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말이 정말 대답을 원하 는 것인지, 아니면 서두를 꺼낸 것 인지 고민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뒤로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이 후궁은 나에게 그저 화풀이로 말을 쏟아 내고 가는 것이 아닌, 내 대답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모두 폐하의 은덕입니다.” 그 말은 하면서도 뒷맛이 썼다.
조윤이 원했던 대답은 이게 아니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하. 제 가 그 양반 눈에 들어서 좋을 게 뭐랍니까.'라고 대답할 수도 없었
다.
••그래요?"
조윤은 본인이 정답이 하나뿐인 문제를 내놓고 화를 냈다. 어쩌라 는 걸까.
그가 기분 나쁜 얼굴로 나를 빤 히 바라보고 있었다.
솔직히 식은땀이 조금 홀렸다. 왼 뺨을 때릴지 오른뺨을 때릴지 고 민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이신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조윤은 분명히 나에게 경고 내지 협박을 하러 왔다. 그런데 오자마 자 아무런 전조도 없이 툭 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나.
뭐, 첫 마디를 뗐으니 '그런데 말 입니다.' 하고 모 프로그램 진행자 처럼 말할 수도 있겠지만, 보아하 니 어떻게 말을 꺼내아 할지 고민 하고 있는 눈치였다.
그 말의 시작이 내 뺨을 치는 것 으로 시작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 니 먼저 물꼬를 들 수밖에.
“별일은 아닙니다. 그저 윗사람으 로서 가르침을 드리러 왔을 뿐”
다행히도 정답이었는지, 조윤이 짐 짓 새침하게 눈을 조프리며 말했다. 가르침이라. 부디 그 이름이 네 가 문의 폭력적인 이능의 명칭이 아니 길 바란다.
“화무십일홍이라는 말. 당연히 알 고 계시겠지요.”
조윤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다시 내 게 대답을 요구하듯 한쪽 눈썹을 지 켜올렸다.
모른다 대답한다면 당장이라도 날 끌고 나가 여란 가에서 보내온 후궁 이 이렇게나 멍청하다고 황제에게 읍소라도 할 것 같았다.
“열흘 붉은 꽃이 없다. 유명한 구 절이지요.”
“예. 그렇지요. 하물며 꽃도 열흘 붉은 꽃이 없다는데, 인간은 오죽하 겠습니까. 그리고 시든 꽃은••• 그렇게 말하며 조윤이 고개를 낮줘 내게 시선을 맞추었다.
그의 얼굴이 음영이 지며 어두워지 고, 매끈한 얼굴에 조소가 서렸다.
“금방 뽑히기 마련이지요. 황궁은 시든 꽃이 있을 만한 곳은 아니니 말입니다.” 그 협박에 나는 하마터면 박수라도 질 뻔했다.
와아. 무섭다. 너무 섬뜩하다.
황제의 총애가 일마나 가겠느나.
날뛰지 말아라•••••• 정도일까. 생각보다 건전하다.
그리고 동시에 나는 원작의 그 장 면을 이해했다.
나는 아무렇지 않았으나, 어린아이 에게는 충분히 울 만한 말이었다.
가람은 울며 뛰어가는 산야의 뒤를 따라가다가 덤터기를 걸까?
“귀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마음 에 잘 새기겠습니다, 마마.” 나는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조윤은 그 말도 마음에 자지 않는 지 흐음, 하고 콧소리를 홀리다가, 이내 시비에게 고개를 돌리며 여상 히 말했다.
“저 시비와는 많이 진근하신 모양 이군요. 이리 방에 두시는 것을 보 니 말입니다.”
나는 조윤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친하다니. 해가 서쪽에서 뜰 말을 하고 있다.
친근한 궁녀가 지근거리에서 시중 을 드는 것이 맞기는 했다.
다만 저 시비는 건방이 하늘을 찔 렀기에 나가라는 내 말을 듣지 않았 을 뿐이었다. 하지만 굳이 이걸 구구절절 설명할 이유는 없지.
“예. 그렇습니다.”
0
내 대답에 조윤이 콧소리를 홀렸
다.
상당히 흥미롭다는 얼굴이었다.
그의 입가가 점점 올라7갔다. 누가 보아도 꿍꿍이가 있다고 소리치는 듯한 웃음이었다.
그 입꼬리가 마침내 정점을 찍었을 때, 조윤이 손바닥 뒤집듯 말투를 달콤하게 바꾸고는 말했다.
“제가 요즘 일손이 모자라서 말입
니다.”
그 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반문할 뻔했다.
일손이 모자라요?
황제에게 미움받는 후궁, 아무런 힘도 없이 은거하는 후궁들도 있었 지만 어떠한 후궁도 일손이 모자라 지는 않았다.
그건 당연했다. 아무리 황족의 성 도 없는 후궁들이라 해도 황제의 배 우자 아닌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동 시에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 다.
나는 흘끔 시비를 바라보았다. 그 녀가 놀란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 돼요! 입 모양으로 소리치는 것 이 보여 나는 조윤 몰래 입꼬리를 씨익 올려 주었다.
•••저 시비 아이가 일을 잘합니
다. 마마께서 일손이 부족하시다면, 저 아이를 데려가시겠습니까?” 일부러 파르라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니 조윤이 활짝 웃었다.
그와 대비되게 절망적인 시비의 일 굴을 보며 나는 웃음을 참으려 입술 을 깨물었다.
손 안 대고 코를 풀었네. “주신다니 감사히 받지요.
조윤은 싱글싱글 웃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시비는 조윤의 옷자락을 잡아 만류 하거나 내 뺨을 후려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당연했다. 내 궁에서야 자기 세상 이었지만, 조윤의 궁에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어쩌겠니. 년 내 궁에 있었 어도 조윤의 궁보다 나쁘면 나빴지 좋진 않을 텐데.
조윤은 내게 인사도 없이 휙 돌아 섰고, 나는 조윤을 배웅할 준비를 했다.
명백한 무시였으나 기분 나쁘지 않 았다.
당연히 가람일 줄 알았는데 아니 고, 무엇보다 시비도 지워 주었다.
가람은 상대하기 어려운 상대였기 에 꽤나 긴장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멍청한 후궁이 와서 다행이었다.
내가 황제에게 달려가 울며 안길 일도 없으니 완벽했다.
어서 시비와 함께 사라졌으면 좋겠 다. 햇살이 좋으니 누워서 낮잠이나 잘까.
그런 생각을 하며 자꾸만 나를 돌 아보는 시비의 시선을 무시하는데,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그것도 아 주 가깝게.
누군가 올 사람이 있나?
황제만 아니면 좋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궁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마. 선비 마마께오서 오셨습니
다.”
그 말에 나는 느긋하게 떼려던 발 걸음을 우뚝 멈춰 서고 말0갔다.
선비. 여러 가지 단이들이 떠오르 는 그 호칭은 가람을 일컫는 말이었
다.
나는 대답할 틈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붉은 머리의 남자를 발견하고는 입을 떡 벌렸다.
이. 이건 예상치 못한 전개였는데.
•••저게 왜 여기 와 있지?” 내 궁에, 그러니까 내 방에 발을 들이자마자 가람이 한 말이었다.
인간을 가리킨 말로는 상당히 무례 했으나, 다행히도 이 궁의 주인인 내가 이곳에 있는 것을 지적할 만큼 말종은 아닌지 그 말은 조윤을 향했 다.
그 말에 조윤은 파르르 떨며 얼굴 을 붉혔지만 가람에게 대놓고 대들 지는 못했다.
그야 당연했다. 가람이 더 강했으 니까.
용에게 축복받아 이능을 얻은 가문 은 일곱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서 라국에 존재하는 이능이 일곱 가지 는 아니었다. 이 세계에는 용을 제외하고도 신수 들이 많았다.
이무기, 천호와 정령, 또는 반룡과 구미호 같은 신수들 또한 제가 마음 에 드는 이들에게 축복을 내렸고, 그로 인해 서라국에서 이능은 손에 꼽지 못할 만큼 늘어났다.
하지만 역시나 가장 강한 힘은 용 의 축복이었고, 다른 신수들 또한 그 급에 따라 이능의 강력함이 모두 제각각이었다.
예를 들어 여란 가의 이능은 무엇 이든 한계 없이 들어 올릴 수 있는 염력이지만, 어느 이름 모를 자그마 한 가문의 이능은 씨앗을 들어 올리 는 것이었다.
그 가문을 축복한 것이 그 땅에서 태어난 작은 정령이었던 모양이다.
가지고 있는 이능이 얼마나 강하고 유용하느나. 또 잘 활용할 수 있느 나에 따라 계급이 나뉘었고, 대부正 가문의 권세가 강할수록 그 이능 또 한 강했다.
가람은 개국 공신 가인 일곱 가문 중 하나인 이화 가의 차남이었다.
그리고 조윤은, 음•••••• 어느 가문 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일곱 가문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제가 기분이 나빠도 어쩌겠는가. 힘이 없는 것을.
내게 하대한 것은 막내딸로 고이고 이 자란 내가 너무 어려서 아무 말 도 못 하고 엉엉 울 줄 알았거나, 여란 가에서의 처지를 안 것이겠지. 역시나 조윤은 끝내 가람에게 화내 지 못했다.
대신 그는 분노로 1- 파들파들
떨며 내게 고개를 휙 돌렸다. “정말 무례하군요!”
어. 대체 어떤 것이.
“내가 먼저 와 있었는데 이리 누군 가를 또 들이다니! 어리다고 어리석 은 것이 용서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중하세요!” 교묘하게 나만 탓하는 화법이었다. 가람의 말을 탓한 것이 아닌, 선객 이 있었는데도 다른 손님을 또 들인 것을 탓한 것이니 말이다.
실제로도 잘못한 일이기는 했다.
내게 선택권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이 정상 참작될 요건이겠지만. “예. 설비 마마. 송구합니다.” 나는 굳이 꼬투리를 잡지 않고 고 개를 숙였다.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뺨을 맞은 것도 아니고, 무릎을 꿇 으라는 것도 아니고.
아, 무릎 정도라면 그냥 꿇었을 것같긴 하다.
내 얌전한 대답에 조윤은 더 분한 얼굴을 했다. 그 모습에 나는 슬슬 눈에 힘이 풀리려 했다.
무슨 말을 해도 저런 반응이 돌아 오니 피곤했다.
“얼씨구.”
기가 찬다는 가람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거, 내가 머리가 안 좋아서 비꼬 는 건 잘 못 알아듣겠는데. 트집을 잡아도 정도가 있는 것 아닌가?” 재가 웬일로 맞는 말을 하지.
나는 나도 모르게 새삼스러운 눈빛 을 했다.
원작에서의 가람은 참 여러모로 처 맞는 존재였다.
말보다 주먹이 빨랐고, 성격도 호 전적인 탓에 사고도 많이 쳤다.
무엇보다 그는 늘 머릿속의 말들을 필터링 없이 내뱉어 미리내에게 조 곤조곤 논리로 얻어맞곤 했다.
미리내는 상냥한 척을 하며 가람의 멍청함을 온 천하에 까발렸고, 그 덕에 황제의 한심하다는 건조한 시 선이 따라붙었기에 가람은 미리내를 퍽이나 싫어했다.
원작의 묘사로는 황제의 앞에서 보 인 가벼운 신경전이었지만•••
그게 황제의 뒤에서도 가벼울지는 모르는 일이지.
하여튼 간에, 가람은 꽤나 멍청했 다.
그래서 이렇게 바른말을 할 줄은 몰랐는데. 그것도 날 변호하느라. 그냥 잘못된 걸 보면 말하지 않고 는 못 사는 건가?
조윤은 잔뜩 화가 난 얼굴을 했지 만, 끝내 가람에게는 말 한 마디 하 지 못하고 다시 내게 표독스러운 시 선을 보냈다.
“나를 이리도 모욕하다니. 절대 그 냥 넘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이젠 납득할 만한 이유도 없었다. 히어로물의 일회용 악당 같은 대사 네. 하고 생각했을 때, 조윤이 팔을 우아하고 신경질적이게 휘두르며 획 돌아섰다.
그 덕에 넓은 소맷자락에 얼굴을 철썩 얻어맞은 나는 순간적으로 몸 을 휘청였다.
•••빌어먹게 작은 몸.
시비를 데리고는 문을 박차고 나가 는 조윤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작게 숨을 내쉬었다.
못 봤겠지?
얼굴을 맞은 수치심은 둘째치고, 얼굴을 찌푸리며 입으로 욕을 중 일거린 터라 들키면 곤란했다.
그리고 뒤를 돈 나는 가람과 눈이 딱 마주쳤다.
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