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싫어.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다. 인간 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감정이 었다.
일하기 싫어.
그냥 놀고 싶어!
일이라면 전생에 정말 뼈 빠지게 했다.
세상은 대부분 상냥하지 않지만, 물 려받은 재산도 없는 고아에게는 더 욱 그랬다.
먹고 살기 위해 열심히 살았다.
다음 달 월세와 생활비를 걱정하며 천 원이라도 아끼는 삶을 살다 다이 아몬드와 진주와 금이 넘쳐나는 세 계에 들어오니 좋은 것은 사실이었
다.
내 생존에 필요한 모든 일들을 내 가 해결하지 않아도 되었으니 말이 다.
황궁에서 마냥 놀지는 않았지만 공 주의 교육은 후궁과 다를 수밖에 없 다.
그리고 특히 서라국의 후계자 수업 은 혹독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당장이라도 그만두겠다며 떼라도 쓰고 싶었지만, 이미 나는 공주였
무엇보다 공주가 되겠다던 건 결국 나였으니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
다.
'망할 주둥이••• 그러게 좀 더 생각해 보고 말하지 그랬니.
뼈저리게 후회했지만 엎지른 물을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나는 이제 꼼짝없이 눈 돌아가게 어려운 내용들을 지긋지긋하게 배우 게 될 것이다.
입시의 악몽이 떠올라 괴로웠다. 땡
땡이치면•••••• 안 되겠지. 그자•• '그래도 강연엔 참석하지 않아도 되
겠네.'
지금까지 나는 그래도 후궁인지라, 간간이라도 황제와 후궁들의 강연에 얼굴을 비춰야 했다.
하지만 이젠 공주가 되었으니 참석 할 이유가 없었다.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늘어지게 잘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입꼬리가 슬며시 올근H갔다.
그래. 어떻게 세상에 나쁜 일만 있 겠어.
“아륜이 정확히 언제 시작하느나?” “나홀 뒤입니다, 마마.”
내게 남은 자유시간은 이제 고작
96시간인 것이다. '최대한 알차게 보낸다!'
짹짹, 짹짹.
새가 지저귀는 상쾌한 아침. 내게 주어진 마지막 나흘 중 첫 번째 날.
나는 화룡궁의 전각 앞에 서 있었
다.
'빌어먹을•••
당장 내 방에서 늘어져서 자도 아 까울 판에 내가 지금 왜 여기에 있
그건 다름 아닌 강연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고하여라.”
대전 앞에 서 있던 환관이 나를 보 고 놀란 얼굴을 했다.
후궁들의 강연에 공주인 내가 참가 한다고 하니 그럴 법도 했다.
그래. 나도 알아. 그래서 오고 싶지 않았어.
'그 서신들만 아니었어도•••
어제, 내가 이제부터 나홀간은 무슨 일이 있어도 놀겠다고 다짐했던 그 때.
마치 나를 놀리기라도 하듯 후궁들 이 내게 서신을 보냈다.
서신의 내용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내일 강연에 참여해 달라는 것이었 다.
명령하듯이 보냈어도 '어휴, 그래 이게 내 팔자지' 하며 참가했을 텐 데, 그 많은 서신들이 다 마지막으로 얼굴 한 번만 비춰 달라고 애원을 하니.
안타깝게도 난 그걸 모두 무시할 만큼 매정하고 게으르지는 못했다.
의아한 시선에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턱을 까딱이니 결국 환관이 고 개를 숙였다.
“공주 마마 드시옵니다.” 환관이 용케도 호칭을 헷갈리지 않 고 나의 방문을 알렸다.
곧 문이 열렸고, 나는 티 나지 않게 목을 가다듬고는 그 안으로 발을 들 였다.
“제가 늦었습니다. 아직 시작하지 않으셨는지요?” 천연덕스러운 내 말에 이미 모여 있던 후궁들의 눈이 휘등그레졌다. 그럴 법도 했다.
아무리 참석해 달라 서신을 보냈다 고는 하나 말 한 마디 한 번 제대로 해 본 적 없는 사람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안 친한 사람들이라 도, 열 명 넘게 똑같은 부탁을 하는 걸 어떻게 매정하게 고이 씹이 비리
예화와 미리내, 가람은 그저 내 일 굴을 본 것이 좋은 듯 생글생글 웃 고 있었다.
“강회 공주. 일찍 일어났나 보구
나.”
상냥하게 웃으며 말을 건네는 예화 의 말에 양심과 자존심이 동시에 찔 렸다.
내가 매일 늦잠만 자는 줄 아나 보 지?
언제 꼭 그렇기만 한••• • 건 맞지
'대놓고 말하면 민망하잖아. 이 눈 지 없는 양반아.' 나는 슬그머니 그녀의 물음을 무시 하고는 내 자리에 가 앉았다.
자리는 미리내와 바뀌어 황제와 미 리내의 사이에 끼인 것을 제외하고 는 그리 많이 바뀌지 않았다.
내가 자리에 앉기에 무섭게 예화가 제 옆에 서 있던 측근에게 눈짓했고, 그 즉시 궁녀들이 양손 무겁게 접시 를 들고 우르르 들어왔다.
내 앞에 놓는 다과는 날이 갈수록 점점 늘어 어쩌다 보니 황제와 거의 비슷한 크기의 다과상으로 교체되어 아 했다.
이 특별 대우를 아무도 항의하지 않는 것을 처음에는 불안해했으나,
이제는 별생각이 없었다.
공주까지 시켜 줬는데 뭔들 못 해 주겠나.
상에 손도 대지 않는 내게 시선이 쏠린 터라 당과를 하나 집어 들자 그제야 시선들이 흩어졌다.
나는 당과를 오물오물 씹으며 조금 은 부드러웠던 시선들이 서로를 향 하며 날카로워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귀여워라•••
“오물오물 먹는 것 좀 배” 들려오는 말은 이제 제법 익숙했다.
궁 안에 어린아이가 없다 보니 꽤 자주 듣는 말이었다.
처음엔 떨떠름했지만 이젠 그러려 니 했다.
어휴. 그래.
나 귀여워. 세상에서 제일 귀엽다.
귀여운 걸로 세계 제패도 할 수 있 고 평행우주도 만들 수 있다.
좀 더 이어지려던 생각은 한 후궁 의 말에 끊겼다.
“본가에서 서신이 왔습니다, 폐하.” 푸르스름한 은색 눈동자를 가진 남 자였다.
새카만 머리와 대조되는 흰 피부의 후궁이 면목이 없다는 듯이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그런 그를 비웃듯이 회색 머리카락 의 후궁이 툭 말을 건넸다.
“굳이 보여 주지 않아도 될 것 같 군요. 백안.” 그 말에 여기저기에서 탄식이 터졌 다.
북부, 하고 누군가가 짜증스럽고 고 상하게 중얼거렸다.
수십 개의 나라가 있는 서 대륙과 달리, 동 대륙은 서라국이 통일해 다 스린 지 오래되었다.
세계 자체는 지구와 비슷했기에 북 쪽은 황량했고, 대륙이 워낙 큰 탓에 남쪽도 그리 비옥하지는 않았다.
농업이나 축산업 등이 지구의 21세 기만큼 발달하지 않은 상황에 온도 가 영하로 내려가고 비 대신 눈이 내리는 땅은 쌀을 재배할 수 없었고, 그 탓에 추운 북부와 남부의 일부 지역들은 늘 식량에 쪼들렸다. 백안이라 불린 남자의 본가에서 온 서신은 북부에 식량을 보내 달라는 내용이겠지.
“지난해에 지금껏 유례없는 흉년이 들었습니다. 비축한 식량으로는 각각 의 영지를 먹여 살리기도 벅차거늘 또다시 북부에 보낼 수는 없습니다.”
“아륜의 준비로 국고 또한 바닥나 있습니다. 부디 혜안으로 굽어살피소
제법 맞는 말을 하는 그들을 나는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황제를 사랑하는 후궁들이 모인 터 라 궁중 암투가 없지는 않았지만, 오 가는 내용들이 나름 합리적이었다.
에두른 비난에 백안이 억울함과 수 지스러움이 섞인 얼굴을 했다.
“허나 폐하. 아버님 또한 한참을 고 심하시어 어렵사리 보내신 서신입니 다. 폐하의 자비가 아니라면 북부의 백성들은 모두 굶이 죽을 것입니다. 부디••
백안은 꽤나 절박한 것 같아 보였
다.
그는 자존심도 마다하고 수많은 후 궁들이 있는 곳에서 황제에게 애원 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고 있는 나는 의문에 고개를 가웃했다.
이 시대에는 굶어 죽는 사람들이 많은 건 알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똑같다고?
'땅을 비옥하게 만들어 주는 이능은
없나?' 후궁들의 태도도 어쩐지 이상했다. 저렇게나 짜증스러워하는 걸 보면 하루 이들이 아니라는 건데.
아무리 땅이 척박하다고 해도 늘 남부의 도움만 받으며 살아갈 수는 없다.
보통은 그 땅에서 살 수 있게 적응 하기 마련이다.
그것조차 재배하지 못할 만큼 땅이 적 박한가?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상황이 영 좋지 않았다.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데, 가만히 상 황을 관전하던 검은 머리카락의 후 궁이 입을 열었다.
드물게도 여자 후궁이었다.
“북부에 지급할 식량이 없다면 중 앙의 수확량을 높이면 되는 것 아니 겠습니까.” 국영수 위주로 공부해 서울대 간다 는 소리였으나 모든 이들이 그에게 집중했다.
그녀의 말이 무작정 뜬구름을 잡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탓이다.
기묘하게 시선을 끄는 사람이었다. 무어라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 만 그랬다.
“공부(*토목을 담당하는 관청)에 있 는 관리들을 파견하면 땅을 비옥히 할 수 있겠지요.”
“허면 물은 어찌 충당할 생각이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하 지만 익숙하지 않은 목소리였다.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니 예화가 보였다.
순간 화났나, 싶었지만 나와 눈이 마주친 예화가 헤실 웃었다.
하지만 내가 방금 들었던 온기 없 던 목소리는 분명했다.
나는 의아했지만, 그 말을 들은 여 인은 놀란 기색 하나 없이 빙그레 웃었다.
“수원께서 은혜를 베풀어야 할 듯 싶습니다만.” 수원.
이름보다는 성으로 사용하기에 더 낯익었다.
그리고 나는 그 호칭이 성이 맞다 고 생각했다.
후궁들은 모두 궁에 들어오며 성을 비렸으나, 강연에서만큼은 제 성으로 불렸다.
대부분 한 가문당 한 사람만이 후 궁으로 들어오고, 각자의 이능을 이 용해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난데없이 호명 당한 수원 가의 후궁이 얼굴을 확 찌푸렸 다.
반류의 사촌 동생인 그는 수원 가 의 후계자로 각광 받던 인물로, 황궁 에 들어와 제 장창한 앞날이 막혔다 는 이유 탓에 누구보다도 먼저 반류 의 목을 자르고 싶어 했다.
물론 이제는 충실한 황제의 종이였 다.
“비를 내린다면 자그마한 한 방울 한 방울을 모두 신경 써서 운용해아 합니다. 그것을 어찌 인간의 힘으로 한단 말입니까? 설령 수원에 축복을 내리신 이무기께서 오신다 하더라도 불가합니다. 여면께서 알고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수원이 잔뜩 격노한 얼굴로 쏘아붙 인 말에 여면이라 호명 당한 상대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대의 가문이 이능을 어찌 운용 하는지 알 터가 있겠습니까. 하연 가 의 선대 가주께서 산유 지방에 삼 일 동안 우박을 내린 전적이 있어 물은 것인데.” 수원 가는 하연 가에서 떨어져 나 온 방계였다.
방계라서 힘이 약하다는 조롱에 수 원의 얼굴이 붉어졌다.
드 0 나는 습관적으로 고 거기까지
개를 숙이고 당과를 우물거렸다.
슬슬 말이 싸움으로 넘어갔다. 굳이 싸움 구경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저잣거리의 상인들이 싸우듯이 고 성이 오가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사 나웠다.
비판하는 것과 비난하는 것이 에매 하게 뒤섞이는 고상한 말투는 상대 방의 속을 닥닥 긁어냈다.
당과 한 접시를 기어코 비운 나는 흐뭇한 예화의 시선을 받으며 말소 리가 끊이지 않는 회장을 가만히 바 라보았다.
말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허면 물을 한 곳에 담아 두면 되지 않느냐.
내가 잠깐이라도 신경을 쓰지 않으 면 물은 사라진다.
그럼 땅에 흡수될 때까지 기다려라. 이 땅이 얼마나 넓은데 그걸 일일 이 하나.
계속해서 물 타령이 이어졌고, 나는 여전히 의아했다.
땅이 적박해서 문제인가 싶었더니, 그건 해결할 수 있다고 하고.
단순한 식량의 문제라면 물이 그다 지 필요 없는 방법도 있을 텐데.
궁금증이 생긴 나는 그들의 말이 끝나기를 얌전히 기다렸으나, 격노한 후궁들이 두더지 잡기 게임처럼 불 쑥불쑥 튀어나오는 것을 보고 마음 을 접었다.
“저기•••
조심스레 손을 들고 중일거렸으나 변한 것은 없었다.
내 목소리가 너무 작았다. 나는 슨 을 내리고 크게 소리쳤다.
“저기!” 여전히 변한 것은 없었다.
한숨을 푹 내쉬며 얌전히 차례를 기다리려던 찰나,
“공주 마마께서 하실 말씀이 있으 시다잖니” 화르록-!
눈앞이 일순 시뻘게졌다. 수원이 능 력을 발휘했는지, 습기로 축축하던 실내가 한순간에 말랐다.
소음이 뚝 멎었고,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야, 너, 가람, 너 이씨••• 애써 일그러지려던 얼굴을 편 나는 최대한 태연한 체를 했다.
내 궁금증이 내가 생각해도 영 멍 청했다.
하지만 내가 지금껏 들은 이야기와 머릿속의 산야의 지식을 합쳐도 답 이 나오질 않는다.
벼를 키우려면 물이 많이 필요했다. 물로 넘어간 논제가 계속해서 바뀌 지 않는 것을 보아 꽤나 중요한 듯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벼에 국한 된 이야기.
“구황작물의 수를 더 늘리면 안 되 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