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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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하겠다는 기별에 대한 대답은 금세 돌아왔다.
나는 어렵지 않게 화룡궁에 갈 수 있었고, 황제를 마주했다.
“산아. 무슨 일이니?” 잠깐 사이에 해쓱해진 그녀가 웃으
며 나를 맞았다.
다과상이 차려지고 내 앞에 다완이 놓였다. 차를 보자 또다시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다.
결국 나는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 고 다완을 밀었다.
언제 안정되었나는 듯이 심장이 불 안정하게 뛰기 시작했다.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그녀를 똑 바로 마주했다.
“서 대륙에 머물렀을 때, 꿈을 꿨 이요.”
내 과거의 기억을 되찾았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나는 모호하게 말 을 시작했다.
“어릴 적의 꿈이었는데, 그리•••  좋은 꿈은 아니었어요.”
황제는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일 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불 위를 걷는 심정으로 재자 입을 열었다.
“열세 살 때였는데, 제가 공주가 아니었어요. 화선궁으로 거처를 옮 기지도 않았고, 지금의 궁녀들이 저를 모시지도 않아서••  또박또박 설명하려 했는데 횡설수 설 말이 나갔다. 나는 자마 그녀를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말할수록 기억들이 머릿속을 돌 아다닌다. 더 길게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제가 죽었어요.”
“그리고 그걸•• • 모두가 방관했 어요.”
자마 당신이 내 죽음에 아무 신 경도 쓰지 않았다고 꼭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 두루뭉술하게 말한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그저 꿈일 뿐인데, 이상하죠.”
지나간 과거, 이제 일어나지 않을 일.
“고작 그릴 뿐인 일에 신경 쓸 필 요가 없는데••  하지만, 나는 그걸 기억하잖아.
그 기억을 생생하게 가지고 있는 나는 이렇게 살아 있는데.
정체 모를 감정이 발끝을 타고 올랐다. 나는 그것을 애써 억눌렀
다.
“그런데 엄마, 나는•••
그 호칭이 처음으로 입에 담은 것처럼 껄끄러웠다.
입 안에 모래알을 굴리는 것 같 은 그 느낌이 너무 생경해서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끔찍한 꿈이었구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 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무엇 때문에 그런 꿈을 꾼 것인지 는 모르겠지만•••••• 그건 그저 꿈일 뿐이야, 아가.” 언제나처럼 나를 달래는 목소리에 반발심이 일었다.
당신은 정말 이상한 점을 아무것 도 느끼지 못하는 건가?
내가 고작 악몽을 꿨다는 것만으 로 이런 적이 없었잖아. 그런데
나는 이를 악물고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었다.
장백한 낮으로 제 손을 꾹 움켜 쥐고 있는 모습이 단두대 앞의 죄 수 같았다.
•••알고 있었군요.”
전에 없이 떨리는 눈동자를 본 순간, 나는 그렇게 말했다.
저건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태도
가 아니다. 오히려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모습이었다.
“꿈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죠?” 내 물음에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뜨였다.
부정조차 하지 못하는 모습에, 누 군가 나를 절벽 끝으로 떠미는 것 만 같았다.
“당신도 전생을 기억하고 있어 요?”
결국 물음을 던졌다. 덮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내 물음에 그녀가 시선을 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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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여전히 불안정하게 떨리= 동자로 나를 본다.
•••그래.
발밑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웃음도 울음도 나지 않았다. “언제부터요?”
“산야, 너를 속이려고 했던 것이 아니야. 나는
“속이려 했던 것이 아니라고요?” 메마른 웃음이 터져 나왔다.
속이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니.
방금까지도 내게 그저 꿈이라고 했 던 사람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하세요?”
“그걸 모두 기억하면서, 지금까지 감쪽같이 속이셨잖아요.” 차곡차곡 쌓아 왔던 추억들이 검 게 물든다.
그건 당신의 속죄였을까?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고, 어떻게든 내게 잘해 주고 싶었던 걸까? 그 무관심으로 내 삶을 갈기갈기 찢어 두고서, 아무렇지 않게?
“한 번도 제게 미안하지 않으셨어 요?”
머릿속이 차가웠다. 아무런 생각 도 들지 않았다.
“그저 사랑하지 못했을 뿐이고, 이번 생의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니까, 그것으로 상관없다고?” “산야, 그건-
“어떻게 잊으셨어요. 대체 어떻 게.”
씹어뱉듯 말을 내뱉었다. 나는 분 노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맞아요. 폐하께서 저를 죽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가뜩 이나 용의 저주로 아무도 사랑하 지 못하는 분이시니, 달라붙는 아 이가 귀찮을 만도 했지요.”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 저를 돌보 셨다는 것도 알아요.”
그녀는 내게 한 번도 손을 대지 않았다.
적절한 선에서 다정했고 신경을 씨 준 일도 많았다.
그럼에도 나는 기윤보다, 나를 괴 롭힌 후궁들보다 더더욱 황제를 용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당신이 저를 딸 이라고 생각하셨다면 그걸 그냥 넘겨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요?” 기윤보다, 후궁들보다 황제를 더 사랑했으니까.
아무런 교류 없는 타인이었다면 내게 무관심했다는 것이 어떤 문 제가 될까.
하지만 그녀는 내 어머니였다. 천 친히 스며든 만큼 떼어 놓으려면 내 생살을 째듯 아플 상대였다.
•••기억이 떠오른 것은, 내가 천 룡으로 각성했을 때였다.”
그녀는 쓰러질 듯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주 오래전, 우리가 가족이 된 지 얼마 되지 않0갔을 때.
나를 존중해 달라며 내가 처음으 로 큰소리를 내었을 때의 얼굴과 꼭 닮아 있었다.
“네게 미안했다. 나 또한 과거의 내 잘못들이 끊임없이 떠올랐어. 하 지만 네게 말해 줄 수가 없었어.”
“그때의 너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고, 그것만으로도 행복해 보였 으니까.”
나를 위해서 나를 속였다. 그 말 이 기가 자면서도, 이해가 됐다.
“그럼에도, 해야만 했어요.”
“거짓 위에 쌓아 올린 애정이 무 슨 의미가 있나요?”
이미 너무 잘못되있다. 시작부터 뒤틀린 것을 너무 길게 걸어온 뒤 에 깨달았다.
“어떻게 하셔야 제 마음이 풀릴지 모르겠어요.”
“이미 속죄하기에도 너무 늦었어 요.”
울 듯이, 꺼져 가는 목소리로 끼 내 놓은 말에 그녀가 입술을 깨물 었다.
“적어도, 제가 전생을 기억해 내 있을 때 또다시 거짓을 말하지는 말았어야죠.”
아마 그녀는 내 말을 죽도록 곱 씹을 것이다. 후회하고 괴로워할 것을 안다.
신물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나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상이 거꾸로 뒤집힌 것 같았다. 실낱같던 용기마저도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화룡궁을 나와 정처 없이 걷던 내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종내에는 뛰기 시작했다.
유일한 내 안식처가 보고 싶었다. 그 애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것이란 걸 알면서도 조급해져서, 나는 숨이 막히게 뛰었다.
나를 부르는 소리들이 멀었다. 온 세상이 흐릿했다.
문을 열고 내 방 안으로 발을 내 디뎠을 때, 유일하게 선명한 이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엄마가 알고 있었어.”
숨을 가다듬을 것도 없이 목구멍 을 틀어막던 말이 튀어나왔다.
“그 사람도, 전생을 기억하고 있 있어.”
무엇이라도 받아들이려고 했는데, 원망만 한 움큼 짊어졌다.
다시 제자리다. 나는 여전히 아무 것도 모르겠다.
분노에 눈이 멀어 닥치는 대로 쏟 아내고 왔지만, 당신을 원망하는 건 맞을까?
누굴 원망해야 하고, 또 얼마나 원 망하면 괜찮아질 수 있을까.
대체 누구의 잘못일까.
나를 황궁에 보낸 기윤?
후궁들?
그도 아니라면, 결국엔.
고운의 손을 꾹 잡은 나는 그 손 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의문이 있었다.
“너는 왜 내 말을 믿었어?"
어렴풋이 짐작 가는 일이 있었지 만, 굳이 그에게 물었다.
•••첫 번째 생의 전하를 뵌 적 이 있습니다.” 고운이 나를 가만히 바라본다. 순
순히 내 뜻에 따라 주었다.
“어릴 적, 제가 마호 가의 영지로 떠나지 않았을 적에.” 역시 맞았구나.
나 또한 그 아이를 기억한다.
내게 다짜고짜 편지를 써 보냈던 아이.
안타깝고 두려웠고 속내를 알 수 없었던 그 아이.
나는 울 듯이 얼굴을 일그러트리 며 웃었다.
밤의 그 아이가 늘 깨어났을 때, 고운은 하루도 빠짐없이 그 곁을 지켜 주었다.
언제나 외로웠던 그 아이의 밤이 외롭지 않았던 것은 고운의 덕이
다.
너는 그때에도, 지금에도 나를 구 하는구나.
하지만 고운에게 굳이 이것을 물 은 이유는 그에게 감사하기 위해 서는 아니었다.
어릴 적 밤마다 깨어났던 그 아 이가 첫 번째 생의 나라는 것을 확인했으니 되었다. “고운. 잠깐만 나가 있어 줄래?” 난데없는 축객령에 고운이 불안 한 듯한 얼굴을 했다.
나는 그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웃었다.
“괜찮아. 혼자 있고 싶어서 그래.”
고운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듯했지 만,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못내 뒤를 돌아볼 때까지도 웃고 있던 나는 문이 닫히자마자 웃음을 지웠다. 탁자에 세워져 있는 면경에 싸늘한 얼굴이 비겼다. 잠시 그에 시선을 주었던 나는 면 경을 닫았다.
이제 나도 언령을 쓸 수 있으니, 아마 가능할 것이다.
나는 숨을 한 번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첫 번째 생의 나를 만나게 해 줘” 기묘한 울림의 목소리.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주위의 풍경 이 새하얗게 변했다.
눈이 시려 감0갔다 뜬 내 눈앞에는 검은 머리칼의 여자아이가 서 있었
다.
왜소하고 우울한 얼굴의 아이. 보랏빛 눈동자가 나를 보고 어색하 게, 하지만 반가운 듯이 휘어진다.
“안녕, 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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