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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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은 외로움에 적응했다.
나라는 여전히 평화로웠으며, 황제 는 행복했으니 더 바랄 것이 없었
다.
그리고 다행히도 때때로 즐겁고 서 글픈 것이 생이라, 그 외로움 또한 종내에는 끝이 나는 듯했다.
시간이 아주 많이 흘러 새카맣던 황제의 머리칼이 희어질 즈음, 황제 는 제 처소를 신궁으로 옮겼다.
황제와 그의 유대는 깊었고, 용은 황제가 자신이 외로워한다는 것을 알아챘다고 믿었다.
나라는 부강해졌고, 배곯는 이가 없으며 장성한 후계자 또한 있었다. 할 일을 모두 끝마치고 내 곁으로 돌아온 것이라고, 용은 주름진 황제 의 손을 붙들고 웃었다.
용이 조금도 늙지 않은 것에 비해 황제는 시간과 함께 흘러갔다.
이제 조금도 소녀라 볼 수 없는 모습에서 용은 어색함을 느꼈다.
죽음의 그림자가 차츰 황제에게 몸 을 드리우는 것이 보였다.
용은 첫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나타 난 신수였고, 인간이 상상도 못 할 일들을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바꾸지 못할 것은 분명히 존재했다.
인간은 언젠가는 죽는다.
황제의 머리가 어느새 새하얗게 세 있으니, 그녀 또한 얼마 지나지 않 아 숨을 거둘 것이다•••
용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생의 첫 시작부터 함께한 황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조차도 어려웠다.
그럼에도 지혜로운 용은 천천히 이 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네 생의 마지막에 함께 서서, 꺼져 가는 숨결을 듣고 식어 가는 손을 맞잡으며.
너와 함께 한 삶의 모든 순간들이 눈부셨노라고 말한다면, 황제는 또 웃어 줄 것이다. 내게 쥐여 준 네 마지막 남은 삶 이 평온하기를.
용은 그렇게 바랐다.
하지만 황제는 종종 용을 졸랐다. “이 나라에 남아 주면 안 되니?” 노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소녀 같은 물음에 용은 가만히 황제의 머리칼 을 쓸어 주었다.
대답하지 않았지만 황제는 이미 답 을 들은 듯 침울히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이 안타까웠으나, 용은 그 부탁만은 들어줄 수 없었다.
황제가 죽고 난 뒤, 용은 이곳을 떠날 예정이었다.
황제를 사랑했고, 여전히 사랑했으 나 그녀가 없는 이곳은 자신에게 텅 빈 곳일 뿐이다.
용은 서라국을 떠나 아주 먼 곳에 등지를 틀 작정이었다.
이른 아침 눈을 떴을 때, 곤히 잠 든 황제의 모습이 꼭 죽은 것만 같 았던 날.
소녀와의 추억이 한 점도 묻지 않 은 척박한 땅에 몸을 묻고, 그대로 잠들어야겠다고 용은 생각했다.
너와 함께 시작한 생이니, 네가 흙 으로 돌아간다면 나 또한 그러는 것 이 맞겠지. 하지만 용은 황제의 불안함 또한 이해했다.
용이 잠든다면 서라국에 깊숙이 뿌 리내린 그의 힘이 모두 회수될 것을 알았다.
그걸 알지만, 용은 남겨질 이들이  죽은하지 않았다.
이유를 묻는다면 대답할 수도 없었 다.
생이 시작된 뒤 지금껏 이 나라에 발붙이고 살았지만, 용이 마음을 준 것은 황제가 유일했다. “종종 들여다보겠다고 약속하며” 계획을 변경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황제가 슬픈 얼굴을 한 탓 에 살살 그녀를 달랬다.
“이 땅은 여전히 비옥할 거야. 강 물은 마르지 않을 거고, 곡식을 내 리쬐는 태양 또한 따사롭겠지.”
제 힘들이 회수되어도 그 흔적은 남을 것이다.
제 나라의 백성들이 배곯지 않는
서라국은 그 흔적만으로도 황제의 원을 이룰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능은 사라질 테제" 황제는 여전히 침울했다.
그 말에는 해 줄 대답이 없어 용 은 눈썹을 늘어트리며 웃었다.
“아륜, 너 없이 홀로 남겨질 내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 마.”
“내 아이들이 있잖아. 내 흔적을 가진 아이들  여전히 황제는 절박했다.
오늘따라 유독 더 포기가 늦다고 용은 생각했다.
“그 아이들을 보고, 그 아이들이 낳을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이곳에 남아 줄 수 없니?”
그 말에 용은 지나온 세월들을 떠 올렸다.
황제의 아이들은 용을 좋아했다. 그 탓에 신궁은 자주 떠들썩해졌고, 용 또한 아이들에게서 황제의 흔적 을 보았다.
그럼에도 그는 매 순간 외로웠었
다.
“그 아이들은 네가 아니야, 아륜.” 그녀가 죽은 뒤 용은 서라국에 머 물 이유가 없었다. 불변할 사실이었 다.

마침내 황제가 한숨을 내쉬듯 수긍 했다.
용이 웃으며 황제를 토닥였다.
가만히 품에 안겨 있던 황제는 조 용히 입을 열었다.
“내게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너는 알고 있지?”
물론 그랬다. 하지만 용은 그 말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두려워9"
그는 애써 제 놀람을 감추고 황제 에게 물었다. 황제가 고개를 내저었
다.
“나는 죽지 않을 거야." 목소리의 울림이 달라졌다. 용은 놀라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에게 준 자신의 힘이었다.
“내가 가진 이 육신은 죽겠지만, 나는 언잔1가 내 아이들 중 하나로 태어날 거야.”
황제는 용을 바라보며 또렷하게 말 했다. 노인의 눈동자가 형형했다. “그러니, 년 죽으면 안 돼.” 그녀가 떠나면 자신 또한 잠들 것 이라는 걸 황제가 알고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용은 제 지부를 들 킨 듯 부끄러웠지만, 동시에 알아봐 주었다는 것이 기뻤다.
“날 기다려 줘. 알겠지?”
대답을 종용하는 단호한 목소리에 용은 활짝 웃었다.
“응, 그럴게.”
용은 어렸던 어느 날처럼 답했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황제는 여전 히 그 들판의 소녀였다.
그것이 벅차도록 기뻤다.
그 탓에 용은 황제가 어째서 그렇 게 슬프게 자신을 바라보았는지 알 지 못했다.
따스한 봄이 금세 지나가듯이, 용 의 생 또한 그랬다.
따사롭던 정경이 바뀐 것은 순식간 이었다.
잠들어 있던 용은 선뜩한 고통에 소스라쳐 깨어났다.
눈을 뜬 그의 시야에는 낯선 토굴 이 보였다.
[오늘, 용께서 승하하셨다.] 황궁이 아닌 것에 의아해하기도 전 에, 황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제는 용에게 받은 이능을 사용했 다.
그 덕에 용은 황제가 이능을 쓰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는 방금 느꼈던 고통의 이유 또한 알아차렸다.
오래전, 황제가 제위에 오를 때 용 은 새로운 황제에게 바치는 경의로, 또 반려의 징표로 제 여의주를 내주 었다. 심장과도 같은 것이었다.
[얼마 전 갑작스레 자취를 감추시 어 행방을 수소문하던 중, 내게 반 려의 징표로 주셨던 여의주가 깨어 졌으니 이는 곧 그분의 죽음이라.]
그리고, 황제가 그 여의주를 깨트 렸다.
[그러나 용께서 나를 사랑하시어 내리신 축복은 여전하니, 이것은 내 핏줄이 이 나라에 남아 있는 한 마르지 않는 힘이 될 것이다.] 멍하니 앉아 있던 용은 비척비척 빛이 들어오는 곳으로 걸어갔다.
곧이어 그의 눈에 보인 곳은 서라 국이 아니었다.
언잔1가 황제에게 들려주었던 이야 기였다. 저 넓은 바다 건너에도 땅이 있노 라고.
인력으로 쉬이 건널 수 없을 만큼 멀지만, 네가 원한다면 데려다주겠 다고.
그때의 황제는 젊었고, 할 일이 많
그럼에도 훗날 함께 가자고 대답해 주었던 기억이 있다. 그곳에 홀로 남은 용은 그제야 황 제의 말을 곱씹었다.
그가 준 이능들이 마르지 않는 힘 이 된다.
황제의 핏줄이, 나라에 남아 있는 한
그렇다면, 평생 죽지도 못한 채 살 아 있어야 한다는 말이 아닌가?
용은 서라국으로 돌아가려 했다. 황제와 마주해 이야기를 나눌 생각 이었다.
무언가 잘못되있을 것이다.
어쩌면 여의주를 깨트린 것이 황제 가 아닐 수도 있었다.
나라를 몹시 아끼는 누군가가 황제 를 협박했을 수도 있지 않은가.
용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힘 을 주었다.
그런데도 제 마지막 남은 희망이기 에 어떻게든 그 실낱 같은 것을 믿 었다.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네가 이 제 다 알았겠지.] 하지만 뒤이어 들려온 목소리는 그 작은 희망마저도 끊어 버렸다.
발걸음을 내딛으려던 용이 우뚝 멈 춰 섰다.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아까 와 같은 황제의 언령이있다.
[네가 들은 것이 맞다. 내 핏줄이 이어지는 한 서라국의 이능은 사라 지지 않을 거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차가운 목 소리였다.
[너는 이 나라에 미련이 없지. 그 러니 네가 다시 네 힘을 되찾고 잠 들기 위해서라면, 내 아이들을 모두 죽일 수 있다는 걸 알아.]
미처 반문하기도 전에,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니, 네 이능이 이 나라에 남 아 있는 한 너 또한 서라국에 발들 일 수 없을 것이다.]
이를 악문 목소리가 살갖을 갈가리 찢는 듯했다.
용은 웃지도 을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그제야 머리를 세게 후려치듯 찾 아오는 깨달음이 있었다.
황제는 용을 사랑했지만, 끝내 그 녀는 황제였다.
황제는 아이가 많았고, 후계자 하 나를 남기고 그 아이들을 모두 다 른 가문의 이들과 혼인시켰다.
그 아이들이 장성해 아이를 낳을 테니 계속해서 피가 이어질 것이 다.
용의 힘은 곧 그 자체였다. 여의 주가 깨어졌어도, 온 나라에 축복 을 내렸어도 질기게 붙어 있는 숨 이었다.
피가 끊길 일이 없으니 이능 또한 계속해서 이어진다.
이능이 남아 있는 한 용은 죽을 수 없었다.
용은 그제야 일마 전 들었던 황 제의 말을 다시 곱씹었다.
황제는 제 죽음에 슬퍼할 용을 격 정한 것이 아니었다.
[사죄는 내가 이 세상에 다시 돌아 올 때 할게. 그러니••••••.]
용이 잠든 뒤, 이능을 빼앗길 제 백성들을 염려했을 뿐이었다.
[돌아오지 마.] 죽지 말라는 것은 황제의 저주였
다.
황제는 치밀하게 준비했고, 용이 그 모든 것을 알아차렸을 때에는 이미 너무 늦은 후였다.
황제가 사랑하는 땅을 위해 헌신한 것도, 그녀가 다른 반려를 들인 것 도 모두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제 나라를 위해 기 이이 들이민 지옥을 마주했을 때, 용은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그가 허물어져 절규했다. 이성을 잃은 용은 제 마지막 힘을 끌이모아 황제를 저주했다.
네가 나를 배신해서라도 그토록 네 나라를 지기고 싶다면, 네게 주었던 힘만큼은 내가 앗아가겠다.
모든 이들이 슬퍼하고 기뻐하고 분 노할 때, 너의 후손만은 그리하지 못하리라.
가장 높은 자리에 고립되어서, 오 직 사랑에만 기대어 살아야 할 것이
다.
악을 쓰던 용이 몸을 웅크렸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여전히 희미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 이 느껴졌다.
너는 이 모든 것을 관전하고 있겠
꾹 감은 용의 눈에서 처음으로 눈 물이 흘렀다.
아륜, 제발.
네가 이렇게까지 내게 잔인할 수는 없어•••
“그만, 여기까지.
한 마디가 더 들리려 하던 찰나, 단조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나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 듯 현실로 돌아왔다.
“그 이상은 네 정신이 버티지 못할 거야."
나는 그 여상한 태도를 믿을 수 없어 고개를 들었다.
나와 같은 것을 보았을 것이 분명 한 용은, 전과 같은 무심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17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