한 웃음이었다.
뭐야. 왜 웃어.
“가지고 싶었느냐?”
예화가 웃음기를 숨기지 못하고 내 게 물었다.
괜히 비웃는 것 같아 기분이 미묘 했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려다 말고 깨달았다.
아, 맞아. 컨셉.
공물이 갖고 싶어 막무가내로 떼쓴 꼬맹이로 돌아간 나는 손끝을 꼼지 락대며 풀 죽은 목소리로 답했다.
어린아이같이 들리게 발음도 '네' 보다는 '녜'에 가깝게 말했다. 그리고 속으론 이를 갈았다.
'이거 두 번은 못 해 먹겠다.' 그런 나를 보고 웃음을 터트린 예 화가 사신에게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아까의 무표정이었지만, 연 하게 단식 섞인 웃음기가 돌0갔다.
•••멀리서 온 사신을 문전박대할 수야 없지.” 그 말에 희비가 갈렸다. 서 대륙의 사신들은 얼굴이 폈고, 황제의 왼편.
그러니까 나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대신들은 경악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예화는 제 곁에

서 있는 대감에게 명령했다. “귀인들의 처소를 안내해라.” “하오나 폐하!”
“공주의 청이다.” 무표정하던 예화의 눈동자에 번뜩 이채가 돌았다.
항의하려던 대신이 찔끔 놀라 입을 다물었다.
“짐의 딸이 짐에게 청하지 않았느
장내가 싸늘해졌다. 대부분의 사람
들의 눈에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의 눈빛이 서리는 것을 본 나는 조금 부끄러웠다.
이이가 없다는 듯이 입을 뻐끔대던 대신이 내게 시선을 돌렸다.
어떻게든 나를 달래려는 울먹이는 시선이었지만, 나는 그 시선을 슬그 머니 피했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분명 제게 감사하실걸요. “공주, 이리 오거라.”
예화가 나를 불렀고, 미리내가 나를 땅에 내려 주었다. 나는 치맛자락을 잡고 단상에 올라 그녀의 앞에 섰다.
옥좌를 가까이서 보니 엄청나게 크 고 번쩍번쩍했다.
왜 불렀냐는 의미를 담아 그녀를 빤히 보고 있자니 예화가 어정쩡하 게 내게 두 손을 뻗었다.
그러니까•••••• 안아 준다는 건가?
그냥 담쏙 안아다 무릎에 앉혀도 난 별말 못 할 텐데.
배려해 주는 게 고맙기도 하고, 내 가 그렇게까지 싫어했나 싶어 괜히 미안했다.
사람들 앞이라 좀 쑥스럽긴 한데.
= 괜히 뒤를 힐끔 돌아보던 나는 팔을 예화에게 뻗었다.
그러자 그녀가 활짝 웃으며 나를 안아 들었다.
하도 잘 먹어 꽤 무거울 텐데도 나 는 번쩍 들렸다.
우리 아가가 웬일로 어미에게 부 탁을 다 하고.”
다정하게 이르는 목소리가 얼마나 뿌듯해하는지, 누가 보면 내가 뭐라 도 해 준 것 같았다.
황제의 말은 무겁다. 하지만 그녀는 나를 위해 제 말을 번복했다.
분명 번거로울 테고, 무작정 갖고 싶다 떼쓴 것이니 타이를 수도 있었 을 텐데 예화는 모두 들어주고는 때 쓴 것도 잘했다며 활짝 웃었다.
“그래도 이번 한 번뿐이다. 이리 넘 이가는 것은 또 없어.” 단호하게 말하려는 듯하지만 참 신 빙성이 없었다.
나는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 다.
이린에들 하고 싶다는 거 다 들어 주면 버릇 나빠지는데.
그래도 괜찮을 만큼 날 오나오나 기우려는 건지.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무조건적인 사랑인 그것에 미묘한 기분이 들었 다.
내가 월 했다고 날 이렇게 좋아하 나 싶다가도, 정말 날 딸이라고 생각 하는구나 싶어서.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우물대 자 예화가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 었다.
가서 놀거라, 하고 예화가 나- 己 노죠 아주었다.
돌아가자마자 가람이 들고 있던 포 대를 가져와 품에 안았다.
절대 잊으면 안 되지. 내가 口2'  까지 했는데.
자리에 앉은 나는 고개를 들어 예 화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느새 잔잔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 미소는 언뜻 보면 다정했지만,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이 조금만 자 세히 보면 금세 보였다.
살아 있는 것 같지가 않은 무미건 조한 얼굴.
이제는 저게 원래 그녀의 얼굴이라 는 걸 안다.
“서라국에 온 것을 환영하오. 허
드럽게 웃으며 말하던 예화가 일 순 표정을 굳혔다.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 지만 가만히 응시하는 눈동자가 뱀 같0갔다.
“그대들이 무사히 이 나라에 머무 는 것이 공주의 아량임을 언제나 명 심하길 바라.”
“환영해 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폐하.”
능글맞은 목소리로 대답한 공작이 이번엔 내게 고개를 돌렸다.
번드르르한 금빛 눈동자가 생긋 휘 어졌다.
“공주 전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플린트는 반드시 전하께 오늘의 은 해를 갚을 것임을 맹세드립니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가 퍽 다정했 다.
혹시라도 내가 자신들을 가없게 여 겨 고구마를 핑계로 남게 해 주었다 고 생각하는 걸까.
'저런. 아닌데•••
내가 그렇게까지 무골호인이 아닐 뿐더러, 공작은 구렸다. 아주, 굉장히 구렸다.
사람에게는 촉이라는 것이 있고, 그 촉은 인생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한 판단이었기에 마냥 무시하기란 어려 웠다.
그런 거 있잖아. 괜히 찜찜한 사람. '처음 봤을 때부터 맘에 안 들었어.' 아니, 이건 단순히 나만의 촉도 아 닐 것이다.
은연중에 계속해서 드러나는 제 나 라의 말투와 예법.
당당하지 못할 상황에 당당하니 도 리어 멍청해 보이기까지 하는 태도.
나와 예화에게 감사하면서도 마지 자신이 잘나 남은 듯이 어깨를 쭉 펴는 것도 좋아 보이지 않았다.
만약 고구마를 안 가져왔으면 내가 먼저 꺼지라고 등을 떠밀었을 거다. '내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당분간 황궁에 머물 테니, 예의주시 해야겠어.
그를 가만히 뜯어보고 있자니, 옆에 서 시선이 느껴졌다. “이게 맘에 들어, 산야?”
가람이 묘하게 들뜬 목소리로 물었 다.
그 말에 내 관심이 공작에게서 품 에 안고 있던 포대 자루로 향했다.
나는 고양이를 쓰다듬듯 고구마를 쓰다듬으며 가만히 생각했다.
마음에 들었냐고? 그렇다기보
'최고지.' 여면 어디 있어.
주위를 한 번 둘러보자 금세 그녀 가 보였다.
여면은 경악과 놀람이 섞인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따, 봐요.'
입 모양으로 또박또박 말해 준 나 는 다시 가람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 끄덕했다.
크으, 가람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심장을 부여잡았다. 이런 것 하나에도 기뻐하다니, 참 소박한 사람이었다.
오늘 내 양심이 자주 아팠다.
예화도 그렇고, 가람도 그렇고.
조금 잘해 준 것 가지고 저렇게나 좋아하는데 내가 너무 매정했나 싶 었다.
싫어서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안 친 해서 좀 불편했을 뿐이었는데.
나는 애잔하게 그를 바라보다가 어 깨를 토닥였다.
가람은 왜 위로받는지도 모르고 좋 다고 또 헤벌쭉 웃었다. “비익조 보여 줄까?” 아니, 그건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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