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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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해 주신 덕에 괜찮습니다, 폐 하.
나는 조용히 답했으나, 예화는 여전 히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 염려 하나로 아픈 다리와 뜨거 운 볕이 사라질 리가 있느냐.  무래도 회랑 하나를 만드는 것이 낫 겠구나.” 아니, 뭐 그건 맞는 말이긴 한데.
•••회랑? 그거 궁에나 딸려 있는 지붕 있는 복도 아나?
나는 많이 가 봤자 어마무시하게 큰 양산이라 생각한 나 자신을 질책 했다.
이 망할 스케일은 어째 익숙해지지 가 않아.
어이가 없는 나머지 헛숨을 홀리고 있자 황제가 고개를 돌렸다.
그 모양새가 당장이라도 회랑을 지 으라 명할 것 같아 나는 앞뒤 잴 것 없이 입을 열었다.
“폐하.”
“다리도 아프지 않고, 볕도 이 정도 면 아주 좋아요. 그리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내 말에 예화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얼굴이 영 믿음직스럽지 않아 불안했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녀는 금세 얼굴을 펴고는 자신의 뒤에 시 립한 궁녀에게 손짓했다. 그 모습이 무섭게도 익숙해 나는 소름이 돋은 팔을 감췄다.
•••이번엔 또 뭐지, 대체?
“오늘은 네게 줄 것이 있어 왔단
다.”
예화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꽤나 대단한 것을 말하는 것 같은 어조였으나 나는 그게 씩 놀랍지 않 았다.
수다를 떠는 것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예화는 어느 날부 터 손에 하나둘씩 무언가를 들고 왔 다.
어느 날은 음식이었고, 어느 날은 장신구, 대개 그런 식이었다.
다만 문제라면 그 값어치가 점점 올라간다는 것에 있다.
농담이 아니라, 이러다 어느 날 작 은 나라라도 하나 쥐여 줄까 두려웠
다.
그리고 역시나, 예화가 궁녀에게서 상자 하나를 받아 들고는 기대감 넘 치는 얼굴을 했다.
“이것 보아라.” 왜 받는 나보다 본인이 더 기대하 는 목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나 는 그 상자 안에 들어가 있을 물건 을 추리하느라 바빴다.
저만한 상자면 옷이나 장신구. 아니 면 신발.
설마 저만한 보석은 아닐 테고.
문서 같은 경우는 저 상자에 담기 에는 너무 작고.
•••아닌가. 저 상자를 가득 채울 만큼 무언가의 매매 문서가 들어 있 는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쳐 등허리에 식 은땀이 맺혔을 때, 황제가 잔뜩 상기 된 얼굴로 상자를 활짝 열었다.
상자를 열자마자 진한 향기가 혹 풍겨 왔다.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던 나는 상자 안에 든 내용물을 보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엔 꽃이구나.' 상자 안에는 노란 프리지아가 가득 들이 있었다.
서 대륙에서 나는 프리지아는 분명 오래전에 꺾였을 텐데도 용케 싱싱 했다.
상자를 꽉 채운 문서가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남몰래 한숨을 내 쉬었다.
“서역에서 가져온 기화요초다.” 머리 위에서 어딘가 시무룩해진, 하 지만 여전히 기대에 찬 예화의 목소 리가 들렸다.
사실 씩 마음에 들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동대륙에 있는 웬만한 것들은 대부 분 내 궁에 있었기에 그녀가 내게 선물하는 것은 서 대륙에서 가져온 선물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모두 내가 전 생에서 질리도록 본 것이었다.
그래도 프리지아는 참 예뻤다. 전생 에서 가끔 보았던 기억이 났다. “내 눈에는 참 어여쁘던데 말이다.”
'잔아. 이것 와. 이건 일가가 가장 조C)/呑口-ZZÖ/Öh八 
“마음에 드느나?” 그 말에 나는 퍼뜩 정신을 자렸다. 차가운 물속에서 건져진 것처럼 주 위를 살피고, 숨을 두어 번 가다듬고 는 고개를 들어 빙긋 웃었다. “예. 감읍합니다, 폐하. 언제나 이리
챙겨 주시니 폐하의 은혜가 하해와 같습니다.” 제법 익숙해진 찬사가 흘러나왔다. 그녀에게서 손을 뻗어 상자를 받아 든 나는 그것을 그대로 내 뒤에 서 있던 여류에게 넘겼다.
다시 꺼내 보지는 못할 듯했다.
예화는 내게 선물을 주고는 그 선 물을 한참을 자랑하고는 했다. 어디에서 온 무엇이라느니, 어떻게 구했다느니 하는 것들을 말이다.
생색을 내는 건지 유통 과정을 밝 히는 건지 알 수 없는 설명이지만 이제는 연례행사처럼 익숙했다.
익숙해진 덕에 별다른 감상은 없었 지만, 오늘은 좀 떨떠름했다.
••아무래도 늦을 것 같네.' 미리내가 씩 달가워하지 않을 텐데. 그렇다고 뾰족한 수도 없었다. 마냥 무시하고 지나가기엔 황제라는 그녀 의 직위가 걸렸다.
나는 한숨 대신 숨을 한 번 내쉬고 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세 개 정도의 루틴인 매크로 같은 답변이라도 나는 내놓아야 했다.
내 대답이 없는 탓인지, 재잘재잘 떠들던 그녀가 조용해졌다.
일순 찔끔한 나는 입가에 미소를 띠고 고개를 들었다.
황제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척 보이 게 하기 위한 미소였지만, 그것은 그 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말라붙은 진 흙처럼 부서지고 말았다.
“마음에 들지 않느나?” 당당하던 고개가 떨어지고, 눈매가 무겁게 가라앉은 채 입술이 다물린
얼굴.
그건 예화의 표정에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나는 웃는 것도 잊고 입을 뻐끔거렸다.
평소 같았다면 호당하게 웃으며 이 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설명할 인간 이, 왜 저렇게 울 것 같은 얼굴을 했 지?

예화가 축 처진 목소리로 담담히 말했다.
해맑지 않은 목소리를 오랜만에 들 어 어색했다.
완전히 어색한 얼굴은 아니었다. 하 지만 예화의 얼굴로 보는 표정이라 기에는 몹시도 괴리감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그녀는 서운하다는 얼굴 을 하고 있었다.
“여전히 내가 어렵고 싫구나.” 황망한 내 얼굴에 황제는 그제야 설핏 웃었다.
하지만 슬퍼 보이는 눈은 여전했다. “이딜 가는 길이더냐?”
“초비 마마께오서는 귀비 마마를 뵈러 가는 길이시옵니다.” “잘 다녀오렴.”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내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등을 돌려 사라졌 다.
평소 같았으면 잔뜩 반가워할 황제 의 퇴장이었으나, 나는 한동안 넋을 놓고 그녀의 등만을 바라보았다.
그 뒤로 무슨 정신으로 화령궁에 간 것인지 모르겠다.
이끄는 대로 걸었고 안내하는 대로 앉았으며 주는 대로 마셨다.
예화가 내 행동에 화가 난 것은 이 해할 수 있다.
하지만 상처를 받았다는 것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웠다.
연기인가?
하지만, 그렇게까지 내 환심을 사서 얻을 수 있는 게 뭐가 있다고.
“산아.” 왜 저러지, 진짜. “산아.” 뭐 때문에 대체••  “아가. 괜찮니?”
“엄마야!” 어깨에 얹어진 손에 나는 소스라지 게 놀랐다.
파드득 어깨를 떨자 걱정스러운 빛 을 떤 하늘색 눈동자가 보였다.
그제야 아까 들은 목소리를 기억해 낸 나는 슬쩍 눈치를 보다 고개를 꾸벅 숙였다.
••••송구합니다.”
그런 내 모습을 미리내가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숨을 쉬는 것도 같았고, 울적해 하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더 이상 그것을 문제 삼지 않고 다른 이야기 를 꺼냈다.
“황제 폐하를 만났다 들었다.” 걱정스러운 그 목소리에 나는 참았
던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맞아.
황제. 내가 지금까지 한참을 고민하 게 만든 장본인.
그 인간 대체 왜 그러는지 너는 아
괜히 심란해 입술을 우물거리자 미 리내가 잠시 주저하다가 내게 물었 다.
“산야. 혹 폐하께서 네게 크게 잘못 한 일이 있니?”
•••아니요?”
크게 잘못한 일은 없지.
굳이 고민하지 않고도 대답할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미리내의 침울한 얼굴은 여 전했다.
“아가. 폐하께서 서투르시긴 하지만 널 진정으로 아끼고 계시단다.” 어, 음. 그건 아닐걸요.
나는 그 말을 애써 삼켰다.
“폐하의 무엇에 네 마음이 상했는 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만 봐주련. 미리내의 눈에는 내게 쩔쩔매고 있 는 예화가 퍽 가여운 모양이었다.
하긴, 속사정을 모른다면 그렇게 생 각할 법도 했다.
그렇지만 그 호의를 진심으로 받아 들인다는 건 내게 너무 어려운 일이 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불가능했다.
내가 이 세계의, 그리고 아륜 가의 비밀을 알고 있는 이상은. “귀비 마마. 폐하를 사랑하시나요?” 대답하는 대신 질문을 던지자 미리 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수줍게 웃었다. 그것만으로도 대답은 충분했 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속이 불편 했다.
미리내가 예화를 사랑한다는 것에 대한 질투는 아니었다.
다만 아주 조금, 걱정될 뿐이다.
황가, 아륜 가의 이능은 베일에 싸 여 있었다.
개국공신 가문인 일곱 가문 또한 용에게 축복받았지만, 그 일곱 가문 의 용을 능가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륜 가의 용이었다.
모든 이능의 시초인 용에게 축복을 받았으니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강 대한 힘이라는 소문만 알음알음 돌 았고, 실제로 황가의 이능이 밝혀진 적은 없었다.
황제가 이능을 사용하는 모습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원작을 읽은 나는 황가의 이능을 알고 있다.
그건 뭐라고 명명할 수 없는 추상 적인 것이었다.
또한 미묘하게 존재했던 소설 속의 허점을 어느 정도 메워 주는 것이기 도 했다.
세상의 모든 이에게 사랑받지만, 동 시에 그 어떠한 이도 사랑할 수 없 느 기
그게 아륜 가, 예화의 이능이었다.
어째서 귀하게 큰 귀족 자제들。
후궁에 처박아 두고 마음껏 이용할 수 있었을까.
엄청난 힘을 가진 여란 가가 부와 권력을 노리더라도 황가는 건드리지 않았던 이유는?
예화는 여주인공답게, 그녀가 가진 이능으로 모두에게 사랑받았다.
그렇기에 후궁들은 공평하게 떨어 지는 총애에도 만족했고, 기윤 여란 은 결코 황제를 끌어내리지 못했다.
아륜 가의 선조들은 자신들의 이능 을 알고 있었고, 그것이 티 나지 않 도록 후계를 교육했다.
누군가를 아낄 줄 모르는 그-근1-0  역설적이게도 교육을 통해 가장 완 벽한 황제가 되었다.
그들의 모든 행동은 백성들을 위한 것에 초점이 맞취져 있었고, 아무도 사랑할 수 없기에 치우침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수를 위한 황제 였다.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황제. 그런 그녀를 죽도록 사랑하는 후궁들.
정말 소설 같은 관계였다.
하지만 그들은 살아 있다. 여기, 내 앞에.
미리내는 그 사실을 알고 있을까.
예화는 소설 속 여주인공답게 모두 에게 사랑받는다.
적어도 이 세계가 내가 아는 소설 속인 한 변하지 않는 진리였다.
끝끝내 예화에게 사랑받지 못한다 는 사실을 알게 된 미리내는 어땠을
까.
'사실 이해는 잘 안 돼.
누군가를 좋아한 경험은 있었다. 하 지만 사랑에 목숨을 거는 건 정말 이해되지 않9갔다.

그래 봤자 타인이고, 그 사람이 아 니면 죽을 것 같던 마음도 시간이 지나면 식어 간다.
누군가를 좋아하다 못해 그 사람이 날 좋아하지 않아 죽고 싶어진다? 그건 정신병 아닐까.
그래도 나는 그가 조금 걱정스럽다. '지금 내 주제에 누글 걱정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황제를 사랑 하나는 물음에 수줍게 웃던 그 얼굴 이 못내 눈에 밟혀서.
그렇게나 헌신한 사랑이 아무것도 돌려받지 못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안 미리내는 어떻게 될까.
그런 생각을 하던 나는 나도 모르 게 쓰게 웃었다.
그렇게 싫고 무서워하던 때가 엊그 제 같은데, 어느새 이 인간을 걱정하 고 있다니. 정이란 참 무서웠다.
미리내가 나에게 부탁한 것은 이것 이 처음이었다.
그는 단 한 번도 나를 강제하지 않 았다.
그가 가여웠으나 나는 내가 더 소
중한, 어쩔 수 없는 인간이었다.
그 유일한 부탁을 들이줄 수 없어 미안했다. 

17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