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아는 인정했다. 솔직히 조금 서 운했다.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아침 댓바 람부터 나가면서 언질도 안 줘?'
지금껏 산야가 고운에게 말하지 못 할 것은 없었고, 고운 또한 그랬으 니까.
하지만 동시에 산야는 이해했다. 상대방이 소중하고 말고를 떠나 혼 자만 알고 싶은 것은 얼마든지 있기 마련이다.
•••짐작은 전혀 안 가지만.' 물론 잠시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어른스럽지 못한 생각을 한 것은 맞 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산야가 궁을 나서는 고운의 멱살을 붙든 것은 아 니지 않는가?
그러므로 그것은 없었던 일로 지부 할 수 있다.
아니,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실제로 없었던 일인 것이다.
서라국 황제의 유일한 자식이자 황 태자.
어릴 적부터 유독 어른스럽고 총명 함으로 이름을 떨겠으며, 마호 가의 자제와 흔들림 없이 잔잔한 연인 관 계를 이이 가고 있는 산아 여란.
•••진짜, 진심으로 따라 나온 것
0} 0
그녀는 그 모든 생각들을 황궁 밖 의 저잣거리에서 했다.
굳게 다짐하듯 이를 악물며 고개를 작게 끄덕이던 산아는 이내 몸에서 힘을 쭉 뺐다.
'변명 같잖아.'
오래 자리를 비우겠다는 것도 아니 고, 고작 하루 외출하겠다는 연인을 부득불 못 믿어 따라 나온 사람 같 았다.
하지만 산야에게도 변명은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는 억울했
다.
고운이 출궁한 뒤, 산야는 조금 쓸 쓸하지만 제법 괜찮은 기분으로 일 과를 처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다지 집중은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예화가 찾아왔다.
산야는 간만에 보는 어머니의 얼굴 을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예화는 어던가 오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 안다는 듯한 웃음이 산 야는 어딘가 찜찜했다.
'간만에 잠행을 다녀오겠니? 새 법 률을 공표하고 난 뒤 확인을 못 했
구나.'
인자한 어머니의 말에 산아는 고개 를 내저었다.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었잖아요.
감잘관들도 이미 보았을 테니 괜찮
아요.'
'그래도 직접 봐야지. 훗날 네가 다스릴 나라 아니니?' 예화는 평소 산야의 잠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의 뿌리 깊은 안전 염려 때문이었다.
절대로 안 된다고 뜯어말리던 사람 은 아니었지만 항상 걱정 이린 눈을 하던 어머니가 갑작스레 = 0 떠미 니 산아는 당황했다.
그리고 예화는 그 틈을 놓치지 않 고 미리 궁녀에게 받아 두었던 옷을 내밀었다.
'자, 어서. 사람들이 제일 많을 곳 으로 가 보렴. 역시 장이 열리는 쪽 이 좋겠구나.' 산야는 그 떠밈에 못 이겨 결국 옷을 갈아입었고, 동궁을 나섰으며 무사히 장이 서는 저잣거리에 도착
했다.
못 이겨 나왔다기엔 제 발로 열심 히 걸어 나온 길이긴 했다.
산야는 득시글대는 사람들의 모습 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운 어디 있으려나.”
“예?! 그놈이 어디 가는지 마마께 귀띔을 해 주고 갔답니까?” 산야의 중얼거림에 호위로 따라 나 온 여류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산아는 가라앉은 눈빛을 숨기지 않 고 여류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머니께서 부득불 내 떠미 신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그리고 하필 오늘 고운이 출궁했고.” 그 말인즉 둘 사이에 무언가의 결 탁이 오고 갔다는 의미 아닌가?
황궁 근처의 저잣거리는 유독 번화 한 거리 중 하나였다.
작은 도시에서는 주에 한두 번씩 서는 장이 매일 열렸고, 파는 물품 의 수도 그 어디보다 많았다.
이곳이라면 황궁과 그다지 멀지 않 았으니 하루 만에 왕복할 수 있고, 무엇보다 예화가 굳이 짚이 준 장소 였으니.
산야는 많은 인파들 사이에서 회색 곱슬머리나 검은 휘장을 찾으려 눈 을 돌렸다.
공간이 꽤나 큰 탓에 찾는 데에 시간이 걸릴 거라 생각했지만, 운명 인지 우연인지 산아는 오래 걸리지 않아 회색 머리칼을 한 남자를 찾아 냈다.
“웬일로 오늘은 멱리를 안 썼네” “벌써 찾으셨습니까?”
느려, 여류 은되할 때가 된 건가.
산야는 태평하게 여류를 면박 주며 인파 사이로 끼어들었다.
고운이 느릿느릿 걷다 한 가게 앞 에서 걸음을 멈춰 선 덕에 둘 사이 의 거리는 금세 좁혀졌다.
늘상 고요한 황궁에서만 생활하던 산야에게 떠들썩한 저잣거리의 소음 은 언제나 유쾌하지 않0갔으나, 이번 만큼은 산야의 발걸음이 점차 들떴
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고운의 표정이 자세히 보였다. 그는 무언가를 고뇌 하듯 작게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무일 하려고 그러지?' 선물을 사려고 그릴까?
어쩌면 마냥 값비싸지 않더라도 특 별한 것을 주고 싶어서 그런 걸지도 몰라.
괜스레 들œ 마음에 산야가 머쓱하 게 웃었다.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일에 저 혼자 김칫국을 들이켜고 있 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부푸는 마음이 몽실거린다.
고운이 그녀를 위해 무언가를 준비 했다는 것만으로도 심장께가 빠듯하 게 자올랐다. 조잡하게 깎은 목마를 받아도 기쁠 것 같았다.
고작 다섯 발자국쯤을 남겨 두고 산야는 멈춰 섰다.
다른 발걸음 소리에 묻혀 듣지 못 한 것인지 고운은 여전히 등을 보이 고 있었다.
산야는 고되했다. 무언가를 준비하 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벌써 알아 채면 속상해하려나?
무일 하는지만 몰래 보고 뒤따라갈 까. 그러다 들키지 않을까•••
“어머, 나리. 어찌 바깥에만 서 계 서요?” 산야의 생각은 화려하게 차려입은 한 여인이 고운의 팔을 잡아끌었을 때 뚝 끊겼다.
한껏 미소가 피어올랐던 얼굴이 한 순간에 싸늘해졌다. 산아의 표정은 가면을 바꿔 끼듯 순식간에 변해 있 었다.
웃으면 순한 인상이지만 산야의 무 표정은 그와 대비될 만큼 서늘한 편 이었다.
그에 눈빛마저 형형하니 안 그래도 차가운 인상이 더욱 무시무시했다.
'그러고 보니•• 산야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고운이 서 있는 건물을 바라보았다. '여기 기루잖아?' 어쩐지 화려하다 했다. 그저 장신 구 정도나 파는 가게인 줄 알았더 니, 자세히 보니 기루였다.
산야가 다시 고운에게 시선을 돌렸 을 때 기녀들은 여럿으로 늘어나 있 었다.
의복이 비싸 보이니 돈이 많은 손 님이라 생각한 듯싶었다.
산야는 그와 별개로 고운에게 크게 충격 받았다.
만약 들어간다면 너•••
하지만 다행히도 그 뒷말이 이어질 일은 없었다. 고운이 과하지도 부족 하지도 않은 힘으로 기녀의 손을 떼 이 낸 것이다.
“나는 너희의 손님이 아니다.” 당사자가 아니라도 머쓱해질 만큼 싸늘하게 대답한 고운은 조금의 미 련도 두지 않고 기루에서 멀어졌다.
그 모습을 보던 산아는 이내 깊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내가 알던 고운 맞구나.
혹여나 제게 말하지 못한 이유가 기루에 가기 때문일까 싶어 산아는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물론 기루 앞에 왜 서 있었는지는 이유를 물어야겠지만, 우선은 다행 인 일이다.
산야는 어느새 한참 멀어진 회색 머리통을 보고는 최대한 다른 사람 들과 같은 걸음걸이로 고운을 쫓았
다.
고운이 다음으로 향한 곳은 책방이 었다.
인쇄술이 그다지 보급화되지 않아 책은 여전히 귀했다. 하지만 그럼에 도 수도의 책방이다 보니 제법 크기 가 컸다.
다만 이번에도 다섯 발자국쯤 뒤에 서 있던 산아는 조금 난처해졌다.
노점상이 많은 다른 상점들과 달리 책방은 건물이었다. 따라 들어7갔다 간 고운이 단번에 눈치챌 것이다.
안이 꽤 넓었고, 서적들 탓에 불을 최소한으로 켜 두어 내부가 보이지 도 않았다. 들어갈 수도 없고, 바깥에만 있을 수도 없고.
•••뭐 하십니까?” 좀 더 멀리 떨어져 한참을 기웃대 던 산아는 조심스러운 여류의 말에 딱 멈췄다.
순간 잠시 밀어 두었던 현실이 해 일처럼 산아를 덮졌다.
'그러게•••
산야는 꼭 바람 난 에인 미행하듯 행동하고 있었다.
분명 시작은 이렇지 않았는데, 어 써다 이리되있는지 아무도 모를 일 이다.
애초에 명목상이지만 산아의 출궁 이유는 잠행이었는데 말이다.
산아는 자신이 오늘 궁 밖에서 아 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할 것을 깨달 았다.
자꾸만 거슬리는 일이 있는데, 그 것이 해결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다 른 것이 통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조급했음을 인정했 다.
어머니의 의도 또한 산아 본인이 추측했을 뿐, 확실한 것은 아니니 말이다.
정말로 고운이 제 용건 탓에 황궁 을 나왔을 뿐일 텐데, 왜 이리 바보 같이 구는지.
“돌아가자.” 산야는 시무룩이 말했다. 궁으로 돌아가 고운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 릴 생각이었다.
조금 멍청해 보이더라도 홀로 생각 하는 것보다는 뚜렷이 물어보는 것 이 나았다.
그리고 분명 묻는다면 고운은 대답 해 줄 테니 말이다.
산야는 사람들 틈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한 발짝 물러섰다. 그리고 단 단한 무언가에 톡 부딪혔다.
나무나 벽의 질감은 아니었다. 그 보다는 따뜻하고 말랑한, 그러니까 사람 같은••• “이곳엔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0 0卍|”
익숙한 목소리에 산야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았다. 그녀가 그토록 얼굴을 보려 애썼던 이가 그곳에 서 있었
다.
“고운? • •••언제 왔어?”
“일마 되지 않았습니다.”
산야는 잠시나마 여류를 원망했다. 그 딴에는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먼 저 말해주지 않았겠지만, 고운이 미 행(?)하던 상대였던 산야에게는 귀 신이 나타난 것 같았다.
하, 하고 숨을 크게 뱉어 마음0 진정한 산야의 눈에 고운이 들고 있 는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제목도 적혀 있지 않은 책. 아마도 책방에서 사 온 모양이었다.
“무슨 책이야?”
산아의 물음에 정적이 흘렀다. 고 0 0 대답 대신 책을 슬며시 제 소 매에 집어넣었다.
산야는 그때까지도 고운이 대답해 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의 침묵은 길이졌다.
마침내 산야가 그의 침묵이 답변이 어렵다는 의사임을 알았을 때, 산야 는 약간 서러워졌다.
•••왜 자꾸 말 안 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