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뜨자 보인 것은 내 침실의 천장이었다.
자세히 들여다본 적 없는 천장이었 는데, 괜스레 반가웠다.
천장과, 휘장과, 그리고•••
울고 있는 희사.
•••빼 울어.”
내 팔을 조심스레 닦으며 울고 있 던 희사가 깜짝 놀라 나를 바라보았 다.
나는 몇 번 헛기침을 했다. 오래 잤는지 목이 칼칼하다.
“마, 마마!” 내 목소리를 들은 희사가 더 울기 시작했다.
꼭 수도꼭지를 틀어 놓은 것 같다. 아무렴 우리 엄마 이능이 언령이 고, 미리내 이능이 치유인데 내가 죽을까.
나는 손을 뻗어 희사의 손등을 토 탁이며 타박했다.
“누가 보면 죽었다 깨어난 줄 알겠 구나.”
“거의 그리하셨습니다! 놀러 나가 신 마마께서 그리 돌아오셨을 때에 얼마나 놀랐는데요!” 그러게. 어떻게 동궁으로 왔네.
“내가 얼마나 잠들어 있었느나?” 무려 하루를요!”
일주일 정도를 예상했던 나는 조금 김이 샜다.
어쩐지 몸이 잘 움직여지더니만.
“하루 가지고 무슨 호들••• 0
다.”
희사가 또 난리 칠까 봐 황급히 부정했지만, 이미 희사의 눈에는 는 물이 그렁그렁했다. “폐하께 다 말씀드릴 거예요!”
이 와중에 나 머리 아플까 봐 목 소리는 안 기우는 정성이 눈물 난
다.
그래, 그래.
알았어. 걱정시켜서 미안해.
희사가 조금 진정된 뒤, 나는 궁금 했던 것을 물었다.
“여류와 노을은?”
•••귀비 마마께서 친히 치료해 주셨어요.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큰 일 날 뻔했다 하셨습니다.”
고운의 이능에 노출된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림자들도 결국 살수이니 독에 대 한 내성을 키우는 훈련을 할 텐데.
그런데도 목숨이 위험할 정도였다
니.
'고운 엄청 강하네.' 기지개를 쭉 견 나는 다시 물었다. “고운은?”
본인의 이능이니 독에 타격을 입지 는 않았겠지만, 이능을 한 번에 많 이 쓴 것과 정신적인 문제가 있을 것이다.
또 저번처럼 가서 쉬지도 못하고 문 앞에서 울고 있는 거 아닌가.
내 질문에 희사의 얼굴이 이상해졌
다.
슬픔과 화남이 섞인 표정이었다.
“그 배은망덕한 것은 어찌 찾으셔
요.”
곱지 않은 그 말이 불길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나?”
“어찌 화도 내지 않으셔요. 감히 제 이능을 숨겨 마마를 위험에 빠트 리지 않았습니까!”
나는 희사의 토로에 한숨을 내쉬었 다.
고운의 이능에 내가 타격을 받은 게 문제가 된 모양이다.
“폐하께서 미리 안배하시지 않았더 라면 정말 큰일이 났을 겁니다. 별 다른 처벌을 내리지 않으신 것만도 폐하의 은덕이지요.”
“희사. 그리 말하지 말거라. 고운의 잘못이 아니었어.”
딱 잘라 말하자 희사는 입을 다물 었지만,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이 었다.
“허면 지금 고운은 어디 있느냐?” 나는 침상에서 내려오며 물었다. 우선 무사한지부터 확인하고 싶었
다.
그러나 희사는 내게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되어요.”
“만나실 수 없습니다.”
희사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그 결연한 얼굴에 나는 짜증스레 물었다.
“무슨 문제가 있다고 그러느냐.”
“송구합니다, 마마. 허나 폐하의 명 이셔요.” 엄마가?
내 의사는 포함되지 않은 채 내 행동이 제한당하는 건 빈말로도 기 분이 좋지 않았다.
화룡궁에 가야겠다고 말하려 했는 데, 서연이 엄마가 왔음을 알렸다.
고이어 문이 열리고 엄마가 들어왔
다.
희사는 눈치를 보더니 방을 빠져나 갔고, 조용한 방 안에 둘이 남았다. “깨어났구나, 산야.”
엄마는 나를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
다.
안도와 착잡함이 담긴 한숨이었다.
“이 말썽꾸러기 같으니. 크게 앓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또 이래. 어미 속을 새카맣게 태우니 좋더냐?” 엄마가 애써 웃으며 장난스레 말을 걸었지만,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어찌 고운을 만나지 못하게 하십 니까?” 돌려 말할 겨를이 없었다.
내 물음에 엄마의 표정 또한 굳어 졌다.
엄마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더니, 나를 침상에 앉히고는 무릎을 꿇어 시선을 맞췄다.
“너도 예상했겠지만, 고운이 더 이 상 황궁에 머무르는 것은 불가할 것 같구나.”
조심스레 꺼내 놓은 말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한 번 더 생각해 주세요.”
나는 절박하게 엄마를 붙들었다.
“이번에 나가자고 한 것도 제 고집 이었어요. 그 이능도 저는 이미 알 고 있었는데, 제가 안일했던 거예 요.”
왜 황궁 밖을 나가 보자고 했을까. 나는 뼈저리게 후회했다.
언젠가는 터졌을지도 모르는 일이 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은 아니 있을 텐데.
엄마는 내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안타까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 보았다.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위험하지 않을 거예요. 특수한 상 황 때문에 그랬던 것뿐이고, 고
말문이 막혔다. 나는 입술을 꾹 깨 물고는 애써 말을 맺었다. “고작, 이번 한 번이었잖아요.”
지금까지 아무도 고운이 맹독의 이 0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정 도로, 고운은 잘 숨겨 왔다.
그만큼의 컨트롤이 된다면, 정말 안전할 텐데.
“하지만 산아. 한 번으로 끝난다는 보장 또한 없지.”
엄마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다정하면서도 냉혹했다.
“고운의 이능이 마호 가의 이능보 다 더 강하고 범위도 넓더구나. 범 인(凡人)조차 이능을 제대로 다스리 지 못하는 것은 큰 문제인데, 고운 이라면 어떻겠니.”
“그리고 무엇보다, 네가 깨어나기 전에 한 번 더 그런 일이 있었단 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나는 그 말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엄마가 슬프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
다.
“누구도 진정시킬 수 없어 내가 도 작하고 나서야 힘이 가라앉더구나.”
“그러면, 엄마는 다스릴 수 있는 거잖아요.” 나는 다시 되물었다.
마지막 희망이었으나, 엄마는 재차 고개를 내저었다.
“아가. 모든 이능이 그렇듯이 언령 또한 만능은 아니다. 이번에 너도 느꼈지 않니?” 나는 그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언령 덕에 나는 고운의 이능에서 비교적 안전했지만, 아예 타격이 없 지는 않았으니까.
고운이 제 능력을 컨트롤하지 못한 다면 계속해서 문제가 생길 것이고, 많은 사람들의 안전에도 문제가 생 길 것이다.
“또다시 이런 일이 생긴다면 그 때 는 그 아이를 벌하지 않고 넘어갈 수 없을 것이다.”
너에게도, 그 아이에게도 이것이 옳아. 나는 엄마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
다.
그게 옳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래도.
“이번 한 번만, 제 억지를 들어 주 시면 안 되나요?” 힘없는 내 말에 엄마가 잠깐의 침 묵 뒤로 답했다.
“미안하구나.”
지치고 슬픈 목소리. 엄마가 조심 스러운 손길로 나를 끌어안았다.
“지금껏 고운이 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던 것도 네가 그 아이 를 아끼니 그냥 놔두었다. 하지만 이번은 안 돼.”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네 안전이 야. 이 문제에 있어서•••••• 네가 싫 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강제할 수 밖에 없구나.” 그 말이 다 맞았다.
내 반론은 그저 억지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이제 다시는 못 보 는 거잖아.
“서신은 계속 주고받을 수 있단다. 너무 상심 마렴. 응?” 엄마가 나를 달랬지만, 나는 차마 얼굴을 필 수가 없었다.
멀리서 종소리가 들렸다. 자시(오 전 12시~2시)가 지났다는 의미의 종이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아직 깨 어 있었다.
짬이 영 안 오네.'
억지로 잠들려고 눈을 감았지만, 짧게 선잠을 자고 결국 다시 깨어났
다.
심란해서 그런가.
나는 침상에 앉아서 허공을 응시했
다.
푸르스름한 달빛이 방 안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이 시간에 깨어 있는 것도 오랜만 이네.'
낮 시간에 자꾸 졸려서 이른 시간 에 꼬박꼬박 잠든 이후부터는 한밤 중에 깨어 있었던 적이 거의 없었 다.
그래도 꽤 오래전에, 고운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때 그 새벽이 정말 즐거웠었지. 말이 많은 성격이 아닌데도 그 수 다가 왜 그리 즐거웠는지, 참 신기 하다.
이 세계에 오고 난 뒤 처음으로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상대라 그랬 을까?
그래서인지, 다른 이유에서인지 고 0은 내게 각별했다.
앞으로 다른 친구가, 동생이 생기 더라도 그 애만큼 각별할 수는 없을 거야.
새로 만날 아이는 고운 만큼 책을 잘 찾지도 못하고, 푸르스름한 새벽 빛의 눈동자도 아닐 것이다.
나를 걱정해서 내내 새벽까지 내 곁을 지키지도 않을 것이고, 고작 반말을 하라는 말에 안절부절못하지 도 않겠지.
아니, 설령 그렇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고운은 이미 내 가족인데.
문득, 덜컥 겁이 났다.
앞으로 널 영영 못 보게 된다면, 네가 없어도 나는 괜찮을까?
그 때, 토독. 하고 작은 소리가 들 렸다.
새가 부리로 두들기는 것 같은 조 그마한 노크 소리.
나는 창가로 다가가 창을 열었고, 아래에 서 있는 소년을 발견했다.
창을 활짝 열어 둔 나는 두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머지않아 장으로 한가득 드 어오던 달빛이 가려졌다.
어느새 길어진 앞머리가 눈가에서 살랑였다.
그 사이로 투명하리만큼 맑은 정회 색 눈동자가 보인다.
꼭 처음 고운을 만났을 때 같0갔다.
여전히 앳된 얼굴을 마주하며, 나 는 울듯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