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장 어제까지만 해도 나한테 아기 달래라고 상소가 왔었는데? “언제?”
“간밤에 사라지신 모양이에요. 문 안 인사를 드리러 갔는데 사라져 있
있다지 뭡니까.”
그거 그냥 그 애가 움직인 거 아 니아?
목도 못 가눌 정도의 갓난아이가 아니었다.
웃어서 사라진 게 아니라, 그냥 본 인이 어딘가로 움직인 것 아닌가?
“아기씨께서 움직이셨을 수도 있지 않느냐.”
“아기씨께서는 우시기만 하시지, 움직이지는 않으십니다. 허니 사라 진 게 맞으셔요.”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다들 내년에는 풍년이 오겠다며 기 뻐하는 걸 나는 어정쩡히 바라보았
다.
그 에는 그리 급히 갔담. 아직 인사도 못 했고, 무엇보다. '웃는 일굴 보고 싶었는데.'
그래도 인간 같이 생겼다고 정이 는 걸까.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어찌 되었든 잘 돌아갔겠지. 내년 에 풍년이 든다면 더 좋고.
방 안으로 돌아온 나는 장을 열있
다.
요 며칠 향긋하게 풍기던 꽃향기가 모두 사라져 있었다.
꼭 꿈을 꾼 것 같다고 생각하며, 나는 답장을 쓰려 의자에 앉0갔다. 종이를 펼치고 묵을 갈던 나는 한 구석에 멀뚱히 서 있는 고운을 보고 멈칫했다.
고운과 거의 늘 붙어 있지만, 나는 서신을 쓸 때만큼은 고운을 꼭 내보 냈다.
'산아'가 도움을 받은 시점에서 완 전히 숨기기란 불가능하지만, 그래 도 서신 내용을 본다면 다른 사람이 라는 게 완전히 들통이 나 어쩔 수 없었다.
축객령을 내리려던 나는 문득 생각 난 것을 물었다.
“고운. 너는 아기씨가 사라지는 모 습을 본 적이 있니?”
매년 찾아오는 광경은 아니지만, 나보다는 궁에 오래 있었으니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하지만 고운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 를 내저었다.
“마마께서 어제 보시지 않으셨습니 까?” 그 태연한 말에 식은땀이 났다.
어제 나는 깨어 있는 동안 그 아 이를 보러 가지 않았다. “내가 밤중에 화룡궁에 갔었구나.”
“아기씨를 만나러 가셨습니다. 대 전 앞에서 기다리라 하시고 홀로 들 어갔다 오셨는데•••
애써 태연하게 말하자 고운이 말을 쏟아 냈다.
고운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 다.
고운은 밤의 산야 이야기를 할 때 절박한 얼굴을 한다.
내가 기억해 내기를 바라는 것처
럼.
그렇지만 어쩌니. 사실 다른 사람 이란다.
“조금 피곤해서 그랬나. 잘 기억이 안 나네.” 그렇게 말할 수가 없어서, 나는 잘 둘러댔다.
황급히 고운을 내보낸 뒤, 나는 가 만히 붓을 잡았다.
'산야'가 어제 그 아이를 보고 나 서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걸 까?
갑자기 내게 왜 행복하나고 묻는지 는 모르겠지만•••
행복이라는 건 참 복합적인 감정이
다.
아니, 애초에 감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래도 지금 누군가 내게 행복하나 고 묻는다면 나는 이미 해 줄 말이 정해져 있었다.
[응. 행복해.]
나는 고민 없이 그렇게 쌌다.
일평생 불행했던 아이에게 내가 행 복하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까 싶기 는 했지만, 내 솔직한 대답은 저것 이었다.
그건 기쁨과는 조금 달랐다. 사실 설명할 수도 없었다.
평범한 일상.
때때로 즐겁고 슬프고 화가 나는 나날들.
그리고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 하는 사람들.
그것들 사이에서, 어느샌가 나는 아주 당연하게 행복해졌다.
이 아이가 양보해 준, 이 아이의 것이었던 삶 속에서.
그래서 나는 그 질문을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나는 행복해.
너는?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그 질문을 적지 못하고 서신을 봉했다.
그날 하루는 평범했다.
내년의 풍년을 약속받아 그런지 식사가 조금 더 호화로웠고, 서린이 오기로 한 날이라 함께 초은을 보 러 갔다.
초은은 툴툴대면서도 우리를 받아 주었고, 서린은 돌아갈 때 발그레한 볼로 웃고 있었다.
그런 평범한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 나는 답신을 받았다.
[그럼 됐어.]
가장 첫 줄에 적힌 문장이 그것이 었다.
조금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여전 히 알 수 없는 아이였다.
내가 행복하다면 됐다고?
[앞으로는 서신을 쓰지 않을 거야.
이제 잠들어 보려고 하거든.
잠깐 동안이지만 고마웠어.
잘 지내.]
그리고 이어진 것은 갑작스러운 작 별 인사였다.
대체 이 며칠 사이에 무슨 일이 있길래 갑자기 이래?
[그게 무슨 말이야?
잠든다니. 갑자기?]
나는 곧바로 답신을 썼다.
잠든다는 건 이 아이가 사라진다는 의미 같은데, 자신의 존재 유무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처음 들었다.
그냥 정말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밤에 잠들어 있겠다는 건가?
나는 괜히 조급해진 마음을 천천히 눌렀다. 그래도 내일 아침이면 답신이 올 것이다.
기분이 상한 일이 있다면 사과를 하고, 자초지종을 들어 봐야지. 하지만 다음 날, 내 머리맡에 놓인 서신은 여전히 내가 쓴 것이었다.
'산에의 글씨체는 나와 닮아 있었 기에 꼭 그 아이가 쓴 것처럼 보였 다. 하지만 내용이 바뀌지 않았다. 저번에도 한 번 서신이 오지 않은 적이 있기에 나는 하루를 더 기다렸
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 뒤로 이틀, 사흘. 아무리 기다려도 답신은 오지 않았 고, 나는 혼란스러웠다.
정말로 사라진 것 같잖아.
이제 날짜를 세기를 포기한 어느 날, 나는 내가 하도 펼쳐 보아 너덜 너덜한 서신을 접어 두고 방을 나섰
다.
口}마•
그런데 궁녀들의 얼굴이 조금 이상 했다. 다들 감격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 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지, 싶었을 때, 그나마 태연한 얼굴의 서연이 내게 말했다.
“귀비 마마와 선비 마마께서 와 계 시온데, 어찌할까요?” 미리내랑 가람이?
이 아침부터 찾아올 일이 뭐가 있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서연에 게 안내하라 말했다.
침의를 갈아입지 않았지만 상관없 을 것 같았다.
“산야.
문이 열리자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미리내가 보였다.
다리를 덜덜 떨고 있던 가람도 한 박자 늦게 일어났다. “이 아침부터 무슨 일이십니까?” 그 물음에 미리내가 어색하게 웃었 다. 그가 몸을 낮추고 내게 팔을 벌 렸다.
“잠시 이리 와 보련?”
나는 의아해하면서도 미리내에게 안겼고, 나를 조심히 감싸 안은 미 리내가 작게 노래를 불렀다.
따뜻한 온기가 발치에서 올라오는 느낌. 독특한 노래.
'이능기 아픈 데가 없는데, 갑자기 왜? 어리둥절해 하는 나를 품에서 놓아 미리내가 내 머리칼을 쓸어 주있
다.
그 눈빛이 애틋했다.
“이제 정말 괜찮은 모양이구나, 아 가.”
그 말이 끝나자마자 크흡, 하고 코 들이마시는 소리가 났다.
가람 울어••••••?
“무엇이요?”
나는 이 이상하게 훈훈한 공기를 더 버티지 못하고 결국 물었다.
미리내는 내 혼란을 이해한다는 듯 내 머리를 몇 번 더 쓰다듬다가 말 했다.
“이제 밤에 깨어나 돌아다니지 않 더구나.” 그 말에 나는 멍해졌다.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궁녀들이 불침번을 섰고, 내게 이상이 있다면 엄마와 이들에게 보고할 테니.
무엇보다 엄마가 알고 있었으니 미 리내도 알 거라 생각했다.
내가 놀란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이제 밤에 깨어나 돌아다니지 않 는다고.'
'산야가 답신을 하지 않을 뿐이라 고 내심 생각하고 있기도 했다.
그런데 저 말은 '산야가 정말 없 어졌다는 의미잖아.
가람이 벌게진 눈으로 내게 다가왔 다. 투박하고 큰 손이 내 작은 손을 조심스레 덮었다.
“다행이다, 이 녀석아.” 다들 내게 티를 내지 않았지만, 많 이 걱정하고 있었구나.
덩치는 산 만해서 얼굴을 밀가루 반죽처럼 구기고 있는 가람을 보며 나는 가만히 숨을 내뱉었다.
'산야는 꼭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사라졌다.
왜 내게 그렇게 물었는지, 대체 뭐 가 됐다는 건지 여전히 모르겠지만 이제 대답을 들을 수 없겠지.
또 우는 가람을 도닥이는데, 문 밖 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났다.
이내 문이 열리고, 백발의 여성이 보였다. “산야.
엄마였다.
나는 가람의 어깨를 두 번 더 토 닥여 주고 엄마에게 걸어7갔다. 엄마가 팔을 벌렸고, 그 품 안에 폭 안겼다.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끌어안 았다.
그래도 모두가 같은 마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위로와 안도를 받을 사람은 내 가 아니었다.
그래도 그 아이가 이 몸속에 조금 이라도 남아 있다면 전해지기를 바 란다.
너에게 잠시 깨어 있었던 그 밤이 위로가 되었을까?
너도 이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나는 조금의 안타까움을 느끼며 눈 을 감았다.
그래도 다행인 일이다.
내내 슬퍼 보였던 네가 이제는 정 말로 잠들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