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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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그렇지.”
왜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그런 말 을 하는지.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슬쩍 눈치를 보았고, 가람은 허, 하고 다시 헛숨 을 토해 냈다.
상당히 어이없다는 듯한 의도가 가 득 담겨 있었다. 솔직히 조금 억울했다. 저는 밥 먹 듯이 욕 쓰면서.
“아. 됐어. 어떤 것인지 보러 왔는 데 이미 다 본 것 같네.”
••••송구합니다.” “사과할 일은 아니지 않아?” 아, 저 자식이나 이 자식이나. 뭐 어떡하라고.
“배웅은 필요 없어. 앞으로 내 눈 에 띄지나 마.”
그렇잖아도 앞으로 머리카락 한 올 도 네 앞에 보일 생각 없다.
오늘처럼 이렇게 따로 찾아오지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고개를 숙였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발소리 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저 개새••
발걸음 소리가 완전히 멀어지고 나 서야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가람과 조윤이 시비 아이를 데리고 사라진 뒤, 나는 멀뚱히 침상에 앉 아 있었다. 할 일이 없어서였다.
시기는 대로 잘하겠다고 생각은 했 지만, 그것도 누가 무언가를 시켰을 때의 이야기다.
당장 어제 궁에 들어온 후궁에게 가르질 것은 많겠으나, 이미 먼저 들어온 후궁들이 한 자리씩 꿰자고 있는지라 새로 들이올 후궁에게 가 르칠 정사는 없었다.
그럼 남은 것은 방중술뿐인데, 그 걸 여덟 살에게 가르질 리가.
물론 이건 황궁에 국한된 이야기이 고, 여란 가에서는 산야에게 방중술 을 가르졌다.
혹시 황제가 아이를 좋아할지도 모 른다는 것에서 였다.
순간 소름이 돋은 나는 어깨를 떨 었다.
•••어제 빙의해서 다행이다.' 다시금 그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성인이었지만 그렇다고 방중 술 같은 걸 배우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동시에 조윤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여란 가에서 온 시비를 데려가 줘 서 정말 다행이라고.
그 애가 내 스승일지 누가 아는가. 첩자가 아예 없지는 않겠지만, 그 리고 사실 그 멍청한 시비가 첩자일 확률은 백만 분의 일 정도 된다고 생각하지만, 모든 가능성은 열이 두 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 첩자를 넣었다면 분명 히 날 써먹기 위해 찾아오려고 할
텐데. 아마 그건•••  '모르겠다.' 나는 깔끔히 인정했다. 여란 가에서 첩자를 누구로 넣었는 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
사실 안다고 해도 슬금슬금 피하면 괜히 의심만 살 테니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그럴 바엔 그냥 맘 편하게 모르는 게 낫지.
무엇보다 황실은 분명 여란 가의 후궁을 맞으며 만반의 준비를 다 했 을 것이다.
그 말인즉 내 궁에 있는 모든 사 람들이 황제의 눈과 귀라는 것이고, 바꿔 말하면 그들은 여란 가에서 바 늘로 찌를 곳도 없다고 욕을 할 만 한 인간들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좋았다.
여란 가의 사람이 있으면 날 어떻 게 써먹을지 고민하며 내 행동에 사 사건건 간섭할 텐데, 없으니 더 좋
지.
몇 번 눈을 깜박이던 나는 그대로 풀썩 드러누웠다.
어젯밤에는 시비가 침대를 자연스 럽게 자지해 제대로 자지도 못했다.
잠이 부족한 탓에 예민해져 하마터 면 자고 있는 시비의 머리를 걷어찰 뻔했다.
나중에 좀 조용해지면, 내가 좀 더 컸을 때 아직 걔가 살아 있으면 꼭 다시 엿을 먹여 줘야지.
아까는 너무 성질을 대충 긁었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잠에 빠져들 려 했다.
문밖에서 들려온 목소리만 아니더 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마마. 들어가겠습니다.” 인형 같은 궁녀의 목소리가 들려왔 다.
나는 깜짝 놀라 스프링처럼 몸을 일으킨 뒤 목을 가다듬었다. “무슨 일이나?”
“잠자리 준비를 해 드리겠습니다.”
그 목소리에 나는 조금 소름이 돋 았다. 내가 방금 자려던 걸 어떻게 안 거지?
문이 철문이 아니니까 그림자가 비 졌겠지.
그런 거지•••
“그래.”
내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문이 드르 록 열렸다.
그 뒤로 보이는 궁녀들의 향연에 나는 조금 질린 기분이 들었다.
여섯 명 정도 되는 궁녀들이 각자 손에 짐을 가득 들고 들어왔다.
그들이 일사불란하게 방을 뒤집어 엎는 것을 나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잠자리 준비라고 해서 이불을 정리 하는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아예 침 구부터 침상과 창틀에 달린 휘장까 지 싹 바꾸고 있었다.
그것도 훨씬 화려한 것들이었다. 마지막으로 탁자에 놓여 있던 화병 을 지우고 석류가 담겨 있는 바구니 를 놓은 궁녀들이 내게 꾸벅 인사하 고 방을 나섰다.
다시 혼자 남은 나는 방 안을 둘 러보았다.
아까까지 수수했던 방은 화려한 밀 실처럼 변해 있었다.
모든 것들의 질이 한 단계씩 올라 간 것이 아무것도 모르는 내 눈에도 느껴졌다.
아까 이 침구에서 시비가 잔 탓에 바꾸고 싶은 마음은 있었는데 이렇 게 바꿔 줄 줄은 몰랐다.
이렇게 세심한 배려라니.
최고급 호텔 같은 느낌에 기분이 좋아졌다.
다만 딱 하나 안 좋은 점을 꼽자 면 색이다.
아까는 흰색 계열이었는데, 지금은 모두 눈이 아플 만큼 쨍한 붉은색이 었다.
무시하고 자려고 침상에 누웠지만, 눈만 뜨면 눈앞이 붉었다.
내가 침대에 누우니 있는지 피바다 한가운데에 누워 있는지 알 수가 없 었다.
결국 나는 일이나 문을 열었다. 문 이 열리자마자 문 앞에 서 있던 궁 녀들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나는 위축되지 않으려 어깨를 펴며 조심스레 말했다.
“침구를 다른 것으로 바꾸어 줄 수 있겠느냐?”
“어디가 불민하십니까?” “온통 붉은색이라 눈이 아프구나.” 아, 사극 말투. 어색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미안한 듯 웃 어 보였다.
하지만 그 웃음에 돌아온 것은 불 편한 머뭇거림과 믿을 수 없는 대답 이었다.
송구합니다. 폐하와 마마의 초야 를 위한 것이라•••  뭐라고.
내 얼굴에서 웃음이 싹 사라졌다. 나는 당장이라도 그 말을 한 궁녀 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다시 말해 보라고 하고 싶었지만, 아까 너무 확실하게 들어 버렸다.
•••그래. 알겠다.”
나는 애써 그렇게 대답하고 문을 닫았다.
여전히 피처럼 붉은 방 안의 전경 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조야라는 단어만으로 숨이 막힌다.
일단 나는 이성에자였고, 이 몸은 어렸다.
여덟 살 후궁의 초야를 기어이 치 르겠다는 걸까.
'다 미졌나 배' 나는 속으로 소리를 꽥 내질렀다.
사실 아예 걱정을 안 한 것은 아 니었다.
다만 어제 멀쩡히 넘어가기에 아, 초야는 안 하려는 모양이구나 했지. 이렇게 시간 차 공격을 때릴 줄은.
물론 황제가 정말로 내 몸에 손을 댈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황제는 산야를 아이로서 아끼지만 성적으로는 보지 않는다.
그건 원작에서도 몇 번씩 강조된 이야기였다.
다만 문제라면 언제나, 늘 그렇듯 여주에 미쳐 돈 남주들이지.
미운털이 하나가 추가되있다. 앞으 로 열심히 피해 다녀야 될 것 같았
다.
나는 비틀비틀 침상으로 향했다.
이따가 분명 잠을 제대로 못 잘 게 뻔했다.
나는 어제 처음 본 사람과 함께 누워 쿨쿨 잘 만큼 무심한 사람이 아니었다.
누워서 조금이라도 자려고 했으나, 나의 바람은 산산조각 나고 말0갔다. “마마. 씻으셔야 합니다.” 아, 정말.
나는 문밖에서 들려오는 궁녀의 목 소리에 베개에 머리를 박0갔다.
산야가 이렇듯 궁녀들에게 빨래를 당하며 인생무상을 논하고 있을 때, 황제인 예화 아륜은 새 후궁의 침소 에 들기 전에 곰곰이 생각을 했다.
그건 꽤나 정상적이고, 이성적이며 또 냉철한 생각이었다. '산야 여란이 첩자일지도 모른다.' 그래. 바로 그것이었다. 아무리 산아가 어리다고 해도 그녀 는 여란 가의 사람이었다.
여란 가는 호락호락하지 않았고, 어린아이를 첩자로 들여보낼 이유는 일마든지 있었다.
그녀는 어제의 실수를 책망했다. 아이인 것을 보았더라도 그렇게 당 황해서는 안 됐었다.
적당히 걱정하는 척을 하고, 궁의 를 보내 주는 것 정도로 충분했다.
하지만 어제 예화는 명백하게 그 선을 넘었다.
그녀가 그토록 당황한 것도, 호의 를 베푼 것도 지극히 드물었다.
그 모습이 다른 이들에게, 그리고 기윤 여란에게 어찌 비칠지 아는 예 화는 영 머리가 아팠다.
울며 겨자 먹기로 딸을 보내기는 했다지만, 황궁의 정보를 빼돌리기 에 그 안에 사는 후궁만큼 좋은 직 위가 어니 있겠는가?
그 탓에 예화는 꼼꼼히 준비했다.
산야가 머물 궁의 사람들을 모두 그녀의 눈과 귀로 채우고, 산아의 몸이 굳은살 하나 없는 어린아이의 몸이라는 것도 확인했다.
그런데, 그렇게나 경계를 해 두고 그 말간 얼굴 하나에 무너지다니.
하지만 정말 놀란 것도 사실이었
다.
기윤 여란은 여식을 보내겠다고 말 하긴 했지만 여식의 나이는 말하지 않았다.
예화는 새로 들이올 후궁이 그녀를 사랑하기 전에 어떠한 피해를 가져 올지 걱정했지만, 그녀의 나이는 궁 금해하지 않았다.
그아 당연했다. 황제는 어린아이라 도 끌어와 혼인할 만큼 세력이 필요 하지 않았다.
그녀의 취향 또한 정상적이었다.
그런 어린아이가 올 줄 누가 알았 겠는가.
혼례복은 무겁고 불편하다. 예화는 산아를 꽤나 오랜 시간 동안 꿇려 두었다.
느지막이, 또 마지못해 후궁을 보 낸 여란 가에 대한 조롱이었다.
황제가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후궁 에게는 당연히 멸시가 따랐다.
어린아이가 아닌 어른이라도 얼굴 을 붉힐 만한 일이었으나, 고개를 든 산아는 무섭도록 무덤덤했다.
다가오는 그녀를 보고 조금 놀라긴 했지만 그것도 찰나였다.
이린 몸은 오랜 시간 꿇어앉아 있 어 아플 텐데, 그런 내색이 없었다.
그 모습에 예화는 산야가 고통에 익숙해진 살수가 아닌지 잠시 생각 했지만, 일어나며 통제를 잃어 휘청 대는 몸은 여전히 근육 하나 없이 가늘었다.
그럼에도 아이는 미간을 한 번 씨 푸렸을 뿐 미동이 없었다.
아픈데도 사람의 손을 피하고, 티 도 내지 않는 모습.
그건 산아에게 아주 익숙해 보였
다.
그건 마치••
“폐하.
예화의 생각을 끊은 것은 문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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