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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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결한 내 말에 방 안의 모두가 나를 바라보았다.
미묘하게 바뀐 눈빛. 내 대답을 아 니꼬워한다는 것이 노골적으로 드러 났다.
당연한 것을 불편해하는 그들의 태도가 나 또한 어이없었지만, 그
들은 한 번 더 나를 종용했다.
“드레스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나 요? 실바누스에서 제일가는 장인 이 만든 드레스입니다.”
“왕실의 어른께서 보내 주신 옷입 니다. 입지 않으시면 크게 화내실 거예요.”
마치 어린애를 달래는 듯한 말투였 다. 그 모습에 기가 찼다. 내가 고작 드레스 디자인이 마음 에 들지 않아 거부하겠어?
유리가 보냈다면 생각이라도 해 보려고 했는데, 그것도 아니라고.
“나는 실바누스에 사신으로 왔지, 신부나 볼모로 온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어찌 이곳의 복식을 입나 요?” 나는 이곳에서 내 나라를 대표한 다.
오늘 저녁에 열리는 파티가 나를 환영하는 파티가 아닐지라도 공식 적인 자리라는 것은 변하지 않을 사실.
그런 자리에서 내가 서 대륙의 복식을 입는다는 건, 그걸 권하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이다.
'나를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태연하게 드레스를 권한 작태가 가관이다.
“11년 전, 실바누스의 사신이 서 라국에 머물렀을 때도 그들은 실 바누스의 옷을 입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의 방식을 따르라 종용하지 않았으니까요.”
방문하는 나라의 예절을 아는 것 은 예의이지만 내 나라의 것을 비 리고 무조건적으로 맞추는 것은 옳지 않다.
“국왕 전하께서도 그 때 사절단으 로 서라국에 오셨으니 알고 계시 겠지요.”
“그러니 전하께서도, 너희가 말하 는 그 '왕실 어른'께서도 내 .까'曰0  이해하실 거라 믿겠습니다." 단호한 대답에 방 안이 싸늘해졌 다. 하녀들은 눈치를 봤고, 시녀들 은 불만스러운 눈빛을 했다.
“그건 서라국의 일이지요. 이곳은 실바누스입니다."
그중에서도 대놓고 나를 쏘아보 던 시녀, 힐데는 고개를 내저었다.
“실바누스에서는 누구도 그런  을 입지 않습니다. 그런데 국왕 전 하의 손님이신 태자께서 어찌 그
나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경 멸스럽다는 얼굴과 날카로운 말투 에서 힐데가 삼킨 말이 들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감히 네가 뭐라고 내 나라의 것 을 무시해.
“너희가 감히 나를 강제하겠다는 말이냐?”
그 말이 끝나자마자 시녀들의 일 굴이 하얗게 질렸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그들 이 몇 번 거칠게 숨을 쉬더니 목 을 부여잡았다.
언령을 사용하다 보니 간혹 통제 가 되지 않을 때가 있었는데, 지금 이 그랬다.
그대로 놔두고 싶었지만 죽게 둘 수는 없어 나는 한숨을 내쉬고는 그들을 풀이 주었다.
“허억, 헉•••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 쉬는 시녀들을 내려다보았다. “연회가 몇 시에 있느냐?”
여상한 질문에 세레나가 고개를 들 었다. 억울하다는 눈빛에 나는 비스 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어찌 그리 보는 것이야?”
나는 같잖은 존대를 집어치웠다. 꽤 오랜 시간을 떠받들어 살아서 그 런지 목소리가 퍽 고압적이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세레나가 깜 짝 놀라 고개를 내렸다.
“여, 여섯 시입니다.”
여섯 시. 그럼 몇 시간 남은 거 지?
서라국과 시간 단위가 달라서 햇 갈린다. 나는 전생의 기억을 더듬 으며 벽에 걸린 시계로 시선을 돌 렸다.
작은 바늘이 2를 향하고, 큰 바 늘이 12를 향해 있다. 두 시네.
“내 시중을 들어 줄 시녀는 필요 없는 것 같구나.”
네 시간이면 혼자서도 충분히 준 비하겠지.
무엇보다 이 사람들 손에 나를 맡기고 싶지가 않다.
“하지만, 전하•••
“나는 두 번 말하는 것을 좋아하 지 않아.”
우물쭈물 반박하려던 세레나가 입을 다물고 제 동료들을 일으켰
다. 힐데는 할 말이 많아 보였지 만, 방금의 타격이 컸는지 얌전히 입을 다물고 방을 나섰다.
하녀들이 들고 들어온 장신구와 옷 까지 모두 지웠다. 그제야 방 안이 평온해졌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랜만에 혼자 씻겠네.
한참 뒤, 나는 기진맥진한 모습으 로 욕실에서 나왔다.
서라국에서도 내 몸을 씻어 본 적 이 없는데,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하나도 모르는 타국에서 씻으려니 더욱 힘들었다.
'머리 감느라 죽는 줄 알았어.
내 머리카락은 늘 궁녀들이 잘 관리해 줘서 잊고 있었지만, 엄청 나게 길고 숱도 많았다.
이걸 혼자 감으려니 시간이 엄청 나게 걸렸다.
그래도 어찌 저찌 씻고 나왔지만, 내 고난은 끝이 아니었다. '이거 어떻게 말려.'
두꺼운 수건으로 칭칭 감았더니 목 이 꽤 뻐근했다. 나는 침의만 입은 채 의자에 털썩 걸터앉았다.
이능을 함부로 소진하면 안 되는 상황인 탓에 씻을 때도 어떻게든 내 힘으로 끝냈는데, 머리를 말리는 건 정말••••••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능을 써야 할까, 하고 고민할 찰나에 누군가 내 방문을 두드렸 다.
“도움이 필요 없다고 말하지 않았 느나?”
내가 몸의 힘듦에 넘어갈 것 같 아 부러 날카롭게 말하자 조용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고운입니다, 전하.” 아, 이런.
들어와, 고운.”
내 승낙에 고운이 들어왔다. 나는 그에게 미안하다는 얼굴로 웃어 주었다. “미안해. 너인 줄 몰랐어.” “괜찮습니다.” 그래, 그런데•••
“웬 수건이야?”
고운은 흰 수건 여러 장을 들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뽀송뽀송해 보이는 질 좋은 수건.
마침 수건을 거의 다 쓰긴 했지 만 다 씻었으니 괜찮은데. “시중을 들어 드리려 왔습니다.” 고운이 담담히 대답했다.
나는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머리를 스스로 말리기 힘겨우실 듯하여.”
“할 수 있어?”
고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자 도, 마호 가의 가주도 교육 과정에 누군가의 머리 말리는 법이 들어 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는데.
그러고 보니 떠나기 며칠 전 고 운이 궁녀들과 잠시 어울리기는 했었다.
“서연에게 배웠니?”
고운은 그렇게 무뚝뚝하게 답하 면서도 두 손에 수건을 든 채 내 머리를 말릴 준비를 마쳐 두었다.
그 모습에 나는 나도 모르게 웃  음을 터트렸다. “그래, 그럼 도와줄래?”
머리카락을 감싼 수7닌을 풀자 고 운이 내 등 뒤로 왔다.
그리고 이내 수건으로 한 겹 감 싸진 손길이 내 머리를 말리기 시 작했다.
궁에서는 궁녀 여럿이 붙어 말리 던 머리라 잘 말릴 수 있나 반신 반의했는데, 고운의 솜씨는 훌륭했 다.
조금도 엉기지 않게 살살 매만지 는데, 투박하게 큰 손으로도 얼마 나 섬세한지 몰랐다.
그 능숙한 솜씨에 잠이라도 己己  와야 정상인데, 나는 따뜻한 물로 씻어 노곤해진 몸이 더 깨어나는 것 같았다.
그 1- 소 1-01丁피巨파고든다. 머리가 락이 스치는 소리와 손의 감촉이 적 나라하게 느껴졌다. 그에 나는 잠시 잊고 있었던 화 제를 떠올려야만 했다.
맞아. 나 얘한테 설렜었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더는 대연하 게 감탄이나 하고 있을 수가 없었 다.
그 복잡 미묘한 감정 속에서 나는 작잡해졌다.
'난 쟤를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지.'
설렌다는 감정과 좋아한다는 감 정을 일치시길 수 있을까?
고운의 행동에 떨리기는 했지만, 고운을 이성으로 좋아하냐고 묻는다
'잘 모르겠어.' 아닌가? 떨리면 좋아하는 건가?
내가 좋아하는 건가. 쟤를? '잘생겨서 그런 거 아나?'
하지만 역시 그렇다기엔 세상엔 잘생긴 사람이 너무 많다. 방 금 본 유리도 훤칠하니 잘생긴 미 남이었다.
'내 취향이 고운인 건가.' 아, 이렇게 생각하면 다시 고민은 원점이다. 쓰레기인 나.
그리고 그 순간, 나는 화드득 놀 라 몸을 떨었다.
뒷목을 지그시 쓰는 손길이 느껴 졌다. 흔적을 남기듯 진득한 손길 이었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고운이 조금 커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왜?”
뭐야?
갑자기 뭔데?
•••송구합니다. 무언가 묻어 있 기에.”
고운은 잠시 놀란 듯하더니 이내 그렇게 대답했다. 나는 일떨떨히 고 개를 끄덕였다.
“어. 고마워.”
고개를 돌리자 고운이 다시 내 머 리카락을 말리기 시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머릿속은 모 든 생각들이 뒤죽박죽 섞여 비린 뒤 였다.
'뭐야, 쟤?'
마구 섞여 버린 생각들이 의심이 되어 무섭게 질주했다.
내 목 뒤에 뭐가 묻었다고? 나 방 금 씻고 나왔는데?
조금 늦은 저 대답이 왜 변명 같 이 들릴까. 갑자기 내 목은 왜 만진 거지?
목숨과 직결된 연한 피부에 거친 감촉이 생생했다. 손으로 쓸었을 뿐 인데 자국이 남아 있을 것만 같았 다. 어떠한 함의도 없는 손길이었다고, 저게?
•••내가 지금 혼자서 무슨 생각
나는 의식적으로 뻗어나가는 생각 을 움켜쥐었다.
상상이 과해. 정말 과하다. 이건 의심이 아니라 내 생각이 맞 다고 합리화하는 것 같잖아.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나는 일순 숨 을 멈췄다.
•••왜 그렇게 합리화를 해?
고운이 내 목을 만진 것에 그런 이유가 있는 게 내게 무슨 이득이 있어서?
'진짜 좋아하나?!' 나는 하마터면 얼굴을 감싸쥐고 고 개를 숙일 뻔 했다.
아, 미치겠다. 진짜.
심장 뛰는 소리가 북소리처럼 들렸 다. 고요한 방 안에 다 들릴 것 같 았다.
나는 숨을 가다듬었다.
나중에, 나중에 생각하자. 지금 내 가 열어 보기에는 버거운 감정이다.
이 먼 곳까지 와서 뭐 하는 거야. 정신 자려야지.
당장 오늘 저녁에 파티에 가야 한다. 내게 호의적인 사람이라곤 유리뿐일 것이 분명한 곳에. 그 생각은 제법 효과가 있어서, 마음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머리가 얼추 말라 가는지 고운의 손길이 느려졌다. 약간 심장이 뛰 는 것을 느끼며, 나는 입을 열었
다.
“나 잘할 수 있을까?" 막연한 두려움이 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적의를 마
주하고. 미지의 무언가를 찾아내야만 한 다는.
“뜻대로 하십시오.” 고저 없는 목소리. 머리칼을 매만 지는 손길이 다정했다.
“곁에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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