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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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혹시라도 용의 심기를 거스己  까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동굴 안은 어두컴컴했지만 어디서 빛이 들어오는지, 대강 파악이 가능 했다.
긴 복도처럼 뻗어 있는 길을 걷다 보면 방처럼 파여 있는 공간들이 있
었다.
꼭 개미굴 같은 곳이었다.
그곳들을 쭉 둘러보던 나는 다섯 번째로 비어 있는 방을 발견했을 때 멈춰 섰다.
'뭔가 이상해.'
동굴 안은 고요하고 삭막했다. 그 것까지는 주인의 취향이라 이해할 수 있었지만, 이건 조금 결이 달랐
다.
동굴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다못해 짐승이 겨울잠을 자기 위 해 굴을 파 둬도 먹을 것이라도 있 는데,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니 제가 원하는 건 다 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렇게나 무기력하게, 고작 이 런 곳에 있는 거지?
힘없이 걸어가던 용의 뒷모습에 문 득 오래전 보았던 아이가 떠올랐다.
복사꽃이 피면 나타나는 서라국의 전설.
내내 울다 어느 날 홀연히 사라져 비린 그 아이.
그 둘이 내게는 아주 비슷하게  껴졌다.
용은 두려움이었고, 아기씨는 불편 함이었지만 이유 모르게 는 감정 이라는 것이 같았다. 둘 다 백발이고, 왜인지 모르게 슬 피 보인다는 것도.
텅 빈 굴 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스톡홀름 증후군인가. 누가 누굴 걱정해.
날 보고 대뜸 반기더니, 또 아니라 고 하고. 오해가 풀렸으니 보내 줄 줄 알았더니 얌전히 있으란다.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다. 무섭기는 하지만 딱히 내게 위해를 끼치지 않 아 증오스럽지도 않았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씩 호감이 있지 도 않다.
본인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호화롭 게 살 수 있었겠지.
괜히 어쭙잖은 동정 말고, 어떻게 하면 설득할 수 있는지부터 생각하 자.
나는 그 방을 나와 다시 긴 복도 를 걸었다.
긴 동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방이 보였고, 나는 조심스레 그 안으로 발을 내디 났다.
그리고 조금 놀랐다. 그곳은 지금까지 봐 왔던 방들과 전혀 다른 곳이었다.
흙인지 돌인지 모를 벽면은 같았지 만, 커다랗고 투명한 구슬들이 등등 떠다녔다. 그 구슬들 하나하나에 모두 상이 맺혀 있었다.
장면들은 모두 달랐지만, 공통적으 로 보이는 한 소녀가 있었다.
성인과 아이의 경계선에 서 있는 외모.
새카만 흑발을 늘어트리고 환하게 웃고 있는 소녀.
구슬은 짧은 순간을 계속해서 재생 하고 있었는데, 그 순간들의 소녀가 모두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눈부셨 다.
내내 음을했던 동굴 안이 이 방 안 만큼은 생동감이 넘쳤다. 구슬 속의 소녀는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았다. 홀린 듯이 그 모습을 바라보던 나 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눈을 접어 웃던 소녀가 평온하게 웃음을 멈췄고, 눈동자 색이 보였다.
그 소녀의 눈이 흑색이었다.
나는 서라국에서 혹안을 가진 이를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흑발이 흔한 것에 비해 이상한 일 이라 나는 내 곁에 있던 수많은 사 람들에게 물었다.
그리고 그들은, 혹안은 태조에게만 나타났던 그녀의 상징이라고 말했
다.
조대 황제인 거야?' 그렇게 생각한 순간 구슬이 까르륵 웃듯이 내게 다가왔다.
가장 앞쪽에 있던, 제일 빛나던 구 슬이었다.
평화로운 오후, 따사로운 햇살 아 래 웃고 있는 소녀가 가까이 보였 다.
나는 미처 피할 새도 없이 눈을 휘등그레 떴고, 딱딱하지만 따뜻한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그리고 익숙한 흰빛이 눈앞을 가득 메웠다. 이능으로 이동할 때마다 나타나던 증상이다.
뭐야, 어디로 가는 건데?
나는 깜짝 놀라 발버둥을 졌다.
그런데 몸이 움직이는 느낌이 나질 않았다. 그것에 놀랄 새도 없이 풍경이 바 뀌었다.
따뜻한 봄날의 들판이었다.
커다란 아름드리나무가 그늘  리우고,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그 따스한 공간에서 나는 바짝 일 어붙어 있었다.
'몸이 안 움직여져.'
고개를 돌릴 수도, 눈을 깜빡일 수 도 없다.
나는 가위에 눌린 사람처럼 아무것 도 하지 못한 채, 눈앞의 광경을 봐 아만 했다.
하지만 꿈과는 다른 건, 이곳이 생 생하게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여린 풀 냄새가 코끝에 맴돌았다. 소 아래 닿는 잔디가 버석거리고 눈 을 찌르는 햇볕은 따가웠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무엇보다 사실 적인 것은 나를 바라보는 소녀였다.
“이무기야. 나는 부강한 나라를 만 들고 싶어.”
귓가에 동백을 꽂은 소녀가 입을 열었다.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고왔다.
“그래서 내 나라의 백성들이 그 누 구 하나 배곯지 않게 하는 나라를 가졌으면 좋겠어.”
소녀의 검은 눈동자가 나를 보며 휘어졌다.
그녀는 웃고 있었지만 슬퍼 보였
다.
“그러니까 날 도와줘. 응?”
그렇게 말하는 소녀는 몹시 사랑스 러웠고, 애달팠다.
이내 작은 대답 소리가 들렸다.
“ 0
그럴게. 아륜.” 그 대답에 소녀가 다시 웃는다. 조금 드리웠던 구름이 걷혀 봄 햇 살처럼 예뻤다.
미화된 기억처럼 그 웃음이 하얗게 희미해지고, 평화로운 정경이 점점 흐려진다.
이내 눈을 뜬 나는 다시 그 구슬 들이 가득 찬 동굴에 서 있었다.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자 방금 내가 만나고 온 소녀가 맺힌 구슬이 눈앞 에 보였다.
꼭 꿈을 꾸고 깨어난 기분이었다.
꿈이란 걸 자각한다 해도 계기소 고 씹지 않으면 금세 끌려가 버리는 것 처럼,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기 직전 나는 그 상황에 녹아들어 있었다. 몸을 움직일 수 없다는 두려움도 잊은 채 그 환하게 웃는 웃음만을 보고 있었다.
방금의 그 공간에서 나는 내가 아 니었다.
조대 황제를 만나고 왔다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 대체 월 보고 온 거지?
“즐거웠니?”
들려온 무미건조한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았다.
어느샌가 용이 문가에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용은 내 대답을 듣지 않고 자박자 박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구슬들이 주인을 반기는 것 처럼 그에게 몰려들었다.
구슬 속의 얼굴을 본 용의 눈빛이 조금 누그러졌다.
하지만 그는 구슬을 건드리지 않고 내게 고개를 돌렸다.
“네 덕에 간만에 그 에 얼굴을 봤 구나." 그 덤덤한 대답에 위화감이 들었
다.
'아까와 분위기가 달라.'
무심하고 슬퍼 보이는 건 같지만, 분명히 달랐다. “그래서, 어땠니? 내 기억은  용이 재차 내게 물었다. 나는 그제야 아까 내가 경험했던 기묘한 것을 떠올렸다.
방 안에 가득 찬 구슬들.
하나같이 존재하는 어린 황제. “저 구슬이 당신의 기억인가요?"
용이 고개를 끄덕인다. 태도에 비 해 선선한 대답이었다.
그에 나는 내 의심이 맞다고 확신 했다.
처음 보았던 용은 누가 보아도 어 린아이였고, 나를 몹시도 끼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의향이 같은데도 아 주 나이 든 노인 같았다. 그리고 나 와 대화를 시도했다. 아주 어릴 적 만났던 목소리마저 겹쳐져 혼란스러웠다.
만날 때마다 인격이 바뀌는 것 같 았다.
“왜 제게 말을 거세요?" 용은 아까보다 더 지치고 힘없어 보였다.
나는 그에 힘입어 조심스레 물있 다.
“아까는 제 이야기도 듣기 싫다 하 시고, 조용히 있으라고 하셨잖아요.” 식은땀이 배어나는 2'1-。 꾹 쥐있 다.
용은 표정의 변화 없이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귀찮게 했다고 화를 내실 줄 알았 는데, 이렇게 말씀하시니•••  “다른 사람 같니?” 애써 돌려 말하는 내 말의 핵심을 용이 짚었다.
같았어. 지금은 네 탓에 좀 더 정신이 들었을 뿐이야.” 그 말이 당황스러웠다.
특별히 그가 정신이 들게 할 만한 일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저 기억 하나를 건드렸을 뿐 인데.
“말했잖니. 네 덕에 간만에 그 애 얼굴을 봤다고.” 용은 화내지도, 귀찮다며 몸을 돌 리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설명을 시작했다.
“내가 가지고 있을 수가 없어서 기 억들을 빼 두었다. 그런데 네가 손 을 넣어 휘저은 탓에 나도 다시 그 기억을 봐야 했고.” 상세한 설명이었지만 나는 여전히 알아듣지 못했다.
떠다니는 기억들은 모두 행복해 보 였다.
그걸 왜 가지고 있을 수 없다는지 는 자치하더라도, 그 후도 이해할 수 없었다.
기억을 다시 마주한 것과 제정신이 돌아온 것이 대체 무슨 관계가 있어 서?
그런 내 반응을 눈치챘는지 용이 조용히 말했다.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여전히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 는 무미건조한 목소리.
“내 설명보다 직접 보는 것이 낫겠 지.
그는 이번에도 화내지 않았다. 그 저 조용히 말을 이어 갔다.
“네가 찾는 해답이 모두 이곳에 있 단다. 할 일이 없을 테니 모두 들여 다보렴.”
“제가 찾는 해답이라면 어떤 것이 요?”
“네가 의아해하는 것들. 그리고 이 곳에 온 이유도.”
전자는 용 자신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온 이유라면•••  “이능 부족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내 질문에 용은 가만히 웃었다.
기묘하게 상냥해진 태도가 꺼림칙 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는 고개를 가볍게 숙여 감사를 표하고는, 가까이 다가온 구슬에 손 을 대었다.
눈앞이 새하얘졌을 때 작은 목소리 가 들렸다.
“가장 작은, 천으로 덮인 기억만 보지 말거라.”
그 말에 대답하기도 전에, 풍경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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