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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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냥 보내기는 아깝지.
나는 그렇게 결정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순진함을 애석 히 여겼다. “아무렴 그렇겠니?”
“어찌 그러십니까••••••! 제가 아는 전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것 말고, 네가 저지른 짓이 있잖
아.”
그 말에 지수가 멍해졌다.
정말 순진하게도 생각하지 못한 모 양이었다.
“내 아버지께서 네게 시킨 일이 그 것이 전부라면, 너는 괜히 나를 겁주 었다는 의미구나.”
“나를 마마라 불렀으니, 내가 누군 지 뻔히 알고 있었는데도 말이야.” 지수가 입을 다물었다.
눈동자 굴러가는 게 다 보였다.
“하지만 나는 자애로우니, 네게 무 리한 일을 시키지는 않으마.

“우선 내 아버지께 돌아가 임무를 완수했다 말씀드리렴.” 선심 쓰는 말투에 그의 동공이 불 안하게 흔들렸다.
눈치는 제법 좋은 모양이었다.
그에 나는 진절하게 덧붙여 주었다.
“혹여라도 나를 배신하려거든 생각 으로만 하거라. 행동으로 옮겼다간 네 몸속에 들어간 그것이 숨통을 옥 죌 테니 말이다.” 삽시간에 지수의 얼굴이 새하얘졌 다. 나는 그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았
다.
'진짜 있나 보네.
난 거짓말이었는데.
아주 예전에 읽었던 무협 소설에서
몸에 들어가 그를 조종하는 독물 같 은 것이 있대서 한 번 찍어 봤는데, 이 세계에도 있는 모양이다.
물론 내가 그에게 먹인 건 그저 맛 좋은 다식이지만. '사람 세 명이면 호랑이도 만든다잖
“이제 놓아주셔도 됩니다.” 내 말에 남자가 지수를 놓아 주었 고, 그는 일어나지도, 앉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 나를 바라보았다.
“가서 내가 말한 대로 하거라. 그리 고 반드시 다시 돌아오렴.”
“닷새의 시간을 주마. 그 안에 오지 않는다면•••  나는 다음 말이 주목될 수 있도록 부러 말을 끌었다.
“네가 죽은 줄 알고 있으마.”
••••예. 알겠습니다, 마마.”
여전히 하얗게 뜬 얼굴로 내게 인 사한 지수가 비틀비틀 숲을 나섰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고 있던 나 는 남자가 일어나자 흠칫했다.
그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나를 바라 보고 있었기에, 나는 그제야 이게 참 이상해 보였을 거라는 것을 자각했
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지수를 놓질 수는 없었고, 내 힘으 로는 그를 붙들어 놓을 수 없었으니
까.
“제법 총명하구나.” 감단하는 듯한 그 말에 나는 울지 못해 웃었다.
좋게 봐주니 감사하지만, 저 나름 신비주의 컨셉이었어서요.
“모두 귀인의 덕이지요.” 나는 부디 요행이 따르기를 빌었다.
저 사람이 도움은 못 될망정 비밀은 지켜 줬으면.
“헌데 나름 비밀이었습니다만, 어쩌 다 보니 모두 보셨군요.” 푸넘하듯 중얼거린 말에 그가 설핏 웃었다.
딱딱하던 인상이 조금 웃는 것만으 로 부드러워졌다.
“평상시 조용하고 순한 아이라 들 있거늘
“예. 맞습니다. 귀인께서는 소녀를 아시는지요?” 슬그머니 찔러 본 말에 그는 잠시 침묵했다.
“네 이야기야 워낙 유명하지 않느
나. 콧대 높고 도도한 강회 공주로.” 도 뭐요?
하마터면 그대로 얼굴을 구길 뻔했 다.
곰 같은 그의 입에서 나온 괴리는
둘째치고, 내게 그런 수치스러운 별 명이 붙어 있다는 게 어지간히 끔찍 했다.
내가 아무리 살갑지 않다 해도 월 그렇게까지•••
머쓱하게 입을 다물고 있던 나는 퍼뜩 정신을 자렸다.
이게 아닌데.
“귀인의 성함을 알려 주시겠습니 까? 추후 반드시 은혜를 갚겠습니 다.”
상대가 누군지 알아보려고 했던 걸 그대로 말려 버렸다.
재자 묻는 내 말에 그는 가만히 웃 었다.
“지금 알지 않아도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니 조급해하지 말거라. 후에 문 제 삼지 않을 것이다.” 내가 무일 생각하고 있는지 제법 꿰뚫은 말이었다.
어떻게 대답해아 하는지 고민하는 데, 그가 재자 입을 열었다. “은혜라면 지금 갚지 않겠느냐.” 지금?
“소녀가 해 드릴 수 있는 것이라
“마침 산책이 무료하던 참이었으니, 잠시 내 말동무나 되어 주거라.” 그런 거라면 상관없지만, 생각보다 소박한 사람이다. “고작 그것으로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럼. 괜찮단다.” 그러시다면야, 뭐•••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부드럽게 웃 은 남자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자 솥뚜껑같이 큰 손이 내 손을 부드럽게 잡0갔다.
어린아이 손을 처음 잡으면 힘 조 절을 못 하고 꽉 잡기 마련인데, 그 는 익숙한 듯 보였다.
나와 그는 평평한 바위에 아무렇게 나 걸터앉았다.
그리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올해로 나이가 몇이나.”
“여덟입니다.”
“어리구나.”
둘 다 살가운 성격은 아닌 탓에 말 은 금방 끊겼다.
다시 조용히 입을 연 것은 그였다.
“아직 그리 총명하지 않아도 될 나 이일 텐데.” 그 잔잔한 말에 나는 괜히 울컥했
다.
그는 여러모로 예화와 닮았다.
다정함도, 말투도, 그리고 저 사고 방식까지.
누군 일하고 싶어서 안달 난 줄 알 사실 아까 앉는 순간 다리에 힘이 훅 풀렸다.
그만큼 긴장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내게 위기가 찾아오는 것에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오늘뿐만이 아니라 다른 날에도, 또 이런 일이 있다면 그게 몇 번이고 놀라고 무서워할 것이다.
나는 겁도 많고, 똑똑하지도 못하고 힘도 없다.
그래도 해야 하니 하는 것뿐이다.
그렇게 대답할 수 없어 입을 꾹 다 무는데, 그는 내 대답을 재촉하지 않 고 다시 입을 열었다. “오랫동안 수도를 떠나 있었다.”
“너무 익숙해서 소중하다는 것마저 잊었던 것을 찾으러 갔는데, 이미 너 무 늦었더구나.” 덤덤하고 모호한 말이었다.
하지만 옅게 쓸쓸함이 묻어났다.
그런데, 갑자기 왜?
“나는 네게 이름을 일러 주지 않았 고, 너 또한 나를 모르니 이 만남은 오늘이 마지막이 될 테제” 뜬금없는 말의 저의를 생각하고 있 는데, 그가 조용히 덧붙였다.
“곧 사라질 이에게 무엇을 털어 놓 든 무슨 해가 있겠느냐.
그 목소리는 여전히 고저 없이 잔 잔했다.
정말로 개의치 않는다는 듯. 나는 잠시 주저하다가, 말을 구덩이 에 파묻듯 결국 입을 열었다.
“지치네요.”
“날 믿어 주는 사람이 없어요.” 나조차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은 속내였다.
나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이 힘겨운 현실이 아닌, 이해받지 못하는 외로 움이라는 것은.
“다들 나보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 도 된다고 하는데•••
“그건 장식장 속의 인형과 다를 바 가 없잖아요.”
예화가 무슨 생각으로 나를 싸고도 는지 안다.
실제로 내가 여덟 살이라면 그게 맞는 태도였다.
하지만 나는 여덟 살이 아니었다.
아니, 나이를 떠나 이해받고 싶었 다.
그래서 말했고, 내 다름을 이해받고 싶었다.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닌데. 억지를 부리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데.”
“차라리 그렇다고 말이라도 해 줄 것이지, 다들 나보고 가만히만 있으 래요.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아요.” 정서적 유대를 맺은 사람에게 믿음 이 부정당한 것은 상처였다.
“혼자서는 힘들고 버거워요. 그래서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도와 달라는 거지, 내 일 을 다 해 달라는 의미가 아닌데 말 이에요.” 속사포로 말을 뱉은 나는 숨을 그 게 내뱉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를 외진 모 자장이가 된 기분이다.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꽤 후련하네.
그는 아무런 대답도, 위로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이야기할 수 있게 이 끌어 줬고, 조용히 내 말을 들어 주 있다.
그것만으로도 고마웠다.
“어린아이 같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기는 하구나.”
“제가 평범한 어린애였으면 방금 그렇게 대처했겠어요?” “그거야 그렇지.” 괜한 시비에 톡 쏘듯 대답했더니 뭉근한 수긍이 돌아왔다.
그 미적지근함이 웃겨 피식 웃자 그도 따라 웃었다.
“네 부모는 네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겠구나.”
“모를걸요. 들으려고 하질 않아서
요.”
“저런.”
참 대답 심심하게 잘한다.
그런데 그 미묘한 말투가 나쁘지 않았다.
“그게 날 생각해서 한 일이라는 건 아는데, 당사자인 내가 좋아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렇지.”
“그런데 왜 들어 줄 생각도 안 하 는지 모르겠어요.” “저런, 나쁜 부모구나.
그 대답에는 말문이 막혔다.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나쁜 사람은 아닌데••
머릿속에 예화의 모습들이 떠올랐 다.
황궁에 들어온 첫날 내 접시에 과 일이며 과자를 한가득 쌓아 주던 모
동화책을 들고 환하게 웃으며 읽어 주겠다고 하는 모습이나, 이제부터 어머니라고 부르라며 당당하게 소리 치던 모습.
기윤의 앞을 가로막으며 내 안위부 터 쟁기던 모습과 엄마라는 호칭에 웃는 얼굴.
황궁 안은 안전하다며 날 안심시기 는 모습과, 처음의 답신과•••••• 아직 도 오지 않는 답신.
몽글몽글하던 마음속이 삽시간에 식었다.
그냥 나쁜 사람 해라.
••아니다. 맞는 것 같아요.” 조용한 내 중일거림에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작게 소리 내어 웃던 그가 내게 말 했다.
“네 나쁜 어머니가 저기 왔구나.”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들었고, 흑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다가오는 여자 를 발견했다.
화려한 곤룡포를 입고, 뒤에는 궁녀 들이 허겁지겁 따라오며•••
“산아, 너•••
엄청나게 화난 엄마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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