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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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궁으로 돌아온 나는 아무렇지 않 은 적 스며들려던 것을 잠시 잊었 다.
궁이 미묘하게 소란스러운데. 무슨 일이 있나?
“태자 전하!”
그렇게 생각한 순간 카랑카랑한 목 소리가 들렸다. 찔끔해 돌아보자 두 말할 것도 없는 희사였다.
“전하. 어디- 또 나갔다 오셨어 요?” 그 말에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떻게 알았느냐?” 아, 이게 아닌데.
즉시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희사의 눈이 매서워진 후였다.
아니, 근데 정말 어떻게 알았지. 옷도 갈아입고 신발 밑창의 흙도 털 있는데.
“입가에 사당 조각이 아주 별처럼 반짝거리십니다!” 놀라 입가를 매만지자 정말로 무언 가가 묻어났다.
하여간 눈도 좋아. 이 작은 걸 어 떻게 봤대.
“나가시려거든 수행을 데리고 나가 서야지, 어찌 홀로 다니셔요. 위험하 게시리!”
“내 어찌 바쁜 너희들을 괴롭히겠 니. 그리고 놀러 다니다니. 백성들의 생활을 내 눈으로 적접 보는 것도 공부의 일환이니•••
“소인은 모릅니다. 그 말씀은 폐하 앞에서 하셔요.”
줄줄 변명을 쏟아 내던 나는 멈칫 했다.
•••어마마마께서 와 계시니?” “이 각(30분) 정도 되셨어요.”
나는 그제야 왜 동궁이 부산스러운 지 알 수 있었다.
'망했네.
울고 떼쓰고 애교 부리면 다 봐주 던 시대는 지난 지 오래였다.
엄마가 미리내 같을 줄 알았지, 진 화한 가람 같을 줄 누가 알았겠어. 엄마는 다정했지만 그만큼 엄격했 다. 혼낼 때 몹시 무섭다는 의미였
다.
아, 놀러간 거 들키면 혼날 텐데.
•••어디 계셔?”
그렇다고 피했다간 더 혼나겠지. 나는 한숨처럼 물었다.
희사가 조금 안타깝다는 얼굴로 나 를 안내했고, 나는 이윽고 다다른 문 앞에서 한 번 심호흡했다. “폐하. 대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들라 하거라.” 고요하고 차분한 목소리 뒤로 문이 조용히 열렸다.
탁자에 앉아 책을 읽던 엄마가 내 게 시선을 돌렸다.
나는 즉시 활짝 웃으며 엄마에게 다가갔다.
“엄마!”
우리 어머니, 오늘도 예쁘십니다. 머리카락이 백설기 같아요.
1- 뻗자 엄마가 웃으며 마주 손 을 뻗었다. 나는 이제 체격이 거의 비슷해진 엄마의 품에 폭 안겼다.
“어쩐 일로 오셨어요? 갑자기 내가 보고 싶어서?”

어린 시절과 지금은 변한 것이 많 았지만, 그중에서도 변하지 않은 것 을 꼽자면 내 성격이었다.
나는 여전히 무던한 편이었고, 애 교를 못 견더 했다.
그러니까 지금 이건 생존본능 같은 거지.
엄마가 가만히 내 머리카락을 쓰다 듬이 주었다. 평소와 똑같은 평온한 분위기에 나는 내심 마음을 놓았다.
한 번쯤은 눈 감아 준다는•••  “재미있게 놀다 왔니, 아가?” 으음. 아니구나.
나는 야무진 꿈을 빠르게 접었다. 나갔다 온 것을 언급한 시점부터 그 건 물 건너7갔다.
“우리 산야는 자애롭기도 하지. 백 성들의 삶을 그리도 잘 살피니 서라 국의 미래가 밝구나.”
“그럼요. 제가 늘 잠행을 나가는 것이 사심이 아니라•••
“보고 느낀 것을 실천으로도 옮겨 서, 백성들을 위한 좋은 정책을 말 해 주는 것도 좋을 듯한데. 어떻게 생각하니?”
은근슬쩍 넘어가려던 내 시도는 엄 마의 부드러운 말에 곧바로 짓눌려 버렸다.
암요. 어머니께서 다 맞으시죠•••
“아가?”
“잘못했어요•••
나는 결국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 다.
이제 성년도 지났는데 아직도 어린 애 취급을 받는 것 같았다.
••••잘못한 건 잘못한 거니 할 말 도 없다만.
빠른 시인에 엄마가 잘게 웃었다.
“그래서. 오늘은 무엇이 그리 마음 에 안 들어 태자 전하께서 황궁을 나서셨을까?”
“이유랄 게 있나요. 늘 같지요.”
일하기 싫고 놀고 싶어서 그런 거 지 무뇬•
우리 아가가 늘 노력하고 있는 것 은 알지만, 조금만 더 힘내 보자꾸
나.”
“예에•••
“네 스승들이 아주 벼르고 있던데. 내일은 고생 좀 하겠구나.”
그래요. 세상에 공짜는 없지요. 오 늘 놀0갔으니 내일 일 하는 거지.
“그래서, 정말로 어찌 오셨어요?” 나는 애써 타협하며 화제를 돌렸 다.
“네게 전해 줄 좋은 소식이 있단
다.”
좋은 소식이라. 뭐가 있지? '선물이라도 사 두셨나.
나는 엄마의 품에서 떨어져 반대편 의자로 걸어가며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어진 엄마의 말에 나는 의자에 앉지 못했다.
“고운이 돌아왔더구나.”
나는 체통도 잃고 복도를 빠르게 가로질렀다. “전하. 위험합니다!” “뛰지 마셔요!”
치맛자락까지 야무지게 쥐고 뛰는 나를 보는 궁녀들마다 경악해서 나 를 말렸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말을 제대로 들을 상황이 아니었다.
'고운이 돌아왔어!'
분명 오늘 반야가 거의 다 끝났고, 빠른 시일 내에 볼 수 있다고 했는
그에게 약간의 배신감을 느꼈지만, 지금 내게 더 중요한 것은 고운을 드디어 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엄마에게 고운이 동궁에 있는 제 방에 있다는 말을 들은 나는 엄마에 게 화급히 인사를 하고는 방을 뛰쳐 나왔다.
무려 11년 만이다.
이 매정한 녀석이 서신도 꼭 일주 일에 한 번만 보내서 내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고운이 방 앞에 도착한 나는 숨을 골랐다.
고운이 방은 내 방에서 멀리 떨어 져 있지 않았고, 예전의 모습 그대 로 늘 청결하게 유지해 두었다.
그래도 차마 들어가 보지 못한 방 이라 나도 11년 만에 온 곳이었다.
발걸음 소리가 그리 요란했으니 내 가 왔음을 모를 리가 없다.
나는 잠시 기다린 뒤 문을 열었다. 고운을 보자마자 안아 주려 했지 만, 환하게 웃으며 들어간 나는 멈 짓1했다.
방 안에는 예상외의 사람이 있었
다.
“반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린 나는 그와 탁자 위의 멱리를 번갈아 바라 보았다.
그는 아까 나와 만났을 때와 똑같 은 복색을 하고 있었다. 의심할 여 지도 없는 반야였다.
“어찌 여기 계세요?”
“서라국의 대자 전하를 뵙습니다. 부디 말을 낮춰 주십시오.”
얼떨떨한 물음에 정중한 대답이 돌 아왔다.
저 양반은 놀라지도 않나.
•••나를 알고 있었느냐?” 반야가 조용히 웃었다. 알고 있었 다는 의미였다.
맥이 탁 풀렸다. 나만 진심이었지.
잘 속였다고 생각했는데.
'그나저나 여기 왜 있지.'
당연히 고운이 있을 줄 알고 들어 온 방 안에 반야가 있으니 당황스러 을 따름이다.
마호 가의 사람이고, 고운을 아는 듯했으니 함께 온 동행인인가? “그 아이는 어디에 있느냐?” “어떤 아이를 말씀하십니까?” 아, 자꾸 아이라고 하네. “고운 말이다. 어마마마께 고운이 돌아왔다 들었는데. 자리를 비웠느 나?”
돌아오면 나부터 찾을 줄 알9갔는 데, 이 녀석은 어딜 간 거야.
만나면 꼭 툴툴거려야겠다고 생각 하는데, 반야가 여상히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 저잣거리에 서는 제 이름을 제대로 일러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역시나 좋은 목소리. 그런데 이름 이 그 이름이 아니라고? “허면 네 이름이 무엇이냐?”
“고운입니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 곧바로 되물었다. 그러자 반야, 정확하게는 고운이라는 남자가 빙그레 웃었다. “한때 새벽이라고도 불리었지요.” 새벽, 고운.
그건 정확하게 한 사람을 가리켰
다.
“그럼 네가•••
말을 잇지 못하는 나에게 고운이 다가왔다. 딱딱하던 얼굴이 활짝 접 혔다.
그를 만난 뒤 가장 환한 미소였다. 그 얼굴에서 어릴 적의 고운이 보였
다.
“약조를 지켰습니다, 마마.”
난데없는 사람이 고운이 방에 들어 와 있다는 것에 한 번, 사실 그 사 람이 고운이라는 것에 한 번.
그리고 방금 저 미소에 한 번.
세 번이나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 에 정신이 얼얼했다.
그러니까 네가•••  “고우9”
“예, 마마.”
태자로 책봉된 뒤 오랜만에  호칭. 그러고 보면 왜 의심을 하지 못했 을까.
똑같은 색채에, 나를 아는 듯했던 말투. 무뚝뚝한 성격과 가문의 이름 까지.
“어, 이어•••
몰랐던 게 이상하기는 한데, 정말 까맣게 몰랐던 나는 뒤통수가 너무 아팠다.
“잠시, 나갔다 와야겠구나.”
나는 바스러진 정신을 수습하기 위 해 애써 말을 꺼냈다.
“어마마마를 제대로 배웅하지 못했 어. 잠시만 기다리거라.”
고운은 나를 붙잡지 않았고, 나는 그대로 고운의 방을 빠져나왔다.
고운이 방 앞에는 궁녀들이 옹기종 기 모여 있었다. 내가 나오자 그들 이 곧바로 내게 달려들었다. “놀라셨지요!”
“깜짝 놀라시면 더 기뻐하실 것 같 아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어떠셨어 요?”
“정말 몰라보게 컸더군요. 예전의 그 꼬맹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 어요?”
상기되어 재잘거리는 궁녀들 사이 에서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용히 하거라, 다들••  아까의 내 만행들이 떠오른다.
그러니까, 저잣거리에서 반야라던 고운을 만났을 때의 일이.
정말이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나 재한테 황궁으로 사주단자 넣으라고 했는데.'
고운은 나를 보고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11년이나 지났지만 곧바로 나를 알아본 것이다.
그러니까 난 재더러 나한테 청혼하 라고 수작 부린 거잖아.
방금 전의 일들이 물밀듯 떠올랐 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잘생겼다고 도 했고, 살수로 오해도 했고, 얼굴 도 빤히 봤지.
나는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어지간히 주책이었잖아!' 물론 모두 사실이기는 했다. 상대 가 고운이라는 게 문제였다.
할 수만 있다면 과거의 나에게 돌 아가 황궁으로 끌고 들어오고 싶다. 아니, 그냥 오늘 나가면 안 됐던 거였어.
자괴감에 몸부림치던 내 머릿속에 문득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재 다 알고 있었던 거지?' 그러면서 뭐, 반아?
나는 다시 호기롭게 고운이 방문을 열어젖혔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고운이 아 까의 모습 그대로 나와 눈이 마주쳤 다.
화를 내려고 했는데, 한동안 주인
이 없었던 방에 누군가가 있는 모습 이 혹 다가왔다.
그래. 돌아왔구나.
그걸 인식한 순간 화를 내려던 의 지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있다.
나는 고운에게 다가가 그를 꼭 끌 어안았다.
“어서 와. 잘 돌아왔어.”
훌쩍 큰 그는 이제 내 품 안에 다 들어오지 않지만, 고운에게서는 여 전히 어릴 때와 같은 풀꽃 향기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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