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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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호기롭게 들어온 것이 무색 하게 한참을 침묵을 유지했다.
나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왜 오셨어요?” 그 말에 엄마가 고개를 들었다. 불
안으로 떨리는 눈동자가 나를 보았 다.
긴장을 감추지 못한 그녀가 말끝을 흐렸다.
“이대로 두면 안 될 것 같아서.” 그 말에 나는 얼굴을 구겼다.
이대로 두면 안 될 것 같다니. 그 게 무슨 의미야.
“제가 당신을 피해서 그런 건가
냉랭한 말투였다. 말이 곱게 나갈 수가 없었다.
엄마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아무렇지 않아.
“그럼요? 전 괜찮아지고 있잖아
요."
나는 괜찮아지려 노력 중이다. 지나간 과거일 뿐이고, 이제 모두 괜찮다고 생각하려 애쓰고 있다.
이젠 다른 궁인들을 볼 때 낯설거 나 밉지 않다. 궁은 익숙해졌고, 나 는 자자 평화로워졌다.
아직 엄마를 제대로 마주하지 못할
다른 궁인들이 그러했듯 시간이 지 나면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다. 그런 데 굳이 나를 들쑤시러 온 엄마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나를 아픈 눈으로 바라보던 엄마가 말했다.
“덮어 두면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
내가 다시 무이라 말하기 전, 엄마 가 다시 입을 열었다.
“원망 또한 용서의 방법이라는 것 을 알고 있다. 미운 만큼 미워하고 나면 속이 편해질 때도 있지. 하지 만 산아. 너는 그러지 못하잖니.” 그 말에 속이 울컥 치받았다. 날 그렇게나 잘 알았냐며 비아냥거릴 수도 없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속이셨나요?”
뾰족하게 일그러진 원망이 튀어나 왔다. 엄마의 말이 맞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도 갈무리할 수 없는 감 정이었다.
“내가 모든 사실을 알게 되면 괴로 위할 테니까?”
엄마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알고 있어요. 당신이 날 사랑했다 는 것도, 그게 날 위해서라는 것도.” “그런데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내 가 말했잖아요!”
억누르던 어두운 감정들이 왈각 역 류한다. 엄마의 얼굴이 창백했다.
그녀가 무슨 마음으로 매일같이 이 곳에 발걸음했는지, 내게 번번이 거 절당하면서 다시 돌아가는 그 마음 이 어땠는지 안다.
그래서 더더욱, 만나고 싶지 않았 다. 내가 이런 말을 할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덮어 두면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 는다고 하셨죠.”
“그럼 제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 엄마가 밉다. 하지만 사랑한다. 시 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잊혀진다지 만, 다시 되찾은 원망이 너무 컸다. 엄마는 위태로운 눈으로 나를 바라 보고 있었다. 그 눈에는 나를 향한 걱정만이 가득했다.
“내가•••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뒷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입을 몇 번 달싹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한 번만•••
“안아 줘도 괜찮겠니?”
엄마는 분명 내 말에 상처받았다. 하지만 그보다 나를 더 안타까워했 다.
본인 아픈 줄도 모르고 내 상처가 애타서, 그래서 어쩔 줄 모르는 일 굴로 그렇게 말했다.
“아뇨.”
그걸 다 알고 있지만, 고개를 내저 었다.
엄마는 나를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 다. 잠시 뒤 다시 고개를 든 그녀의 얼굴은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네가 잊은 기억이 하나 더 있 단다.”
그리고 이어진 말은, 전혀 예상하 지 못한 말이었다.
“네게는 첫 번째 생을 제외하고도 하나의 전생이 더 있지 않니.”
그제야 벼락같이 떠오르는, 나도 잊고 있던 일이었다.
맞아. 그랬지.
스무 살이 조금 넘게 살았던,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에서의 내 두 번째 삶. “그걸 어떻게•••
작게 흘러나온 말에 엄마가 설핏 웃었다.
아주 그리운, 애틋한 것을 보는 것 같은 눈빛.
그 눈빛이 낯익었다.
언젠가 본 적이 있었는데. 이번 생 이 아닌, 두 번째 생에서.
어렴풋이 떠오르는 흐릿한 안개 같 은 기억을 더듬는데, 엄마가 말했다.
“이 기억을 본 네가 나를 용서하  , 그렇지 않든 내가 바라는 것은 늘 같을 거야.”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동자는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네가 기만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 지만, 그래도.” 정말 어른 같이, 엄마가 말했다. “네가 괴롭지 않기를 바란단다.”
그 말이, 거짓말처럼 원망스럽지가 않아서.
“아가. 네가 무엇을 해도 좋아. 하 지만 아프지 말아라.”
엄마가 조심스레 을 뻗어 내 손 을 꼭 붙잡0갔다.
내가 훌쩍 커 이제 크기가 비슷한 손이었지만, 여전히 따뜻했다.
잠시 잡고 있던 손이 떨어졌다. 엄 마가 작게 무언가를 중얼거렸고, 손 바닥만 한 구슬이 생겨나 등실 떠올 랐다.
용의 동굴에서 보았던, 기억이 담 긴 구슬.
지금껏 봤던 것 중 가장 작은 구 슬 안에 황제의 예복을 입은 엄마의 모습이 맺혔다.
구슬을 바라보다 시선을 위로 올리 니 눈이 마주친 엄마가 괜찮다는 듯 이 웃었다.
나는 조심스레 대었고, 익숙 하게 의식이 흐려졌다.
“잘 다녀오렴, 산야.” 그 목소리가 마지막 기억이었다.
서라국의 황제, 예화는 다정하나 공평한 이었다.
비단 그녀에게 국한된 이야기는 아 니었다. 선대 황제도, 선선대 황제도 모두 그러했다.
그들은 모두 제 백성과 나라를 사 랑했다.
그들을 위해 나라를 다스렸으며 사 사로운 감정으로 일을 그르치지 않 았다.
모두에게 공평한 애정이 주어지는 것은 황제의 덕목이었기에, 그 오랜 세월 동안 그 누구도 황가의 저주를 알아내지 못했다. 용은 제 연인에게 버림받아 서 대 륙으로 쫓겨 갔다.
제 연인을 증오했지만 끝내 사랑했 던 용은, 그의 자손들에게 미적지근 한 저주를 내렸다.
아무도 사랑하지 못할 테지만, 그 모두에게 사랑받는 것.
예화는 그 저주에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그녀에게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 도, 사랑받는 것도 무가치했다.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으니 사랑을 갈구할 필요도 없다.
그토록 자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염증을 느낀 탓에 저 지독한 감정을 가지고 싶지 않았다.
모든 황제가 그랬듯이, 그녀의 아 비지는 예화가 성년이 되어 관을 물 려받는 날, 제가 지켜 오던 비밀을 말해 주었다.
그 저주와, 저주가 풀린다면 얻을 힘에 관한 이야기를 예화는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들었다.
부질없다고 생각했다. 용의 힘은 절대적이고, 그에 따라 황족은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
그런데 저주가 풀리는 조건이 누군 가를 사랑하는 것이라니, 이런 모순 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내 오랜 숙원이었으나 실패하였 지. 너는 부디 성공하기를 기원하
예화는 아버지의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그의 오랜 숙원이었으며, 제 성공을 빌어 주는 이유는 무엇일
까.
하지만, 애초에 황제로서 존경하던 아버지였다. 예화는 반문하지 않0갔 다.
예화의 아버지가 제위에서 물러난 날, 그는 역대 황제들처럼 자살했다. 제 일을 끝냈다는 듯이, 아무런 미 련 없이.
예화는 그런 아버지의 장례를 예우 를 다해, 하지만 눈물 한 방울 없이 치렀다.
백성들에게 갑작스럽지 않도록 일 마의 시간이 지난 뒤 선황의 승하를 알렸다.
예화는 그런 사람이었다.
모두에게 다정했지만 줄 것은 그것 뿐인 이였다.
모두가 그녀의 애정을 바랐지만 그 누구도 얻지 못했다.
모두가 같았던 예화의 세상에 유독 도드라졌던 것은 있었다.
산아 여란.
여란 가의 어린 후궁. 제 허리께에 도 오지 않는 작은 아이.
예화에게 산야는 독특한 아이였다.
무어라 정의할 수는 없지만 그러했
다.
한참을 미적거리던 여란 가의 가주 가 내놓은 것은 이능이 없는 불량품 이었다.
예화는 그 사실을 일찍이 알았지 만, 산야를 내쫓지 않았다.
아이의 아비가 제 굄을 받은 아이 의 입을 빌려 여란 가의 배를 불린 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그마저도 외면했다.
스스로 이유를 알 수 없는 행동이 었다.
어린아이를 보살펴야 한다는 것 또 한 그녀가 어릴 적 학습한 일이었
다.
그러나 그 얄팍한 다정이라기엔 산 야는 조금 더 예화의 시선을 끌있
다.
예화는 그런 아이를 보며 어릴 적 들었던 아버지의 말을 떠올렸다. 어쩌면 저 아이를 사랑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 예화는 산야를 아꼈다. 설령 그것이 티끌만 한 애정일지라도.
그렇지만, 산야는 선을 넘고 말았 다.
산아는 예화에게 독초를 선물했다. 의심 없이 그것을 우려 마신 예화는 사경을 헤매었다.
미리내의 도움으로 금세 나았지만, 그녀가 죽을 뻔했다는 사실은 변하 지 않0갔다.
황제를 죽이려 한 죄인들은  사형되었다.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법이었다. 예화는 산아를 아꼈지만, 아이의 죄가 컸다.
하여 살려 달라 우는 아이를 내겠 다.
산아가 궁인들에게 끌려가고 난 뒤, 화목하던 정원에 정적이 감돌았 다.
예화의 시선이 오랫동안 산아가 있 던 자리에 머물렀다. 그러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죽이지 말고 가두어라.”
“폐하!”
함께 있던 후궁 하나가 놀라 소리 졌다. 예화는 여상히 말을 이었다.
“짐의 부인이었고, 아직 어린아이 지 않느냐.”
예화도 산야가 기윤의 꾐에 넘어7갔 음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도가 지나진 일이라는 것 또한.
하지만 어째서인지, 아이를 죽이라 는 명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평생을 갇혀 살아야겠지만, 죽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 많은 이들의 기억에서 잊혀진다면 궁에서 내보낼 수도 있 겠지.
예화는 그리 생각하며 산야를 가두 라 명했다.
그대로 잊혀지는 듯했던 그 아이  , 예화는 어느 날 불시에 떠올리 게 되었다.
예화는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후려 맞은 듯이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나 앉았다.
순식간에 모든 감각이 개화하는 듯 한, 소름 끼치는 감각이 온몸을 훑 있다.
그 개화의 끝에, 예화의 뒤통수를 후려치듯 주어지는 깨달음이 있었
다.
잠시 멍하니 앉아 있던 예화는 득  달같이 산아의 행방을 찾았다.
언제나 온화하던 황제의 돌변에 궁 인들은 당황했지만, 산아의 행방을 찾는 것은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 다.
간신히 수소문해 찾은 곳은 누추하 고 비좁은 감옥이었다.
산아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아직 온기가 식지 않은 채, 잠자듯
예화는 그 앞에 허물어져 앉았고, 보드라운 아이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제서야 죽음이 손끝에서 느껴졌
다.
죽이지 말고, 가두라 했다.
그럼에도 산아가 죽은 것은, 아주 사소한 악의였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드으 01들은 그 것이 분했다.
공정하던 황제였다. 그런데 어째서 자신을 죽이려 시도하기까지 한 그
아이에게만?
어쩌면 폐하께서 그 아이를 가두라 하신 것은 다른 의미일 것이다.
명색이 부인이었던 이를 죽이는 것 은 성군의 자리에 걸맞지 않으니,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라는 의미 아 닌가? 하여 그들은 산아를 돌보지 않았
다.
숨 막힐 만큼 고요한 감옥에 아이 를 두고는 물 한 모금 챙겨 주지 않았다.
산아는 그 감옥 안에서 외로움에 사무쳐 죽었다.
따뜻했던 온기가 그녀를 기다리기 라도 한 듯이 천천히 허물어지고, 산야의 몸이 빠르게 씩이 가기 시작 했다.
예화는 푸르스름하게 변해 비린 아 이를 끌어안고 얼굴을 쓸었다.
“산아.”
공허한 물음이 토해졌다.
“아가.
산아가 그리도 듣고 싶어 했던 목 소리가 감옥을 울렸다.
“어찌 이리 길게 자니••  황제는 썩어 버린 산아의 시체처럼
허물어졌다.
그녀의 눈에서 처음으로 눈물이 홀 러나왔다. 눈물은 아이의 뺨을 적시 고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 순간, 황제의 새카만 머 리카락이 천천히 세어 가기 시작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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