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차.
그 말에 누군가 뒤통수를 때린 것 같았다. 후려친 정도는 아니고, 가법 게 톡.
그래도 정신을 자리기에는 충분할 만큼의 힘으로.
'잊고 있었다.
진짜 바보 아니야?
대단한 각오 없이 설렁설렁 마실 가듯 온 탓에 어느새 목표였던 것은 머릿속에서 사라진 채였다.
저 말 안 들었으면 정말 간식만 먹 다 갈 뻔했잖아.
나는 입안에 든 과일을 꿀꺽 삼기 고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류를 읽고 있던 그녀가 금세 나 와 눈을 맞췄다.
“어찌 그래?”
드릴 말씀이 있이 왔어요.” 진지한 목소리에 예화가 놀란 눈을 하면서도 서류를 내려놓았다.
기껏 분위기를 잡았지만 나는 곧바 로 말하지 못했다.
뭐라고 말해.
제가 사실 전생을 살아서 보기에는 여덟 살이지만 실제로는 스무 살도 넘었다고?
'그건 좀.'
검증할 방법이 없었다. 사랑과 신뢰 와는 관계없이 미친 사람처럼 보일
말이다.
•••얼마 전, 제 아비가 동궁을 찾 았을 때 말입니다.”
그게 내가 고른 첫 마디였다. 실제 로도 내 결심의 시작이었던 사건.
“저는 그가 동궁을 찾을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아니, 적어도 저를 찾아올 것을요.” 내 말에 예화가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말을 이었다.
“서신이 왔었습니다.”
“여란 가에서 네게 간 서신이 없었 을 터인데.”
“공식적으로 발송한 서신이 아니었 으니까요.” 내가 서신을 받은 과정을 설명하는 동안, 그녀는 아주 무서운 것을 본 사람처럼 굳어 있었다.
“허면 어찌 내게 말하지 않았느냐.
아니,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이에
게,”
“그는 제가 자신을 아비라 여긴다 생각하고 있을 테니까요.” 나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본가에서는 제 존재조차도 몰랐던 이입니다. 인제 와서 아비 행세를 하 겠다는 건 제 아비라는 지위로 얻어 내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는 의미이
겠지요.”
“순순히 들이줄 생각은 없습니다.
허나 반격할 수도 없어 뜻대로 따라 주었습니다.” 이 말은 내 입으로 하면서도 뒷맛 이 썼다.
말은 번드르르하지만 실상 힘없어 서 비위 맞췄다는 말이었다.
하여튼, 좀 어필이 되었으려나.
나는 슬쩍 예화를 바라보고는 말을 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위험에 빠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저에게도 알려 주
세요.”
그리고 제가 하려는 일을 도와 주 세요. 라고 말하려던 찰나, 예화가 내 말을 끊었다.
“산야, 황궁은 안전하단다.”
그 말이 아주 단호했다. 조금의 다 협도 필요치 않는다는 듯이.
“아무도 너를 위협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네가 걱정하는 그런 일은 없 을 테니 안심하려무나.” 그건 믿기 좋은 말이었지만 내가 듣고 싶은 말은 아니었다.
당황스러웠다. 이런 반응이 돌아올 거라고는 생각 하지 못했는데.
백 퍼센트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어느 정도는 믿어 줄 줄 알았다.
이렇게까지 내 의견을 묵살할 줄은. 기분이 좋지는 않0갔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예화가 너무 나 괴로운 얼굴을 했기에, 나는 조목 조목 따지지 못했다.
“왜 네가 그런 걱정을 하고 있어.” 예화가 꺼져 가는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丁 卍1- 나를 가없어하는 목소리 였다.
그렇지 않았다. 나는 무엇이든 해내 고 싶었다.
도움이 필요한 것은 맞았지만 내 상황을 마냥 떠넘기려는 것도 아니 었다.
그냥 나는, 같이 해 보자는 말을 하 고 싶었는데.
“일전에 내가 한 말이 네 아비를 데려오겠다는 듯이 들린 모양이구
나.”
“네가 그리 싫다면 그의 출입을 허 용지 않으마. 그에게 출입패가 있이 자유롭게 드나들었을 뿐이란다.” 거짓말.
내가 유추한 것을 예화라고 몰랐을 까.
만약 정말로 기윤에게 황궁의 출입 패가 있었다면 예화는 그가 나를 만 나러 올 것이라는 걸 얼마든지 예상 했을 것이다. 그녀의 태도는 단호했지만 내가 믿 기는 어려웠다.
어린아이나 속을 법한 말들이었다.
그래. 어린아이라면 속을 만한. '정말 조금도 믿지 않았구나.
타인에 가까운 여면도 알아본 것을 예화는 알지 못한다는 것이 속이 쓰 렸다.
나는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다.
걱정 때문이겠지. 나에 대한 걱정.
조금 뼈아프긴 하지만 이해한다. 하 루아침에 믿을 이야기도 아니고.
오늘의 예화는 너무 확고하다.
내가 무어라 말을 더 해 봤자 설득
될 것 같지가 않았다.
시간이 오늘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꾸준히 설득하면 마음을 바꿀 수 있 을 거야.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심란하게 입 을 달싹거리던 예화의 얼굴이 화악 펴졌다.
그녀에겐 나를 이해시기는 것이 꽤 나 어려운 일이었던 모양이다.
“그래, 착하지.”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쳐내도 예 화는 좋다고 웃었다.
그 얼굴에 더 화나 있을 수도 없이 나는 결국 표정을 풀었다.
“시간이 늦었구나. 서연을 불러 줄 테니 어미와 함께 가련?”
'어미와 함께'를 강조한 걸 보니 날 보내기가 아쉬운 모양인데.
나는 그녀의 얼굴과 탁자 위의 서 류를 번갈아 보았다.
일도 많아 보이는데. 굳이 데려다 달라고 하기도 미안하고.
•••화룡궁에서 자고 가도 되나 요?”
슬그머니 홀린 말에 예화의 눈이
반짝 떠졌다.
“그래?”
어물어물 대답하자 예화가 활짝 웃 었다.
평소에도 그랬지만, 별것 아닌 것에 과하게 기뻐하면 좀 미안했다.
좀 더 살갑게 대해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예화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침상이 높으니 날 올려 달라는 의 미였는데, 예화는 나를 침상 위로 올 리고는 본인은 다시 탁자로 돌아갔 다.
“아직 일이 남았단다. 먼저 자고 있 거라. 얼른 끝내고 가마.” 이불을 목 끝까지 덮은 나는 졸린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같이 자겠다고 왔으면 나 잘 때 같 이 자야지. 또 일을 한대. “저 그 대신 팔베개 해 주세요.' 그래도 내가 이해해 줘야지. 선심 쓰는 듯한 말에 예화가 웃었다.
“그래, 산아.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바스락거 리는 종이 소리와 옷감이 스치는 소 리가 간간이 들려 왔다.
적당히 서늘하고 편안한 공기 속에 서 나는 조용히 잠들었다.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그게 익숙하면 안 된다는 걸 떠올 리기까지는 잠깐의 시간이 걸렸다.
나는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익숙한
정경이 보였다.
동궁의 내 방이었다.
'어제 분명 화룡궁에서 잠들었던 것 같은데.' 왜 여기 있지. 잠결에 누가 날 옮겼
잠버릇이 심해서 예화가 잠을 못 잤나.
아니면 아침부터 부산스러워서 더 자라고 날 옮긴 건가.
나는 하품을 쩍 하고는 몇 번 더 뒹굴거리다 침상을 나섰다.
그리고 조금 놀랐다.
침상 옆에 끌어진 의자에는 고운이 앉은 채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앤 또 왜 여기서 자고 있어.
하도 곤하게 자길래 깨우고 싶지 않았지만, 앉아서 자는 모습이 꽤 불 편해 보였다.
차마 고운을 안아 옮길 힘까지는 없었던 나는 결국 살살 고운을 흔들 었다.
고운은 내 손길이 닿자마자 살풋 인상을 찌푸리더니 금세 눈을 떴다. “고운. 왜 여기서 자고 있이?” 나와 눈이 마주친 청회안이 동그래 졌다.
•••송구합니다.”
“아나. 나무라려고 깨운 건 아니었
어. 그냥 왜 네 방에 안 가고 여기서 자고 있나 싶어서.” 잠이 덜 깨 허등지등 사죄를 주워 심기던 고운이 자그맣게 입을 벌렸
다.
“마마께오서 저를 잡으시어•••
“내가?”
되물은 말에 고운이 고개를 끄덕였 다. 그 단호한 반응에 나는 당황스러 웠다.
내가 아닌 밤중에 너를 왜 잡아?
“폐하와 함께 잠드신 줄 알았는데, 새벽에 깨어나셨습니다. 그리고 동궁 으로 가서야 하시겠다기에 뫼시었는 데, 마마께서 곁에 있어 달라 하셨습
니다.” 이어진 고운의 설명이 상세했다. 내 가 화룡궁에 간 걸 기억하니 거짓도 아니었다.
'하지만 돌아온 건 모르겠는데.' 곰곰이 생각하던 와중 고운과 눈이 마주쳤다.
청회색 눈동자가 걱정으로 물들어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태의를 부를까요?”
“아나. 괜찮아. 잠결이라 잘 기억이 안 났나 배” 몽유병인가.
자다 돌아다닌 걸 보면 맞는 것 같
다.
나는 고운을 달래며 태평하게 생각 했다.
어린아이들에게 몽유병이 생기는 건 생각보다 흔하지.
나도 전생에서 그랬던 경험이 있었 고, 커가면서 점자 사라졌다.
정신은 어른이더라도 몸은 어린아 이라 그런 걸까.
별것도 아니지만, 이 세계의 사람들 에겐 엄청난 일일 수도 있었다.
알아서 나아질 거 굳이 말해서 일 키우지 말자.
결론을 내린 나는 희사를 불렀다.
그러자 문 앞에 서 있던 희사가 곧 바로 들어왔다.
“의복을 입혀 주거라. 갈 곳이 생겨
서.”
그런데 희사가 이상했다. 평소 같았 다면 당장에 내 명을 따랐을 텐데, 그녀의 얼굴이 뭔가 석연지 않았卍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와 다른 궁 녀들이 내 옷을 들고 들어왔다.
그들의 얼굴 또한 그다지 좋지 못 했다.
뭐야. 무슨 일인데.
“헌데 마마, 동궁을 나가실 생각이 신가요?” 내 옷을 입히며 희사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릴 생각이다만.”
그 말에 희사가 놀란 얼굴을 했다.
안쓰러움과 당황이 섞인 얼굴이었다.
“마마, 헌데•••
어물대는 말에 나는 확실한 불길함 느꼈다.
그러고 보니 동궁이 북적였다.
하는 일이 거의 없다 보니 궁녀들 이 이렇게까지 많지는 않았는데.
그러고 보니 오늘은 모르는 얼굴도 두엇 보였다.
희사가 왜 나가는 걸 물었지?
그 생각을 한 즉시 나는 몸을 돌려 장가로 뛰어갔다.
장을 열면 동궁의 대문이 보이는 위치였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대문을 지기 고 있는 환관들이었다.
평소에는 보이지 않았던 문지기들.
그 꼴을 황망히 보고 있는데, 희사 가 면목 없다는 듯 다가와 고했다.
“폐하께서 마마의 집거령을 내리시
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