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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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는 네가 볼 필요 없는 것들 이란다. 길고 지루한 기억들이거
그는 꼭 다른 사람의 일을 말하듯 이 덤덤히 말을 이었다.
'네가 본 기억의 마지막부터 지금 까지, 나는 이곳에 있었어.
그 덤덤함이 깊은 심해 같아서,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숨이 덕 막혔 다.
초대 황제인 아륜이 죽은 시기는 까마득한 옛날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 아무것도 없는 동굴에서.
'이곳에 남아서, 돌아올 그 에를 기다리고 있단다.”
용이 반짝이는 구슬 속의 소녀에게 시선을 돌렸다. 용의 눈동자는 애정 한 톨 없이 공허했다.
“그 뒤의 기억은 너무 길고 단조 로워서, 아직 서른 해도 살지 못한
네가 본다면 정신이 온전치 못할 테 니 널 미리 꺼내 온 날 원망하지 마렴."
나는 대체 무어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본 기억들은 끔찍했다. 하지 만 그와 별개로 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 비극에 덤덤하고, 자신을 그렇 게 만든 사람을 여전히 기다린다 고?
“네가 찾던 답이 아니었니?”
용이 고개를 가웃했다. 태연한 물 음이었다. 나는 힘겹게 고개를 끄
덕였다.
“이건•••••• 당신의, 삶이잖아요.”
자마 어떠한 수식어를 붙일 수가 없었다.
비극이나 절망보다도 더 가혹했 다.
용은 황제를 사랑하고 헌신했다 는 이유만으로 끔찍하게 이용당했 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단순히 누군가가 말해 주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서라국의 역사서 그 어디에도, 이 이야기는 적혀 있지 않았으니까.
그저 용이 연인의 죽음에 슬퍼하며 나라를 떠났다는 것으로만 기록되어 있는 그의 실종.
우리의 나라가 그 덕에 풍요로워졌 으면서, 정작 그의 비극은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았다. 황제가, 그가 그토록 사랑하는 아 륜이 그렇게 만들었다.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황제를 기 다린다고 말할 수가 있지?
“당신은 정말로, 고작 내 질문에 대답해 주려고 저 기억들을 보여 준 건가요?”
내가 첫 구슬을 건드렸을 때, 용 은 오랜만에 잊었던 기억을 보았 다고 했다.
그러니 내가 저 구슬들의 기억을 보았던 것처럼, 용도 제 과거를 다 시 마주해아 했을 텐데. “어떻게, 당신은 이렇게•••  침착할 수가 있나요?
차마 이어지지 못한 물음이 목 끝에 맴돌았다. 용은 그 명성이 무색하게 인간과 다를 것이 없었다.
웃고, 슬퍼하고, 화를 냈다. 엄청 난 힘을 가졌다는 것을 빼고는 인 간과 똑같았다.
기억을 모두 보았다면 내가 미쳐 비렸을 거라는 그의 말처럼, 용 또 한 그랬을 텐데. 내 물음에 용은 흐리게 웃었다. “그래, 그랬지.”
“제정신으로는 버틸 수 없는 세월 이었지•••
우는 듯도 하고 웃는 듯도 한 목 소리가 작게 새어 나왔다.
“내가 왜 아륜을 기다리는지 의아 하니?"
“그 아이를 계속 미워하기에는, 아 마도 내 삶이 너무 길었던 모양이
“원망을 계속, 계속 곱씹었던 것도 같은데•••••• 그것마저도 점점 흐려져 서 이젠 생각나지 않아.”
용은 마치 자신의 삶이 아닌 제삼 자의 위지에서 관망하듯이 말했다.
하지만 내가 느끼기엔, 그것이 전 부가 아니었다.
그 긴 세월에서 어떻게 제정신을 유지했는지 알 수 없었다.
“죽을 수도 없는 삶에서 그래도 그 애가 있다면 괜찮을 것 같았
어.”
그런데 어쩌면.
“저 기억들을, 과거에는 아주 아 꼈던 것도 같아.” 어쩌면 당신은, 이미.
“내 증오에 침식당하지 않으려 아 껴 두었는지•••••• 아니면 그저 꼴도 보기 싫어 머릿속에서 밀어내었는 둘 중 하나일 거야. 어쩌면 아예 다른 것일지도 모르고. 용이 웃었 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으니, 알 수가 없구나.”
뒤의 기억들을 모두 본다면 제정 신일 수 없을 거라던 용의 말.
그건 추측이 아니었다.
그 긴 세월 속에서, 이미 미쳐 비 린 거야.
자리에 주저앉은 용이 제 무릎을 끌어안았다. 이 동굴에 발을 들였을 때, 처음 마주했던 그 아이 같은 모 습이었다.
“그런데, 기다리는 것만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질 않아.”
“다시 돌아온다고 했으니, 이번엔 내게 먼저 와 주겠지, 했는데•••
“이번에도 나는 그 애를 만나지 못 하겠네.
그렇게 중얼거리는 용은 조금 쓸쓸 해 보였다.
그 감정이 소름 끼쳤다.
용에게 사랑은 저주 같았다.
아륜은 자신을 이용하고 끔찍한 지 옥 속으로 처넣은 사람이다.
그 모든 것들을 잃게 한 사람인 데, 그런 사람을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들을 살릴 수 있는 힘을 가진 대가일까?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 잔인하 잖아.
“네 나라에 퍼져 있는 이능은 내 명과 이어져 있단다.”
아이와 성인의 모호한 경계에서, 용이 말했다.
“시간이 오래, 아주 오래 지났으 나•
“이제야 내가 안식에 들 수 있나 보구나.” 그 말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용이 죽어 가고 있구나.
당신도 결국 한 생명이니, 그 지 난한 삶을 버티고는 결국 죽는구 나.
나는 그걸 기뻐할 수도, 슬퍼할 수도 없었다.
힘든 삶을 살았던 당신이 마침내 죽는다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데.
당신이 죽고 이능이 사라지면 내 나라가 휘청일 거라는 사실에 차 마 그릴 수가 없다.
지금껏 이능을 쓸 수 있었던 것 이 모두 용의 희생이었다.
그러니 거둬 간다 하더라도 지금 까지의 역사에나 감사해아지, 더 아쉬워해서는 안 된다.
그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릴 수가 없었다.
용을 지독하게 이용했던 초대 황 제처럼, 나 또한 황족이었으니까.
나라를 책임져야 하는 자리에 앉 은 사람이니까.
“또 의아한 것이 남았니? 아, 하 나 있겠지.”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용 은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아륜인 줄 알았어. 그래서 잠시 착각했었다.”
나는 그 말을 금세 이해했다. 이 동굴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 용은 나를 아륜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너는 날 알아보지 못하더
라.”
아륜이라면 그럴 리가 없지. 단숨 에 날 알아볼 텐데.
무릎에 얼굴을 묻은 용이 웅얼거 렸다. 그러다 딱 멈췄다. “너는 유난히, 아륜과 닮아서
서글픈 중얼거림에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그래. 용의 말이 맞았다. 나는 조 대 황제와 닮았다.
내 백성들을 위한다는 이유로 당 신의 아픔을 외면하려 했다는 것 이, 거울처럼 닮아 있었다. “아가, 이제 돌아가렴.” 그런 나를 까맣게 모른 용이 다 정하게 말을 걸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때 에, 어서 돌아가.  애써 지킨 종잇장 같은 다정함이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도 차마 그 말을 따를 수 없이 가만히 서 있자, 웅얼거리던 용이 고개를 들었다.
흐리멍덩한 회색 눈동자와 눈이 마 주졌다.
“그런데 너, 내 이름을 들이 본 적 이 있니?”
아까와 비교되지 않을 만큼 흐려진 눈빛이 나를 바라보았다.
꼭 길 잃은 아이처럼 들리다가, 이내 고개를 내젓는다. “난 기억이 안 나.”
“어쩌면, 없었을 수도 있고••
아륜이 불러 주었었는데. 내 착각 이었던 걸까?
울먹이던 용이 다시 고개를 들있
다.
“아륜의 후손아. 너는 내 이름  아니?"
나는 그 간단한 물음에 대답할 수 가 없었다.
황제를 축복해 나라를 세우고, 나 라의 기반이 되는 이능을 퍼트린 위 대한 용.
그런 용의 이름인데도,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기에.
용은 홀연히 사라졌다.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몇 발짝을 떼기도 전에 모습이 회 미해졌다.
반짝이는 구슬들이 가득한 방 안 에서, 멍하니 앉아 있던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엄마에게 이능이 있으니,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무슨 조치를 취한 다면-
그 순간, 떠다니던 구슬 하나가 내게 떠밀려 왔다. 투명한 구슬에 검은 머리카락의 여인이 비겼다.
그녀가 당연히 황제일 거라 생각 했던 나는 그를 마주하고 깜짝 놀 라고 말았다.
내가 기억을 읽은 여파인지, 구슬 은 투명해져 있었다. 거울처럼 비 친 것은 나였다.
황망한 일굴 위로 환하게 웃고 있던 초대 황제의 얼굴이 덧씌우대 졌다.
못 박힌 듯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결국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건 아나.
어느 쪽이 내게, 그리고 다른 이 들에게 이익일지는 자명하다.
그렇지만 때로 세상에서는 이익 보다도 더한 가지가 있는 법이다. 아무리 황제는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이라고 해도, 이건 선을 넘었다.
조대 황제가 왜 그런 일을 했는 지 이해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녀가 한 일은 명백한 잘못이다.
똑같은 짓은 하지 말자.
이미 우리는 충분히 그를 희생시켰 으니까, 적어도 또 다른 잘못을 저 지르지는 말아야지.
나는 한숨을 재차 내쉬며 몸을 쭉 늘어트렸다. 여태 긴장하고 있던 몸 이 욱신거렸다.
'온 의미가 없었네, 결국.'
용을 달랠 생각이나 했지, 용이 죽는다면 아예 방법이라곤 없는 거다.
'그래도 괜찮을 거야.
어떻게든 방법은 있을 거다. 포기 하지 않는 한.
나는 이능이 없는 세계에 살았었 고, 그 세계는 지금 이 세계보다 더 발전된 세상이었다.
내가 그 세상 돌아가는 걸 모두 알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가능하다 는 의미겠지.
'그만 놓아줄 때가 됐어.'
혹시 이능이 사라져 나라가 망하 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한 가없은 이를 착취해 번영해 온 나라라면, 그 대가를 질 줄도 알아야지.
마음이 무겁기도 하고, 가법기도 했다.
헛웃음을 짓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 났다. 투명해진 구슬들이 달그락댔 다.
그 앞에 서 있는 용의 모습이 보 이는 것 같아, 잠시 시선이 머물렀 다.
나는 죽은 뒤 세계가 있다는 것 을 믿지 않았다.
흙으로 돌아갈 뿐인, 그렇게나 허 무한 것이 죽음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렇게 된다면, 용 은 그 허무를 곱씹지 않아도 되겠 지.
고생 많았어요. 자의는 아니었어 도, 지금까지 우릴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요.
이제 푹 쉬어요. 잠시 숙였던 고개를 는 나는 숨 을 크게 쉬었다.
정말로 집에 돌아갈 시간이었다. “서라국의 황궁으로.” 나는 작게 중얼거리며 눈을 꾹 감았다. 그런데, 평소처럼 눈앞이 새하얘지지 않았다.
슬쩍 실눈을 떴더니 고동색의 흙 바닥이 보였다.
여전히 그 동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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