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윤이 사라지고, 엄마는 범접할 수 없는 힘을 얻었다.
어째서인지 황궁의 결계가 완전 히 사라지기는 했지만, 엄마의 이 능이 있으니 그리 불안하지는 않 았다.
그에 나는 완벽한 휴가를 즐겼다. 누군가 나를 위협하지도 않고, 그 렇다고 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 니다.
마음도, 몸도 편한 아주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그래. 정말 그랬다.
어느 날, 아주 이상한 서신이 도작 하기 전까지는.
[안녕」
잠에서 막 깨 까치집 머리를 한 나는 눈곱도 못 뗀 채 그 서신을 움켜쥐었다.
잠이 덜 깼나 싶어 눈을 비벼 보 았고, 가늘게 뜨고 종이를 가까이 두기도 했다.
하지만 내용은 변하지 않았고, 내 손에 들린 종이의 존재도 여전했 다.
나는 오늘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 아 느지막이 일어났다.
일어나고서도 침상 위에서 뒹굴대 던 나는 내 머리맡에 서신 하나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지금껏 서신은 서연이나 다른 궁 녀들이 전해 주었다. 이렇게나 편지스럽게 받은 적은 없 있기에 조금 설렜다.
누가 보냈는지는 빤하겠지만, 그 래도 편지라는 것에서 오는 두근 거림이 있지 않은가.
엄마일까. 아니면 미리내? 여류일 수도 있겠다. 아, 고운이면 너무 귀엽겠는데.
나는 이런저런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봉해진 서신을 꺼냈다.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크게 칭찬 해 줘야겠다는 생각도 함께였다.
하지만 편지의 내용은 내가 생각 한 것과 엄청나게 동떨어진 것이 있다.
물론 협박성의 내용은 아니었다. 평범하다면 평범한 내용이지만, 무 언가 이상했다.
[안녕.
달이 참 밝아.
잘 지내니?
답장 부탁할게.]
다시 읽어 봐도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혹시 암호인가 싶어 촛불 아래 대 어 봤지만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았 다. 도리어 편지를 태워비릴 뻔했다. 이게 내용의 전부인 것 같은데. 이
수신인도, 발신인도 적혀 있지 않 은 서신. 아니, 이걸 서신이라고 말해도 되는지도 헷갈린다.
뜬금없이 달이 왜 밝고, 잘 지내 나는 말은 뭐야. 그리고 답장 부탁 한다고?
'내용이 있어야 답장을 하든 말든 하지.'
불만스러운 일굴로 서신을 필력 거리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이거, 본인을 알아맞취 달라고 일부러 본인이 누구인지 안 적은 모양인데.
이런 맥락 없는 내용에, 저런 장난 을 질 작자면 빤하지.
“게 누구 있느냐.”
서신을 차곡차곡 접어 다시 봉투에 넣고 궁녀들을 불렀다.
곧바로 그들이 들어왔다.
나는 하품을 크게 하고는 말했다.
“선비 마마께 내가 가겠다고 기별 을 넣어 주거라.”
“산아!”
가람의 궁 대문. 가마에서 내리던 나는 멀리서 뛰어오는 붉은 머리 의 남자를 보고 기겁했다. “산아에” 저게 인간이야, 강아지야.
결단코 욕은 아닌 말을 입 안에 서 곱씹으며 나는 슬그머니 가마 에서 내렸다.
사실 다시 타고 돌아가고 싶기도 했다.
내 앞까지 뛰어온 가람이 활짝 웃으며 팔을 벌렸다.
인상을 찡그리자 가람이 눈을 휘 둥그래 떴다. “왜, 왜 그래?”
“땀 냄새 나요.”
흙먼지 냄새가 더 나기는 했지만 가람이 땀이 난 건 맞았다.
그러게 이 여름에 긴 옷 입고 왜 뛰어와.
내 말에 가람이 팔을 들어 냄새 를 맡는가 싶더니, 곧 그의 몸이 불길로 휩싸였다.
저, 저 미친놈이••• 그에게 2' 1- 근0 뻗으려는 순간 가람 을 감싸던 불꽃이 사라졌다.
건조한 열기가 혹 끼치고, 가람이 활짝 웃었다.
“다 말렸다!”
지금 말린 게 중요하나?
마음 같아서는 정강이를 걷어차 주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았다. 나는 숨을 푹 내쉬고는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리고는 그를 지나쳐 걸어갔다.
“사, 산야?”
“왜 그래. 아직도 냄새가 나? 아, 아닌데?”
“아, 아까 불길 때문에?” 가람이 우뚝 멈추니 섰다. 앞서가던 나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자 슬 그머니 멈췄다.
뒤를 도니 가람이 멍청한 표정으 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걱정해 준 것이지?”
그 얼굴을 본 나는 조금 착잡했 다.
평범하게 감동받은 얼굴인데 왜 보 기가 싫지.
“나는 괜찮다! 결계가 없어져서 이능의 운용이 더 쉬워지고! 원래 도 잘했지만 이제는!”
어우, 좀. 좀!
나는 이를 악물고 성큼성큼 다가가 가람의 소매를 잡아챘다.
“담소는 안에서 나누시지요. 볕이 따갑습니다.”
이를 악문 채 웃으며 말하자 가람 이 아! 하고 소리쳤다.
“그래, 어서 들어가야지. 우리 산야 볕에 타면 안 되지." 그런데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려던 가람이 또 멈칫했다. 슬그머니 내 눈치를 보기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뭐. 이번엔 또 뭔데.
•••안고 가면 아니 되겠지?”
짜게 식은 내 표정에 가람이 황급 히 변명했다.
“아니! 하지만 너는 미•••••• 귀비 마마께도 잘 안겨 다니고, 폐하께도 마찬가지잖아.” 아, 그러니까 나도 널 안고 다녀 보고 싶다•••
'저걸 말이라고.' 내가 예수나. 만인에게 공평하게?
안 그래도 더운데 불쾌지수가 점점 올라갔다.
나는 입꼬리를 지그시 늘여 웃었 다.
“마마께서는 저와 담소를 나눌 의 사가 없으신 듯하니 저는 이만 돌아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 하이 텐션을 이만큼 받아 줬으 면 충분하지.
혼자 놀아, 이놈아.
고요한 방 안이 숨소리도 나지 않 을 만큼 조용했다.
내가 뒤를 돌자 생긴 일은, 정
떠올리니 또 머리가 아팠다.
굳이 설명하자면 가람이 숫제 것처럼 나를 붙들었다.
내게 왜 돌아가냐며 이유를 물은 가람은 시끄러워서 그렇다는 대답 을 받아 냈다.
그리고 지금 그는 꼭 숨이라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저 정도까지 조용할 필요는 없는 목소리를 높이지 말라는 거지, 말 。아예 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니었 다. 이런 면에서 가람은 꽤 완벽주의자 였다.
말은 해도 된다고 말해 줄까.
안쓰럽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머리 긭 들었다.
고민하며 일음 띄운 과즙을 마시자 호로롭 소리가 났다. 앞에서 그걸 보고 있던 가람이 커흡, 하고 웃었다.
잠깐 안쓰러웠던 거 취소.
눈을 홉뜨자 가람이 절레절레 고 개를 내저으며 입술에 검지로 엑 스 자를 만들어 댔다.
기합이 바짝 들어가 그러다가도, 또 나를 보자 해실거리며 웃는다. '좀 오랜만에 오기는 했지.'
그동안 심적으로 여유가 없어 가 람을 거의 잊고 있었다. 황궁이 워낙 넓다 보니 우연히 마주치는 일도 없었지. 그동안 미리내나 엄마는 꽤 자주 보았으면서 말이다.
가람이 엄마만큼 애틋하거나 미 리내만큼 든든하지는 않지만, 그래 도 내심 많이 좋아하는 사람이었 다.
좀 촐싹대지만 늘 촐싹대는 건 아니고, 할 때는 하니까.
가끔 바보 같은 짓을 하긴 하지 만, 악의가 있는 건 아니니까.
그렇게 당해 놓고도 좋다고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조금 미안해졌다.
•••그간 잘 지내셨어요?” 그런 마음을 담아 슬쩍 묻자 가람 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럼! 잘 지냈고말고. 내가 잘 못 지낼 이유가 무어 있어.” 음, 그건 그렇지.
나는 고개를 끄덕여 주며 과즙을 한 모금 더 마셨다. 음, 달다. 맛 있어.
주전부리를 집어 먹으며 가람의 이야기를 듣는데, 가람이 웃더니 내 게 손을 뻗었다.
“다 묻힌다, 이 녀석아.”
입가를 닦아 내는 손에 부스러기가 묻어 있었다.
웃던 가람의 눈빛이 조금 바뀌었
다. 내가 안쓰럽고 애틋하다는 듯
“아가. 너는 어땠어.”
“이제 괜찮아?” 섣불리 캐묻지 않는 그 물음이 딱 맞게 다정했다.
나는 그 다정에 알맞도록 활짝 웃었다.
'네. 괜찮아요.”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밝게 웃자 가람도 안심했다는 듯 웃었다. 가람은 가끔 저렇게 어른스러웠다. 그렇다고 늘 어른스럽다는 건 아 니지.
'어른은 그런 서신 안 보낸다.'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 감명 깊은 서신이었다. 안녕, 달이 밝아. 잘 지내니? 답장 부탁할게.
누군지 숨기고 싶었던 마음은 알 겠는데, 그런 짓을 할 만한 사람이 본인밖에 없었다는 건 간과한 모 양이다.
그래도 왜 그랬는지 이해는 했다. '내가 워낙 까칠했어야지••• 다들 내 궁에도 못 오고, 날 부르
지도 못하고 내 눈치만 살살 보고 있었으니.
기다리다 못해 슬그머니 서신이 라도 보내 본 가람이 좀 안쓰럽고, 아주 조금. 진짜 조금 귀엽기도 하 고
“다음부터는 제가 보고 싶으시면 연통을 주시거나 동궁으로 찾아오 서요." 가람에게만 너무 늦었다.
당신에게도 곁을 내어 주겠다는 걸 좀 더 일찍 말해 줬어야 했는
“그런 서신은 이제 보내지 마시고
웃음기 어린 내 말에 가람이 의아 하다는 얼굴을 했다.
무언가를 들켜 민망해하거나 그 걸 무마하려는 거짓말이 아닌, 정 말 의아해하는 얼굴이었다.
“무슨 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