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르륵, 광!
다급한 발걸음 소리 뒤로 문이 광 열렸다.
나는 열린 문 사이로 등장한 검은 머리의 여인을 보고 깜짝 놀랐다. 예화였다.
다급하고 절박한 녹회색 눈동자가 곧장 나를 향했고, 나를 확인하자마 자 그 눈동자에 안도가 들어찼다.
“아, 세상에.” 무어라 할 새도 없이 그녀가 나를 끌어안았다.
안도를 담은 목소리가 한숨처럼 들 렸을 때, 나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발걸음 소리는 하나였고 방으로 들 어온 사람도 하나였다.
다른 궁녀들이나 호위는 없었고, 이
방에는 기윤이 있다.
그것도 아주 기묘한 미소를 지은 기윤이.
아, 아니 이 사람아!
어쩌자고 황제라는 사람이 여길 맨 몸으로 왔어.
이능도 물리적인 게 아닌데 다치거 나 죽으면 어쩌려고! 품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자 예화 가 나를 놓아주었다.
하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 에 그녀는 내 얼굴을 덥석 붙들었다.
“무슨 일 없었느냐? 다진 곳은?” 예화가 내 얼굴을 이리저리 돌리고 팔다리도 확인했다.
손길은 다급했지만 조심스러웠다.
내가 얼떨떨해 할 뿐 다친 곳이 없 다는 것을 깨달은 예화가 길게 한숨 을 내쉬며 나를 다시 끌어안았다. “이제 괜찮다. 어미가 왔지 않아.” 토닥, 토닥. 예화가 일정한 속도로 내 등을 토닥였다.
“많이 무서웠겠구나.”
무서운 순간도 있긴 했지만, 나는 속으로 신나게 궁시령 댈 만큼 아무 렇지 않았었다. 그랬었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눈 앞이 뿌예졌다.
눈물이 한 방울 뚝 흘러내렸다.
내가 울어 놓고 내가 더 당황스러 웠다. 어안이 벙벙해 입만 벌리고 있 는데, 예화가 나를 번쩍 안아 들었
다.
“이제 다 괜찮아.”
엉덩이를 받치고 어깨를 껴안은 자 세가 익숙했다. 그리고 아주 편했다.
아까 기윤과 완전히 비교될 만큼.
예화가 나를 안은 채 기윤과 마주 보았기에 나는 기윤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분위기가 얼어붙었다는 건 여실히 느껴졌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기윤이있다.
“여란 가의 기윤이 폐하를 뵙습니
다.”
웃음기 어린 목소리였다. 날 안은 예화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화가 나 힘 조절을 하지 못했다기 보단, 혹시 놓칠까 나를 꼭 붙드는 몸짓이었다.
“궁에 쥐새끼가 들어왔구나.”
“여식을 그리워하는 아비의 애끓는 마음을 어찌 그리 곡해하십니까.”
“이 아이는 서라국긔0 고又0丁1며 짐 의 유일한 딸이다. 감히 짐의 앞에서 네가 이 아이의 아비임을 주장하느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근데 다른 의미로 맞을 것도 같아 나는 그녀의 어깨를 쿡쿡 찔렀다.
혼자 맨몸으로 와 놓고 대체 객기야.
그러다 진짜 살해당하면 어쩌려고! 그 손짓에 예화가 멈칫했다. 그녀가 답답한 숨을 내쉬는 사이 기윤이 서 글픈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찌 천륜이라는 것이 그리 무 자 르듯 끊기겠습니까. 여식의 머리카락 한 올 보지 못한 아비의 에끓는 부 정이니 부디 너그러이 용서하소서.” 숨을 크게 내쉬고는 조금 누그러진, 하지만 여전히 차가운 목소리로 일 갈했다.
“나가거라. 지금 당장.” 황제의 명에도 기윤은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는 우리에게 한 발짝 다 가왔다.
저벅, 하는 발걸음 소리로 알 수 있 었다.
“폐하. 참으로 매정하십니다.” 웃음기 없는 음울한 목소리. 또 한 발짝. 몸 위로 그림자가 드리 워진다.
웃음기 없는 목소리에 예화가 나를 더욱 꼭 껴안았다.
제 품에 나를 파묻고 양팔로 나를 꽉 감싼다.
마치 나를 숨기려는 것처럼.
주먹을 꽉 움켜쥐었을 때, 아까와 같은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폐하!” 익숙한 목소리였다.
문을 바라보고 있던 터라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그들을 볼 수 있었다. 미리내와 가람이었다.
그들의 등장에 그제야 기윤이 피식 웃으며 물러났다.
그는 가벼운 사과를 남기고 유유히 예화를 지나쳐 갔다.
그러면서도 내게 시선을 둔 그가 자애로운 아버지처럼 웃었다.
차가운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금방 또 보자꾸나, 산아.”
그 다정한 말에 나는 억지로 입꼬 리를 웃었다.
탁.
이 닫히며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 다.
이내 완전히 조용해졌을 때, 그제야 온몸에서 힘이 풀렸다.
아, 무서웠다.
이능이 없는 것이 위험하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뼈저리게 느낀 것 은 처음이었다.
예화는 나를 보호하려 필사적으로 끌어안고 있었지만, 그녀 또한 무력 했다.
순간 왈각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 나라에서 가장 강해야 할 황제 였다.
하지만 그녀는 그 자신으로는 아무 힘도 없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그에게 기대 어 지켜질 뿐.
권력이 있다고 한들, 이런 직접적인 위협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거 지?
“산아?” 입을 꾹 다물자 예화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하며 눈을 맞춰 왔다.
제가 당한 모욕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나를 걱정하는 눈동자에 맥이 탁 풀렸다.
아까 같은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 놓고 내 걱정이나 하고 있는 모습이
예화는 내가 화를 낼 대상이 아니 있기에 그녀에게 화난 것은 아니었
다.
그저 가없었다.
당신은 평생을 이렇게 살아왔을까?
이제 너무 익숙해져서, 화도 나지
o十으 마크?
근 1-口 입술을 꽉 깨물자 예화가 걱정스러 운 얼굴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가. 기윤은, 네 아비는••• 예화는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말하지 못할 것을 말하는 사람처럼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가 힘겹게 질 문했다.
“아비가 그리웠느냐?”
갑자기?
그놈을9
“네가 사가에서 그를 많이 따랐다 들었다.”
어안이 벙벙한 나에게 예화가 친절 하게도 설명을 덧붙였다.
아, 그러니까 내가 아까 찌른 게 내 아빠 구박하지 말라는 식으로 들렸다는 걸까. “허나 산아. 그치는•••
나는 말이 더 이어지기 전에 고개 를 내저었다.
한 번으로 모자라 머리카락이 휘휘 날릴 지경으로 고개를 휘저어 대자 셋이 기겁해서 내 머리를 붙들었다.
“아뇨.
세 쌍의 손을 머리에 단 나는 단호 하게 대답했다.
꼴이 우스웠지만 목소리만은 결연 했다.
기윤은 이 몸의 생물학적 아버지였 지만 아버지가 아니었다.
만난 적도 얼마 없는 사람을 피가 이어져 있다는 사실만으로 사랑하게 되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나는 단 한 번도 아버지가 있어 본 적이 없 었다.
전생에서도 엄마가 나를 홀로 기웠 고, 엄마가 죽고 난 뒤에는 보육원에 서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았다.
그런데 무슨 아빠를 그리워해. 난 아빠보다 라면이 더 그리웠다.
전생의 아빠에게도 그런데, 이번이 두 번째로 얼굴을 보는 기윤이 그렇 게 애틋할 리 없다.
내 확답에도 그들의 얼굴은 여전히 침울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잠시 고민하던 나 는 입을 열었다.
“제가 여란 가에서 그리 좋은 취급 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아시겠지요.” 침묵 속에 그들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이 제 아버지의 방관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2' 1-
눈앞이 흐릿해서 눈을 비비니 씹이 묻어났다.
먼지가 묻은 모양이었다.
“그자는 제 아비가 아닙니다. 그리 생각하지 않아요.” 말은 멋지게 맺었는데, 눈이 미친 八이 따가워지기 시작했다.
악, 으악, 속눈썹.
'이거 비비면 안 돼.' 여기선 각막 손상되면 안과도 못 간다.
나는 주먹을 꾹 쥐고 고개를 숙인 뒤 눈을 깜빡였다.
생리적인 반응으로 눈에 고인 눈물 이 주르륵 흘렀다.
한참을 눈물을 떨어트리고 눈이 진 정이 되었을 때, 나는 기묘한 침묵에 고개를 들었다.
뭐야. 왜 다들 초상 난 얼굴이야.
“내가!” 엄마, 깜짝아.
목소리의 주인은 가람이었다.
내 눈높이에 맞춰 다들 옹기종기 쭈그려 앉아 있던 터라 벌떡 일어나 소리친 가람에게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러자 그가 다시 소리졌다. “내가 아버지 해 주마!”
네가? 나는 그를 잠시간 응시하다 시선을 돌렸다.
다들 똑같은 생각이었는지 가람이 당황하며 '아, 아 왜?' 하는 소리가 들렸다.
“산아. 나는 폐하와 이미 성혼을 올 렸단다.” 다음 타자는 미리내였다.
둘이 독대하는 경우가 많아 대부분 안대를 푼 모습만 보0갔는데, 오랜만 에 눈을 가리고 있는 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를 빤히 바라보자 미리내가 부드 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는 폐하의 여식이고 나는 폐하 의 지아비이니, 네 아비가 되기에 충 분하지 않겠니?”
맞는 말이었다. 보통은 어머니의 남 편을 아버지라고 부르니까.
하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그리하면 제 아버지는 열댓 명, 아
니. 스무 명도 넘는데요.” 내 말에 미리내가 여실히 당황했다. 그는 웃는 얼굴 그대로 굳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람이 대놓고 비 웃었다.
그 촌극을 유유자적 구경하고 있는 데 몸이 번쩍 들렸다.
예화가 나를 안아 든 것이다.
그녀는 이제 꽤나 능숙하게 나를 안아 추슬렀다.
안긴 품이 아까처럼 편안했다.
“아비가 없어도 괜찮다. 어미가 있 지 않느냐.”
제법 기분이 좋은 듯이 얼굴에 미 소가 가득했다. 예화가 나를 둥개둥 개 어르며 노래하듯 말했다.
“아비가 백이 되었든, 천이 되었든 그래도 어미는 나뿐이지. 그렇지?” 나는 그 품에 안겨 페넥여우 같은 얼굴을 하고는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그건 아닌데.' 하지만 제가 이게 두 번째 생이라 서 당신은 두 번째 어머니인데요, 하 고 말하기도 뭐 했다.
나는 한숨이나 한 번 내쉬고 말을 삼켰다.
그래. 그런 걸로 해라•••
기윤은 손을 꾹 쥐었다 폈다. 흉터 하나 없는 고운 손이 미약하게 경련
했다.
출입구를 거치지 않고 황궁에 침입 했다. 아무리 그라도 힘의 소진이 겄 다.
그럼에도 수확은 있었다. 황궁의 결 계가 생각보다 더 약해져 있었다는 것
본래라면 그의 힘을 다 쏟아붓더라 도 흠집 하나 내기 어려울 터다.
그리고, 또 하나.
기실 목표였던, 간만에 본 여식의 얼굴이 떠올랐다.
기묘하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주인 을 따르는 개처럼 환한 얼굴.
기윤의 얼굴이 묘한 빛을 띠었다.
본가에 있을 때에도 그랬지만, 그 아이는 이상했다.
혹 쓸모가 있을까 싶어 다정하게 대해 준 것에 감격하나 싶다가도, 언 뜻 비치던 차가운 눈.
지금껏 자신을 방치한 아비를 원망 하는 것일까.
잠시 생각하던 기윤은 금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어찌 되었든 산아가 자신에게 호감 을 표하니 고민할 것은 없었다. 口1-
하나 무엇이든 확실하게 해 것이 뒤탈이 없겠지.
•••마침 황궁의 결계가 약해져 있으니.” 나긋한 목소리가 여란 가의 후원 안을 맴돌았다.
더 이상 떨리지 않는 그의 손에서 못다 핀 꽃봉오리 하나가 떨어졌다. 51화
나흘 동안 놀겠다고 다짐했을 때, 내심 불안했던 것이 있었다. '그게 가능할까?' 예언이었고요, 적중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 여면의 궁에 와
있었다. 탁. 하고 마지막 접시가 탁자 위에 놓였다.
나는 간식들이 가득한 탁자 위를 흘끔 훔쳐보았다.
거절당할 걸 알면서도 슬그머니 가 도 되냐 서신을 넣었더니 의외로 즉 시 그러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럼 문전박대하려나 싶어 속는 셈 지고 갔더니, 아늑하고 화려한 방에 모셔 두고 직접 간식상도 자려 줬다. 사실 감사보다도 의심이 먼저 따랐
다.
•••드시지요.” 여면이 괜히 틱틱대며 내게 권했다.
맛있어 보이기는 했는데, 좀 께름칙 했다.
“유밀과가 맛이 좋더군요. 감주도.”
•••마마께서 오신다 하여 숙수가 솜씨를 부렸습니다.” 독 넣은 건 아니겠지?
슬쩍 눈치를 보자 여면이 유밀과 하나를 입에 넣고 식혜도 벌컥벌컥 들이켰다.
찌푸려진 미간을 하면서도 다 씹이 넘기는 게 독을 단 건 아닌 모양이 었다.
“동궁의 수호신이 될 요량이신 것 같던 분이 어찌 행자하셨습니까.” 식혜를 마시던 나는 티 나지 않게 멈칫했다.
큰맘 먹고 온 건 맞아서 할 말이 없다.
지금까지 남의 궁에 찾아간 것이 손에 꼽는지라 의심스러울 법도 했 다.
나는 목을 가다듬고는 남은 식혜를 다 마셨다. 속셈이 하안 것은 아니라 좀 찔리 기도 했다.
원작을 쭉 정리하며 나는 사실 하 나를 깨달았다.
'여면이 조연이었잖아?' 어쩐지 성이 낯설지 않더라니.
여면은 생각보다 중요한 역할을 맡 고 있었다.
주인공들이 황제나 공작이면 꼭 나 오는 비서 격의 조력자.
매우 똑똑하며 늘 주인공에게 '제발 일 좀 해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는 가없은 고용인.
하지만 주인공과 아주 친하고, 그러 면서도 일은 완벽히 처리하는 천재.
원작에서 그 역할을 여면이 맡고 있었다.
똑똑한 머리, 뛰어난 능력. 거기에 원작에서 서술된 평범한 도덕성.
내 편으로 끌어들이면 참 좋을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