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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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읊조린 뒤, 나는 어떤 사실 하나를 떠올렸다.
예화는, 그러니까 엄마는 내 방문을 늘 달가워했고, 나는 이제 할 일이 없고, 무릇 자식에게는 부모에게 효 도할 권리가 있다는 것.
그러니까 곧바로 화룡궁으로 출발 했다는 의미였다.
좀 넓기는 하지만 황궁이라는 같은 집 안에 사는데, 보고 싶다고 못 볼 건 또 뭐야.
이번에는 가마를 타고 정문으로 당 당히 들어왔건만, 나는 뜻밖의 인물 을 발견했다.
'저번에 봤던 그 소년.' 금발의 사신 아이. 그 아이가 대문 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나를 오매불 망 바라보고 있었다.
곱게 자려입은 옷이 화려했고, 하안 뺨이 발그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본 나는 작게 어깨 를 떨고는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모습을 나만 본 것은 아닌지라, 뒤따르던 희사가 실실 웃었다.
“저 도령께서 우리 마마를 아주 깊 게도 흠모하는 모양입니다.'  그렇지. 희사 눈에도 그렇게 보이 지?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 착각 이 아니었다는 걸 확인받는 게 달갑 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마마께 장 가든다 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어요.” 그 말에 일순 공기가 싸해졌다.
서연은 눈을 홉떴고, 다른 궁녀들은 놀람과 웃음이 섞인 얼굴을 하고 있 었다.
여류는 재미있1다는 듯 웃고 있었고, 그리고 고운은.
고운 너는••• • 너는 왜 충격받은 얼굴이니.
잠시 의아해하던 사이 서연이 낮은 목소리로 희사를 불렀다.
“희사.”
“빈(嬪)은 많을수록 좋지요. 아니 그렇습니까?”
“희사!”
서연이 버럭 화를 내자 나는 속으 로 조용히 동조했다.
지금 누글 범죄자로 만들려고.
희사가 송구합니다, 하고 입을 다물 었다. 서연이 깊게 한숨을 내쉬는 것 이 들렸다.
어휴, 저, 저•••
뭐라 더 말을 하려던 나는 한숨만 내쉬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위계를 제대로 잡아 두지 않은 내 탓이니 화낼 수도 없다.
그래도 이건 말해 둬야지.
“희사. 빈이라니.” 빈(嬪)은 황태자의 부인을 칭했다. 내 혼인 상대가 들을 호칭이 아니었
다.
“폐하께서 육체 강간대하신데 어찌 그런 이야기를 해. 입조심하거라.” 나는 내가 황제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당연한 일이었다.
강회 공주라는 봉작을 받고 동궁에 머물고 있기는 하지만, 모두가 내가 여란 가의 핏줄이라는 것을 알고 있
다.
그것도 이능 한 톨 없는 돌연변이.
당장은 황제 소생의 아이가 없으니 내 위치가 유지되지만, 예화가 아이 를 낳으면 당연히 물러나아 했다.
나는 동궁도, 화선궁도 마음에 드니 아무거나 씨도 상관없었다. 애초에 제위에 욕심도 없고.
아니, 욕심이 없는 정도가 아니다. 나는 그냥 황제의 재목이 아니었다.
내가 황제가 됐다간 이 나라 말아 먹는 건 시간문제일 거야.
나라를 말아먹는 황제는 폭군이 전 부가 아니지 않는가?
그런데 그 말을 들은 궁녀들의 표 정이 이상해졌다.

안타까워하는, 나를 안쓰러워하는
듯한 얼굴.
왜 이래?
내가 의아해하던 찰나, 나를 안내하 던 환관이 멈춰 섰다. “폐하. 공주 마마께서 오셨습니다.” 그 말 뒤로 대답 없이 곧바로 문이 열렸다.
문 너머에는 엄마가 환하게 웃으며 서 있었다.
“우리 공주 왔구나.”
예. 당신 따님 왔습니다.
나는 그대로 그녀에게 잰걸음으로 다가가 다리를 푹 끌어안았다.
엄마가 의아해하면서도 몸을 숙여 나를 마주 안았다. “응석받이가 다 되어 왔구나.” “좀 받아 주세요.”
“지엄하신 공주 마마의 명을 어찌 거절할까요.”
웃음기 이린 목소리로 농담을 건넨 그녀가 나를 번쩍 들어 안았다.
품이 포근하고 따뜻했다.
“기윤 뒤•••••• 사라졌으면.” “으9”
“혼잣말이 있습니다."
“이미 다 들었다만.”
“허면 어찌 되물으셨습니까?” “내 제대로 들은 건가 싶었단다.” 그러면서도 혼내지 않는 게 만족스 러웠다.
그녀는 나를 안은 재로 침대에 앉 았고, 나는 좀 더 편안하게 몸을 기 댔다.
“오늘 기윤에 네 궁을 찾았다 들었
다.”
“예. 제가 불렀지요.”
“방금 네 말에 따르면 그가 그리워 부른 것은 아닌 듯싶구나.” “당연한 말을 어렵게 하십니다.” 불퉁한 대답에 머리 위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살살 해집 어 주는 손길에 몸이 노곤노곤해졌
다. “그 작자는 정말•••  “정말?” 개자식이에요.
“나쁜 사람입니다.” 욕할 수는 없어서 말을 순화하니 엄마가 또 웃었다. “어찌 그래.”
“설명하자면 깁니다•••  원작의 산아 이야기까지 설명해아 하니 할 수도 없었다.
그리고 난리 날 게 뻔해서.
그대로 잠들 뻔했던 나는 문득 한 가지를 떠올리고 휙 고개를 들었다.
“여란 가에서 유통 중인 약을 아십 니까?”
“만병을 치료한다는 그 약 말이나?
알고 있다만.”
“혹시 복용하셨어요?”
“몸의 불편함도, 마음의 어지러움도 없으니 복용할 필요가 없지 않겠느
나.”
그 말에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몸 튼튼 마음 튼튼. 좋지요. 다행이 네요.
“앞으로도 절대 복용하시면 아니
됩니다.”
우리 아가는 어미에게 이유는 설 명해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구나.” 엄마가 내 볼을 국 찌르며 말했다. 그에 나는 내가 그녀의 질문을 계속 묵살했다는 걸 깨닫고 조금 머쓱해 졌다.
“좋지 않은 약입니다. 당장은 통증 을 잊게 해 주고 기분 좋은 환각을 보여 주지만, 중독성이 아주 강해서
직구인 내 설명에 그녀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확실한 것이나?”
“구 할은 확신합니다. 약을 복용할 시 나타나는 효능도, 유통처도 모두 제 의심과 동일한 듯하니 말이에요.”
“그렇구나•••  나는 진지하게 대답하는 엄마의 일 굴을 보고 잠시 아차 했다.
지금은 진짜 쉬러 왔는데, 어쩌다 보니 또 이런 말을 했네.
나는 다시 그녀에게 머리를 폭 기 댔다.
“그러니 유통을 막을 방법을 찾으 면 말씀해 주셔요.
갑자기 힘이 빠진 내 태도가 의외 인지 엄마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해결에는 네가 관여하지 않을 작 정이나?”
“제가 관여하지 않고도 더 좋은 방 법이 있으시다면 그리해야지요. 그래 도 우선은 부족한 지혜나마 보대 보 겠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당장 해 결할 만한 멋진 아이디어가 떠오르 지는 않았다.
뜬금없이 이건 마약입니다, 하고 말 하면 몇이나 믿을까 싶기도 하
하여튼 오늘은 정말 이런 이야기를 하러 온 것이 아닌데.
보통 부모님과는 무슨 이야기를 하 학장 시절 진구들에게 들은 이야기 라곤 부모님과 진로 문제로 싸운다 는 것밖에 없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화제를 생각하던 나는 문득 아까 희사가 한 말이 생각났다.
예화는, 엄마는 황제이니 후사를 만 들 의무가 있다.
그러니 당연히 아이를 낳을 것이고, 이 궁 안에는 그녀를 어머니라고 불 리는 사람이 하나 더 늘겠지.
'아니, 그냥 한 사람인가.
애초에 난 어머니라고 부르지도 못 하고 있으니까.
속으로는 엄마라고 부르는 게 그리 어색하지 않을 정도까지 왔지만, 아 직 직접적인 호칭으로는 어색했다.
하지만 태어날 아이는 그러지 않겠1 지.
날 때부터 모두에게 떠받들며 자랄 테고, 그러니 모두에게 사랑받을 만 큼 사랑스러울 것이다.
둘째가 태어나면 맏이가 소외되는 것은 거의 당연하게 자리 잡은 규칙
이었다.
게다가 난 예화의 친딸도 아니다. 당연하게 적통 장자인 그 아이에게 관심이 쏠릴 거라는 걸 알지만•••
“폐하.  “ 0 2”
그래도 당연하게 애정이 분배되는 건 좀 싫은데.
“저에게도 동생이 생기나요?” 조금 의기소침한 내 질문에 엄마가 잠깐 고민하는가 싶더니, 다시 내게
질문했다.
“갖고 싶으나?” 그 질문의 말투가 조금 이상했지만, 아이에게 동생이 갖고 싶나고 묻는 것이 일반적이기는 했다. “꼭 그렇지는 않지만•••  어차피 낳으셔야 할 테니까요.
삼킨 말이 씁쓸했다.
나는 봉작을 받기는 했지만 황실의 피를 이어받지 못한 입양아이니, 당 연히 아이를 낳아야 할 것이다.
설령 황위를 쟁취해 낸다고 해도, 내가 황제의 재목도 아니고.
당연한 걸 물었다는 것도, 그걸 서 운해했다는 것도 민망해졌다.
제위를 물려 달라 하면 거절할 위 인도 아닌데.
지레짐작하고 생각하다 혼자 서운 해 하는 꼴이라니.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지만, 그래 도 서운한 걸 어떻게 해.
내가 씁쓸함을 곱씹는 동안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0갔다.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했다. “네가 원한다면 낳아 주마.
그 말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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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장신구 하나 사 주겠다=  한 말투가 너무나 평온했다.
그리고 그제야, 아. 그랬었지, 하고 잊었던 사실을 떠올렸다.
황제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
그리고 그건 제 피를 이은 자식에 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 또한 한참을 고민했던 것을 어 느세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게 이제야 가슴께가 선들해서, 나 는 고개를 들어 엄마와 눈을 맞췄다.
그녀가 웃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나 를 바라보는 눈빛이 다정했다.
비윤리적인 말을 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조차 느끼지 못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엄마는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 줬다.
굳이 그럴 이유가 없음에도 말이다. 그래, 그러면 됐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얼굴로 굳었다.
아주 가끔, 인간적이지 않은 엄마의 모습을 볼 때가 있다.
가령 방금 같은 대답들 같은, 그런 것들.
이상하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그게 씩 달가워서.
엄마는 나를 제일 사랑하지? 하고 물은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해 준 것 으로만 들린다.
왜 내가 예외가 되었는지, 엄마가 정말 날 사랑하는지 확인할 수는 없 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걸 오랜 시간 의심했고, 이제는 믿을 수밖에 없었 다.
우리 엄마는 날 사랑해. 그거면 됐 지. 우리 엄마잖아.
어디 가서 사람 죽이고 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인간성이 좀 떨어질 뿐 이아.
생각을 마진 나는 다시 그 품에 머 리를 폭 박았다.
아무래도 나는 아직 엄마의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나이인 것 같았다.
그러니 태어나지도 않은 동생 걱정 은 조금 접어 두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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