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내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용 대모. 번역이 그렇게 된 걸까. 이곳에 요정이 없긴 하지. 그렇다고 귀신이라고 할 수도 없고 말이
푹신한 의자. 조용한 목소리. 새하 양게 빛나는 햇살. 코끝에 스치는 모란 향기.
그곳은 미리내의 궁이라기엔 과하 게 편안했다.
'나도 용 대모••• • 미리내보다 강 한 사람으로••• 나는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잠에 빠져들었다.
“그래서 신데렐라는•••
미리내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읽 던 동화책을 덮고는 시선을 가만히 두었다.
그곳에는 흑발의 아이가 곤히 잠들 어 있었다.
그 모습 보는 미리내의 입가가 늘어졌다.
“잘 자네.
놀라울 만큼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 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가람이 들었다면 귀를 씻고 싶어 할 만한 목소리였다.
그는 혹 아이가 깰까 조심하며 책 고- 띠 그 느 마찬가지로 조심스러운 몸짓으로 책을 탁자에 올려 두었다.
산아는 오늘 기분이 아주 좋아 보 였다.
늘 보여 주던 인위적인 미소가 아 닌, 진심으로 웃는 미소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 아이는 잘 웃지 않았다. 대부분 무표정이었고, 가끔씩 찡그렸으며 미리내를 볼 때면 입술을 끌어당겨 웃었다.
미소 같지 않은 그 미소가 미리내 는 안쓰러웠다.
아이는 상냥했다.
웃는 것이 예쁠 것 같다는 미리내 의 말에 그의 앞에서는 늘 웃었다.
하지만 미리내는 그게 진심이 아니 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덟 살의 아이의 눈에서 볼 수 없는 초연함이 산아에게는 있었다.
사랑을 갈구하는 나이에 아이는 사 람을 피했다.
그나마 그 호위와는 친하다 하지 만, 그 또한 아이일뿐더러 '그림자' 는 인간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었 다.
어젯밤 산아에게 원하는 동화책을 읽어 주지 못했다는 사심이 없다고 볼 수는 없지만, 밤마다 잠이 들면 멍한 얼굴로 복도를 걷는다는 아이 가 편하게 잠들었으면 했다.
산야의 그러한 모습들이, 그에게 한 아이를 떠올리게 했으므로.
그때, 산아가 미간을 살풋 찡그리 며 몸을 뒤틀었다.
아무리 푹신한 방석을 깔아 두었어 도 의자인 탓에 불편한 모양이었다.
미리내는 뒤척이는 아이에게 조용 히 다가갔다.
그는 것털을 들듯이 사뿐히 산아를 안아 들고는 아이를 침상에 눕혔다. 이불을 잘 여며 준 그가 산아의 이마를 쓸고는 작게 콧노래를 흥일 거렸다.
혹 이곳까지 오느라 어디 긁힌 곳 은 없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그것을 들은 산아의 입꼬리가 배시 시 올라갔다.
마주 웃은 미리내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아까 산아에게 읽어 주던 동 화책을 집어 들었다.
말을 더듬지 않도록 몇 번이고 다 시 읽은 동화책을 펼치며, 미리내는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에 산아가 깰 까 조심히 책장을 넘겼다.
평화로운 오후였다.
•••미졌나 배'
미리내의 침상에서 일어나자마자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내가 왜•••••• 여기서••
나는 황망한 얼굴로 스르록 떨어지 는 이불을 바라보았다. 내 방에 있 는 것처럼 부드러웠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내 몸 위 에 덮여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기억이 없으니 의자에서 걸어 와 여기 누워서 이불을 덮었을 리 없고. 누가 덮어 준 거지?
그리고 그걸 미리내가 가만히 두었 다고?
나는 하얗게 질려 주위를 돌아보았 고, 다행히도 아까 앉아 있었던 자 리에 그대로 앉아 있는 미리내를 발 견할 수 있었다.
그를 발견하자마자 나는 크게 안도 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리내는 양손을 얌전히 무릎 위에 둔 채 잠들어 있었다.
다행이다. 둘 다 잠들어서 궁녀가 나만 침상에 눕혀 두었나 보다. 미리내를 안아 옮길 수 없으니 그 녀로서는 옳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나에게는 아니었을 뿐이지.
나는 조용히 침상에서 내려왔다. 이불이 살짝 바스락 소리를 내었을 때에는 순간 몸이 뻣뻣하게 굳었으 나, 다행히도 미리내는 잠에서 깨지 않았다.
미리내가 나를 아무리 아낀다고 해 도 아끼는 인형 내지 이1완동물 정도 일 것이다.
그런 것에게 침상을 내어 줬다는 것을 미리내가 안다면•••
나는 심란하게 흐트러진 이부자리 를 바라보다가 조용조용히 이불을 정리했다.
베개를 똑바로 두고, 이불을 쭉 펴 니 대충 모양새는 나왔다.
물론 어린아이 손으로 조물거렸으 니 깔끔하진 않았다. '나가면서 궁녀한테 부탁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천천히 발을 떼었다.
발끝부터 발꿈치까지 땅에 모두 닿 게 해 소리를 최대한 죽여 조심조심 문으로 걸어갔다.
끄呑1 끄 1리내를 바라보던 나는 마침내 문에 다다랐고, 문이 열리자 마자 발걸음을 점점 빨리해 전각의 출구에 다다랐을 때에는 숫제 뛰기 시작했다.
다만 내가 간과한 것은 내 치맛자 락이 잡지 않고 그대로 뛰기에는 너 무 길다는 것이었고, 내가 아직 작 은 어린아이라는 것이었다.
쿠당!
“0니”
나는 그대로 치맛자락을 밟고 넘이 졌다.
궁의 입구에서 대기하던 내 궁녀들 이 깜짝 놀라 내게 달려왔다. “마마!”
“넘어지셨- 안 다치셨어요?!”
노호성을 터트리며 달려오는 궁녀 들을 본 나는 무어라 대답할 것도 없이 입가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시끄럽게 하지 마. 미리내 깨면 큰 일 나!
그리고 그 순간, 내 검지에 축축한
무언가가 닿았다.
검지를 떼어 보니 새빨간 피가 묻 이 있었다. 동시에 코끝이 화끈하게 아려 오기 시작했다.
“마마! 코피!” 그래. 희사. 나도 아니까 그렇게 큰 소리로 떠벌리지 마.
1-正 꾹 감고 숨을 크게 들 이쉬었다.
Il}-여으 가라앉히기 위해서였으나, 코에서 느껴지는 고통 탓에 실패했
다.
나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발을 쾅 굴렀다.
'역시 다신 안 와!'
다행히도 미리내의 궁녀가 일을 잘 했는지, 그날 이후로 미리내가 나를 다시 부르는 일은 없었다.
내가 다졌다는 말을 들었는지 듣도 보도 못한 약초들을 잔뜩 보내긴 했 지만, 그건 황제와 가람, 그리고 다 른 후궁들도 보냈으니 그러려니 했 다.
그 후로 특별히 대단한 일 없이, 커다란 일 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그러니까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
물론 그 셋은 계속해서 나를 찾아 왔고, 그 태도를 고수했다.
하지만 또다시 암살 시도가 있는다 거나, 무언가의 사건에 내가 휘말려 위험해진다거나 하는 일들은 없었
다.
매번 찾아오는 것도 처음에나 좀 무섭고 불편했지, 여러 번 반복되니 그냥 그런갑다 싶었다.
오늘도 그저 그런 날 중의 하루였 다.
나는 침의를 갈아입지도 않은 채 침상에 누워서 호떡 뒤집듯 몸을 뒤 집고 있었다.
궁녀들은 일찌감치 나가 제 할 일
= 0
하고 있었고, 방 안에는 고운 이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해가 중천에 떴지만 나는 이불에
얼굴을 파묻었다.
실현 가능성이 몹시도 낮아 보였던 나의 백수 생활은 의외로 작실하게 진행 중이었다.
근데 어째•••••• 덥네.
이불에 두어 번 볼을 비비던 나는 결국 이불을 뻥 차 냈다.
목과 등허리에 땀이 차는 느낌이 찝찝했다.
뭐야. 왜 이렇게 덥지? “게 누구 있느냐.”
“예, 마마.”
궁녀들을 부르자 곧바로 문이 열리 며 희사가 들어왔다.
나는 손부채질을 하며 침상에서 폴 짝 뛰어내렸다. 그 모습을 본 희사 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 송구합니다 마마. 침상이 더 우셨군요.” 그녀가 방 안에서 부산히 움직이더 니 자그마한 돌을 꺼냈다.
그 돌을 두 번 두드리니 시원한 공기가 돌기 시작했다. '마력석이구나.' 동 대륙의 이능은 어딘가에 머물지 않았지만, 서 대륙의 마법은 특정한 무언가에 새기는 것이 가능했다.
확실히 편리한 만큼 황궁에서는 서 대륙의 물건들을 심심치 않게 찾아 볼 수 있었다.
저건 현대로 따지면 에어컨 정도라 는 건데. 벌써 그렇게나 더위졌다 고?
“이제 푸른달이라 그런지 볕이 뜨 겁네•••••• 우리 마마님 더위 잡수시
면 안 되는데.” 희사의 중얼거림을 들은 나는 그대 로 딱 굳었다. 뭐, 푸른달?
'5월?!'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5월도 아 니있다.
이 세계는 음력으로 날짜를 셌으니 적어도 6월은 넘었다는 말이었다.
내 기억으로 혼례식 당일 날은 꽤 추웠는데.
먹고 자고만 반복했을 뿐인데 한 계절을 훌떡 쌈 싸 먹은 나는 잠시
벙 쪄 있었다.
와, 시간 진짜 빨라. 벌써 여름이 라니.
새삼 지금껏 지내 온 시간들이 눈 앞을 주마등처럼 스쳐 지L}7A갔다.
황제와 미리내, 가람과 또 다른 후 궁들은 종종 나를 찾아왔다.
후궁들 중에는 조윤처럼 내게 텃세 를 부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 경 우 대부분 길게 끌지 않았을뿐더러 그렇게 한 번 찾아온 후궁들은 두 번 다시 화선궁의 문덕을 밟지 않았
다.
씩 달가운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 다고 그렇게 못 참을 만큼 화가 나 지도 않았기에 가끔 찾아오는 이벤 트 정도로 생각하고 넘겼다.
황제는 시간을 쪼개 나를 찾아왔 다. 그건 이틀에 한 번, 두 시간 정 도로 드물었지만 황제인 그녀의 처 지를 생각하면 자주 오는 편이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내게 말을 붙여 보려고 노력했고, 나는 웃으며 무뚝 뚝하게 응대했다.
그런데도 무엇이 좋은지 그녀는 화 선궁을 나갈 때마다 싱글벙글 웃고 있곤 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미리내와 가람 또한 그런다는 것이었다.
아니, 그들은 황제보다 한술 더 떴 다.
가끔 나를 제 궁으로 초대해 기묘 한 환대를 해 주기도 했으니 말이 다.
얼마 전에 가람의 궁인 화예궁에서 보았던 거대한 불새를 떠올랐다.
칭찬을 바라는 듯한 눈을 하고 있 어서 떨떠름한 낮으로 잘했다는 말 을 두어 번 하고 온 것도.
나는 따뜻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어 깨를 부르르 떨었다.
겨울의 끝자락에 황궁에 들어왔는 데, 어느새 나뭇잎은 짙은 색을 띠 고 있었다. 봄꽃들은 얼마 전에 생 을 다했다.
“세상에.”
나는 나도 모르게 작게 중얼거렸다.
새삼 시간이 흐른 것을 발견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맞아. 생각해 보면 며칠 전이 단오 라며 목욕물 색이 좀 달랐었지.
아주 조금이지만 기가 컸다고 좋아 하기도 했고••• 나는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내 .豸' 1-으曰 내려다보았다.
매끄럽지만 바싹 말라 있었던 겨울 과는 달리, 이제 내 손은 통통히 살 이 올라 있었다.
손뿐만이 아니라 온몸이 다 그랬 다. 어린아이 특유의 젖살이 오동통 하게 올라 이딜 주물거려도 말랑거 렸다.
그만큼 경계도 많이 풀린 것 같았 다. 사실 처음 황궁에 들어왔을 때 에는 꽤나 긴장했던 상태였으니 말 이다.
당장 저것들이 나를 언제 죽이려 들까, 말 한 마디만 잘못해도 트집 을 잡힐 텐데. 하는 마음으로 잔뜩 엎드려 살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보다시피, 황제와 나머지 둘의 비호 덕에 시간의 도 제대로 느끼지 못할 만큼 편안히 지내고 있었다.
맞아. 참. 변화가 하나 더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