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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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안색이던 마법진이 연분홍빛을 띠었다. 달아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이윽고 그곳에 화려한 서양식 복식 을 한 사람들이 나타났다. '서 대륙 사람들
서 대륙에 관한 것은 거의 들어 본 적 없지만, 금세 알 수 있었다.
커다란 마법진과 저 옷을 보고도 모른다면 말이 안 됐다.
그런데, 갑자기 왜?
오늘이 축제 날이 아니라고 해도 황궁 한복판에 타국의 사람들이 나 타나는 것은 좋은 징조라고 볼 수 없었다.
그 생각이 맞았다는 것을 증명이라 도 하듯 분위기가 쨍하게 얼어붙었
다.
몇몇은 불안한 표정으로, 몇몇은 적 대적인 표정을 했다.
스산한 바람 소리 같은 속닥거림이 들려왔다.
정작 소란의 장본인인 서대륙인들 은 저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 겠다는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 었다.
그러던 와중 내 1-己 차가운 손이 붙들었다. 미리내였다.
그는 몹시 불안한 얼굴로 나를 가 만히 붙들고 있었다.
정처 없이 흔들리는 시선이 닿는 곳은 결국 옥좌였다.
나는 그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예화는 홀로 옥좌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주위에는 궁녀들과 환관들이 있었지만, 그게 다였다.
불안한 감이 경종을 울렸다.
여면에게 어떤 식으로 이능이 봉인 되는지에 대해 더 확실히 물어봤어 아 했는데.
특정한 물건이나 문을 통과하면 이 능이 봉인되는 걸까, 아니면 단순히 황궁 안에 들어오면 그렇게 되는 걸 까?
이능만 막아 주는 봉인이라 마법은 막을 수 없는 건가?
서대륙인 중 선두에 서 있던 사람 이 한 발짝 내디뎠다.
그와 즉시 미리내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그가 입을 여는 것이 더 빨랐다.
“황제 폐하께 광영 있기를. 서라국 의 황제 폐하께 실바누스 왕국의  린트 공작이 인사 올립니다.”
그는 가볍게 묵례하며 황제에게 예 를 올렸다. 애매한 예법이었다. 口0
서라국의 예법대로 그- 근 꿇지는 않았지만 인사말은 서라국을 따랐다.
그의 인사를 시작으로 일행들이 비 슷한 방식으로 인사했다.
황제에게 예를 올리는 모습이 평범 한 사신 같기는 했다.
하지만 웃다가 뒤통수 후려갈기는 미친놈들은 세상에 얼마든지 존재했 다.
“산야. 이곳은 위험하겠구나. 들어
가 있으렴.” 미리내가 내게 일렀다. 그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했지만 숨길 수 없는 불 안으로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예화에 게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서늘한 얼굴로 아래를 내려 다보고 있었다.
잠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나 는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아요.” 서대륙인들이 무슨 생각인지는 모
르겠으나, 지금은 황궁이 침입당한 상황이었다.
미리내와 가람, 그리고 다른 후궁들 이 있는 이곳이 더 안전했다.
그리고,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인사에도 예화는 묵묵부답 으로 그들을 응시했다.
서대륙인들은 조금 당황하나 싶더 니, 아까 처음으로 인사했던 남자가 또다시 나섰다.
“저희는 실바누스 왕국의 사신입니
다. 저희 왕께서 서라국의 건국제를 기넘하여 공물을 보내셨습니다.” 그 말에 예화가 느른하게 몸을 늘 어트렸다.
권태로운 권력자처럼 덕을 괴고 있 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래?”
따다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 다.
예화가 손톱의 호갑으로 옥좌를 일 정하게 내리쳤다.
“공물을 바치러 온 사신이란 말이 점심 식사의 메뉴를 이야기하듯 평 범했던 예화의 눈빛이 일변했다.
까드득. 호갑이 옥좌를 긁으며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그렇다면 용의 축복을 어찌 뚫고 들어왔느냐?”
“내가 너희의 출입을 허가한 적이 없는데, 어찌 이 황궁 안으로 발을 들였는지 묻고 있지 않아.” 아, 그래.
역시 문제가 생긴 게 맞았다.
왜 늘 불길한 생각은 빗겨 가지가 않나.
나는 입술을 꽉 물었다.
예화의 녹회안이 번뜩였다. 조용한 그녀의 목소리 이외에는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소리를 지른 것도, 물건을 집어 던 진 것도 아닌데 당장이라도 누구 하 나가 죽어 나갈 것 같았다.
선두에 선 남자, 플린트 공작은 눈 에 띄게 당황했다. 그는 경련하듯 웃 으며 애써 말하려는 듯 보였다. “폐하. 그 무슨 말씀을•••
“똑바로 대답해야 할 것이다. 나를 이해시기지 못한다면, 그 몸을 만 갈 래로 그 뒤는 듣지 못했다. 가람이 내 귀 를 막았기 때문이다.
뭐야. 왜 이래.
나 고어 잘 봐. 이거 놔 봐!
발버둥은 못 치고 가람의 손을 탁 탁 때렸을 때, 공작의 곁에 서 있던 소년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와 동시에 손이 풀렸다. “오해이시옵니다, 폐하!” 앳된 목소리가 애절하게 울렸다. 멀 리 떨어진 채라 이목구비가 보이지 는 않았지만, 금발에 새파란 벽안을 한 소년이었다.
“소인이 무지하여 하명하신 용의 축복이 무엇인지 모르겠사오나, 황궁 으로 이동할 때에 마법을 방해하는 것이 없었사옵니다. 그리하지 않았다 면 소인들이 아무리 재주를 부린다 하더라도 어찌 지엄한 황궁에 발을 들일 수 있었겠습니까?”
또랑또랑하게 소리친 소년이 다시 말을 이었다.
“폐하의 심기를 상하게 한 죄 몸이 만 갈래 또다시 가람이 내 귀를 막0갔다.
짜증을 팍 내자 그가 금세 손을 치 웠다.
-도 지당하나, 부디 소인들이 진 실을 밝히지 못하고 억울한 사연으 로 구천을 떠돌지 않게 해 주시옵소
애절한 목소리로 말을 마친 소년이 그대로 머리를 조아렸다.
呑1 그 1리내를 보니 그의 표정도 한결 풀려 있었다.
내 손을 잡고 있는 그의 손도 아까 보다 한결 따뜻해졌다.
위기는 넘긴 듯했다. 그
다시 마음을 편하게 먹은 나는  작이 안절부절못하다 결국 똑같이 엎드려 절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예화가,
'저 인간이 저래 봬도 황제였지.' 예화는 서대륙인들이 고개를 들게 했다.
그러고는 소년에게 물었다. “너. 이름이 무엇이나.” “유리입니다, 폐하.” “올해로 나이는?” “열둘이옵니다.” 공손한 말에 예화가 픽 웃었다. “아이가 어른보다 낫구나.” 그 말에 공작의 눈썹이 꿈틀했지만, 그는 곧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러고는 애써 웃으며 품속에서 무 인가를 꺼냈다.
손바닥보다 작은, 보석이 박힌 무언 가였다.
그걸 어찌 조작하자 엄청난 양의 물건들이 나타났다.
그중 딱 하나.
평범한 포대 자루 같은 것이 있었 다.
그것 하나만 수수한 색이라 오히려 눈에 띄었다.
안에 든 것은 어른 손만 한 무언가 와 둥글둥글한 무언가였다.
포대 자루 안에 꽉꽉 채워져 있었 다.
다른 것을 구경하려던 내 시선이 무언가가 잡아끈 것처럼 그 포대 자 루에 고정되었다.
“왕께서 보내신 공물입니다. 이것은
“번거롭게 꺼내 두지 말거라. 받을 생각 없으니.”
“귀가 멀었느냐, 그도 아니면 우매 하여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이나?” 황제의 말을 되묻는 건 죄였다. 하 지만 예화는 자애로운 황제답게 상 냥하게 비꼬아 주었다.
“타국의 사절은 셋째 날에나 도작 하거늘, 제멋대로 일찍 도작해 제를 엉망으로 만들고도 받아 달라니, 건 방지기 짝이 없구나.” 느긋한 그녀의 말에 서대륙인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공물을 바지지 못해 안달 난 모습 이 이상해 보일 법도 했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사대 외교를 하나 보지.' 사대 외교는 약소국이 강대국에게 공물을 바치고 하사품을 받는 식으 로 이루어진다.
예화의 말을 들으니 본래 오기로 한 날보다 일찍 찾아온 듯했고, 그렇 다는 건 본인들이 무언가가 급하다 는 거겠지.
저들의 선두로 보이는 공작이 참 멍청했다.
저들이 무언가가 필요하면 납작 굽 힐 줄 알아야지, 당당하게 고개를 쳐 들고 왜 거절당하는지도 잘 이해를 못 하는 것 같았다.
그지. 그런 놈들 건 안 받는 게 맞 긴 하지.
“모두 가지고 돌아가거라.”
•••안 받는 게, 맞긴 한데.
들리는 눈빛으로 공작과 포 대 자루, 예화를 번갈아 보았다.
하지만 결국 시선이 고정되는 곳은 포대 자루였다.
아니, 근데 저거, 저거 맞는 것 같 은데.
대제국 체면에 사람은 돌려보내고 물건은 꿀꺽할 수도 없고, 무엇보다 황제가 받지 않을 거라고 말해 비렸 다.
그 말을 함부로 번복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근데 저게 맞으면?
일단 확인은 해 봐야 했다.
그리고 만약 맞는다면, 저건 황제의 명을 번복해서라도 가져와야 하는 것이었다.
저 나라 말고 다른 나라에도 구황 작물이 있는지 알 수 없었고, 만약 있다고 해도 이번 사절에 포함되지
o十0 며2 1-6- 1- • 다시 일 년 기다려? '그동안 다 굶어 죽겠다!' 역시 저건 확인해 봐야 했다. 하지만 뭐라고 말해.
저게 그 엄청난 식물이라고?
확실하진 않지만 아마 맞을 거라
고?
'그건 안 돼.'
아무렴 그렇게 한다고 다른 사람들 이 '아, 그렇구나' 하겠나.
당장 날 살살 달래서 데리고 들어 가겠지.
다른 방법이, 딱 하나 있긴 했다. 어린아이인 내가 쓰기에 그다지 어 렵지 않고 괴리감도 없는 방법.
그렇지만 그 방법은 떠올리기만 해
도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는 것 같았
다.
'하, 하기 싫어.' 그래도 다른 방법이 없잖아!
발만 동동 구르던 나는 결국 자리 에서 벌떡 일어나 밑으로 우다다 달 려 내려갔다.
나를 미처 잡지 못한 사람들의 경 악스러운 목소리가 들렸지만 아랑곳 하지 않았다.
포대 자루를 휙 열어 보니 익숙한 뿌리채소가 보였다.
내 예상이 맞았다.
'이거 고구마랑 감자잖아!' “공주 마마, 이러시면 아니 됩니
궁녀들이 놀라 나를 따라 달려왔다. 그녀가 나를 일으키려 했지만, 나는 내 몸만 한 포대 자루를 꼭 끌어안 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걸 확인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아이참, 마마. 왜 이러서요. 더 좋 은 것을 드릴게요. 더러워 보이는데, 그것 어서 놓으셔요. 예?”
“그래요. 이러시면 아니 됩니다. 마 마, 어서 올라가서요. 소인이 목마를 태워드리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그 리고 예화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
다.
“사, 사나 이거 갖고 시퍼요.”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 자마자 싸한 정적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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