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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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반격에 고운이 생각에 잠겼다.
침묵이 오래 이어지는 모습을 보고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고운은 평소에도 워낙 호불호가 없 는 성격이었다.
옷의 재질이 무명이든 비단이든,
밥이 쌀밥이든 잡곡이든.
주는 대로 먹었고 입는 대로 입있 다. 꼭 욕구가 없는 사람인 것 같았
다.
그나마 단 걸 조금 좋아하긴 하지 만 그마저도 먹고 싶다고 먼저 표현 한 적이 없었다.
좋아하는 걸 모르니 싫어하는 걸 알 리가.
고운은 어떻게든 대답하고 싶은 듯 보였지만, 떠오르는 게 없는지 얼굴 이 울상이었다.
“괜찮아. 싫어하는 게 없으면 좋은 거지.”
그렇게 말하며 고운의 어깨를 토닥 였지만, 조금 걱정스럽긴 했다.
싫어하는 건 없어도 좋지만, 좋아 하는 건 있으면 좋겠는데.
네가 너무 조용한 것이 나는 때때 로 마음이 쓰인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볼 때 이런 기분인 건가•••
뜻밖의 역지사지를 느끼고 있는데, 고운이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덩치 큰 사내가 무섭습니다.” 멀대처럼 큰 그림자들 사이에 있었 던 고운이 할 말이라기엔 조금 우스 웠다. 하도 부대껴서 싫은 건가. 그릴 수 있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운의 설 명은 계속 이어졌다.
“자색 머리칼에 카는 칠 척이 넘 고, 가느다란 실눈을 한 사내입니
다.”
단순히 무언가라고 말하기에는 자 세한 설명.
나는 그에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 다.
고운은 단순히 성인 남자를 무서워 하는 게 아니었어.
“네 아버지구나.”
작게 중얼거린 말에 고운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어떻게 몰랐나 싶을 정도 로, 고운의 트라우마는 문득문득 튀 어나왔다.
이유 없이 싫어하는 게 있나는 질 문에 한참을 고민하다 대답한 것이 자길 학대한 아버지라니.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 손을 뻗 있고, 고운은 얌전히 내게 머리를 내어 주었다. 나는 그 머리를 살살 쓸어 주며 입을 열었다.
“고운. 그건 틀렸어. 년 이유가 없 는 게 아니잖아.”
“그렇습니까•••
장난스레 타박하는 말에 고운이 시 무룩해 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 던 나는 여상히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정말 두려워할 만한 사람은 맞니?”
고운이 고개를 들었다. 의아해하는 눈빛에 나는 빙긋 웃어 주었다.
“공포는 상대를 더 크게 만들거든.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은 맞지만, 네 가 생각하는 것만큼 절대로 벗어나 지 못할 만큼 강한 사람은 아닐 거 실제로도 그게 맞았다.
다른 이능을 생각할 것도 없이, 고 운은 이미 그에게서 탈출했고, 황궁 에서 나와 지내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내 말은 네가 그 사람 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물론 트라우마가 하루아침에 사라 지지 않는다는 건 안다.
어렸던 너에게 네 아버지가 얼마나 크고 대단해 보였는지도 알아.
그래도 이제 다시는 너를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인데, 계속해서 힘들어 하는 것이 싫었다. 내 말에 고운이 나와 눈을 맞췄다. 오묘한 시선이었다.
“실제로 다시 보면 생각보다 하찮 은 인간일 거야.”
부러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힘 주어 말할 필요도 없이 당연하게 1껴지도록.
시간이 해결해 주는 일들은 꽤 많 으니, 꾸준히 노력하다 보면 너도 괜찮아지겠지.
아무리 깊은 상처라도, 방지하지만 않는다면 모두 낫는 법이니.
고운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맹한 얼굴이 었다.
그래. 일단 네가 평안하면 됐지.
나는 웃으며 고운의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었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어제와 똑같은 짓을 조금 더 울상으로 하는 궁녀들을 물린 뒤 한 가득 쌓인 두루마리를 하나 집어 들 었다.
주르륵 읽어 내려간 나는 다른 걸 집어 들었고, 그걸 다 읽고 또 다른 걸 집어 들었다. 그걸 네 번쯤 한 나는 종이에서 순을 떼었다.
이 하고많은 상소들의 내용이 모두 똑같다는 건 조금 웃기고 이상했다. 제사 중에 난입해 아이를 달랬던 게 문제가 되어, 동궁에 상소가 빗 발겼다.
용께서 점지하신 아기님이니, 사실 내가 황궁의 핏줄이 맞았다느니 사 족이 길었다.
하지만 내가 상소라고 부른 만큼, 그 모든 찬양들의 결론은 모두 같았 다.
내가 그 아이를 좀 달랠 수 있는 것 같으니 그 애가 울음을 그칠 때 까지 내가 맡으라는 것.
내가 한 일은 그냥 적당히 토닥여 준 것뿐인데, 그게 뭐 대단하다고.
종이를 손으로 툭툭 지던 나는 문 득 생각난 것에 서연을 불러 물었 다.
“어마마마께서는 상소를 모두 읽으 셨는가?”
“예, 마마.”
혹시 나쁜 내용이 있을까 엄마가 한 번쯤 검수할 거라 생각했는데, 역시 그런 모양이다.
“뭐라 하시었나?”
웃음 어린 내 질문에 서연이 난처 하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몹시 대노하시어•••  그럴 줄 알았다.
- 혀를 찼다. 뭐라고 말했 을지도 대충 예상이 갔다.
얘도 어린데 무슨 아기를 맡기나 며, 제정신이냐는 이야기를 했겠지. 나도 완전히 아이를 떠맡는 건 사 양이다. 하루 종일 우는 아이가 동 궁에 있으면 다들 못 잘 거야.
그래도 아예 외면하기엔, 이 사람 들이 또 그런 제사나 지낼 것 같으 니.
하루에 한 번 정도는 달래러 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결론을 내린 나는 다시 문가로 시 선을 돌렸다.
“희사 있느냐.”
그 말에 문가에 보이는 그림자가 움찔 흔들렸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희사가 들어왔다.
희사는 태연한 적했지만 시무룩히 떨어진 어깨는 숨기지 못했다.
그 이유를 알아서 나-느1- 八그 그-口 天0 으 뻔했다. 내가 제일 많이 부르는 궁녀는 회 사였다.
서연과도 친하지만 서연은 상궁이 있고, 내게 깍듯이 예의를 갖추는 편이었으니까.
제일 친한 궁녀였는데, 그•••••• 때 쓰기 작전 때문에 내가 하루 종일 무시했으니.
'삐진 거지.' 물론 뼈졌다기보단 서운하다는 게 더 맞겠지만.
“반성은 좀 하였느나?”
장난스레 말을 건네자 희사의 눈이 울망해졌다. 세상 서럽다는 얼굴이 었다.
그러면서도 그렇다고 대답하는 모 습이 좀 귀여웠다.
“걱정해 준 것은 고맙구나. 허나 괜찮아.”
“하지만 마마.”
희사가 그 말에 퍼뜩 고개를 들었 다. 여전히 서러운 얼굴에 앙다물린 입술이 결연했다.
“마마께서는 언제나 괜찮다고 하시 잖아요.”
그 목소리가 생각보다 묵직해서 나 는 조금 놀랐다.
“제가 마마를 오래 되신 것은 아니 지만, 그래도 마마께서 입궁하셨을 때부터는 뫼시었는데. 한 번도 마마 께서 울거나 때를 쓰시는 걸 본 적 이 없습니다.”
희사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냈 다. 지금껏 어지간히 참아 왔던 것 같았다.
“제가 되바라지고 주제 넘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헌데 그것도 한 번 혼내지도 않으시고•••
오••• •. 나는 놀랍다는 듯 중얼거 렸다. “알고 있었구나?”
“마마!”
장난스레 국 찌르자 희사가 빽 소 리겠다. 원망스럽다는 그 눈빛에 나 는 웃었다.
“희사. 정말 괜찮아. 내가 굳이 화 를 참을 이유가 무엇이 있겠어?”
희사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래
' 하고 말하고 싶은 것이 눈 에 보였다.
“내가 정말 그랬다면 네 그 행동에 너를 물리지도 않았겠지.”
가볍게 첨언하자 희사가 깨달은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참 표정 변화가 빨랐다.
“나는 천천히 자라고 있으니 너무 염려하지 말거라.”
그 노골적인 얼굴에 웃으며, 나는 희사의 손등을 토닥였다.
황궁에 처음 들어왔을 때와 지금 내 곁에 있는 주변인들의 변화는 거 의 없었다.
그런데도 초반에는 내가 그들을 불 편해 했고,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건 내가 변했다는 의미.
지금은 표현이 적은 것 같아 다들 걱정하지만, 또 모르지. 삼 년쯤 지나면 내가 소문난 말썽 쟁이가 되어 있을지도.
그에 희사는 꼭 고운처럼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지만, 또 고운 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걱정하지 마.
그러고도 희사가 여전히 애틋한 일 굴로 나를 보길래 나는 희사를 한 번 안아 주었다.
그러자 희사의 얼굴이 화악 밝아졌
다. 정말 다채로운 사람이었다. 울먹이려는 희사를 내보낸 뒤, 나 는 탁자에 앉았다. 오늘치 서신을 쓰려는 의도였다.
희사와 이야기를 나눠서 그런지 기 분이 좋았다.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 리며 쭉 서신을 씨 내려간 뒤 붓을 내려놓았다.
종이를 후후 불어 말리던 나는 다 시 붓을 집어 들었다.
아, 맞아. 그걸 까먹을 뻔했다.
[밤에 멀리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 릴 수도 있어.
정말 살아 있는 아기가 아니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아.]
'산아' 또한 아기씨의 존재를 알고 있지만, 실제로 본 적은 없으니까.
밤중에 울음소리가 들리는 건 조금 무섭겠지.
추신으로 그 내용을 덧붙인 나는 서신을 말리고 곱게 접었다. 그리고 다른 종이를 꺼내 들었다.
서련도 내게 계속해서 서신을 보내 고 있어서, 그 아이에게도 답신을 해 줘야 했다.
엄마랑 저녁을 같이 먹기로 했고, 미리내랑 가람도 한 번쯤 찾아가야 하고. 아, 초은도 못 본 지 좀 됐다.
할 일이 많겠다고 생각하던 나는 문득 깨달았다.
'신경 쓸 사람들이 정말 많다.
그래도 좋은 사람들이 곁에 많다는 건 좋은 일이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나도 모르게 푸스스 웃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눈을 뜨자마자 반사적으로 머리맡을 더듬었다.
일어나자마자 '산야'의 답신을 읽 는 것은 어느새 습관이 된 행동이었 다.
역시나 종이가 잡혔고, 나는 눈을 비비며 서신을 펼졌다.
잠에서 잘 못 깨어나는 나였지만, 그 서신을 읽자 잠이 싹 달아났다.
[산야. 행복해?]
'산야는 답신을 꼼꼼히 써 주는 편이었다.
별일이 아니어도 하나하나 자신의 감상을 적어 주었고,
하지만 오늘 내가 받은 서신은 고 작 한 줄.
그것도 꽤 의미심장한 내용이다.
나는 서신을 붙들고 잠시 머뭇거렸 다.
화난 것 같은데. 내가 쓴 서신에 무슨 안 좋은 내용이 있었나?
그때, 문밖이 시끄러웠다.
내가 깨기 전엔 웬만해선 발소리도 내지 않는 궁인들인데, 이례적인 일 이었다.
일어나 문을 열자 갑작스런 내 등 장에 놀란 궁녀들이 나를 내려다보 았다.
“아침부터 무슨 소란이야.”
그렇게 묻자 송구하다는 대답이 돌 아와서, 나는 다시금 그 이유를 물 었다.
그러자 아직 흥분이 채 가라앉지 않은 궁녀 하나가 활짝 웃으며 말했
다.
“아기씨께서 사라지셨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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