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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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미안해야지.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나 역시 미안해졌 다.
흥분이 좀 가라앉자 그제야 예화 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죄책감과 상처로 엉망이 되어, 웃 지도 울지도 못하는 표정이.
•••말이 심했나.
선을 긋고 대하길 여러 번.
무시에 가까운 무관심 속에서도 아 무렇지 않게 내게 웃어 주던 사람이 있는데.
방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서로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 분위기가 불편했다. 미안하기 도 했고,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기 도 했다.
불편하게 내려앉은 공기 속 나는 결국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문을 열고 나가는 대신 그 녀에게 다가갔다.
•••죄송해요.”
“제가 말이 심했어요.
그래. 당신도 처음이니까.
가끔은 노력만 앞서고, 눈치도 없 고, 마음 약하고 상냥한 우리 엄마.
가족다운 가족이 나도 처음이었
다.
그래서 나는 나도 모르게 완벽한 부모의 모습을 기대하고 있었나 보 다.
당연히 나를 믿어 주고 지지해 줄 줄 알았다.
예화의 태도가 잘했다는 건 아니 지만, 내 태도에 기대가 무산된 것 에 대한 실망이 섞이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부모라고 해서 모든 일을 잘할 수 도 없고, 나랑 똑같은 사람인데.
내 분노는 정당했다. 하지만 표출 방법에 대해서는 반성한다.
이번엔 나도 어른스럽지 못했다. 좀 더 현명하게 말할 수 있었을 텐
나를 바라보는 녹회안이 울먹이는 것 같았다.
그녀가 조심스레 팔을 벌렸고, 나 는 그 품에 안겨들었다.
“믿어 주지 못해 미안해.”
“네 말을 제대로 들어 주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 미안하다.”
나를 끌어안은 그녀의 팔이 작게 떨렸다.
“부족한 게 많은 어머니라서 미안 나는 숨을 작게 내쉬고는 그녀의 목 뒤로 팔을 뻗어 그러안았다.
토닥, 토닥.
가만히 등을 토닥였다.
언젠가 그녀가 내게 해 줬던 것처
“괜찮아요. 내가 다른 에들보다 더 똑똑하니까.” 한쪽이 부족하고, 한쪽이 넘치고.
평범한 건 아니지만 어찌 됐든 균 형이 맞으니 됐지.
그 말에 그녀의 몸이 작게 떨렸 다. 작은 숨소리 같은 웃음소리도 함께였다.
재밌습니까. 성공했네요.
나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며 웃었 다.
코알라처럼 서로를 끌어안고 있던 우리가 떨어지자마자 한 것은 식사 를 내오는 것이었다.
나는 벌써 두 끼를 굶은 데다 에 너지를 소비해 한참 싸우고 나니 배가 고팠고, 예화 또한 일하느라 식사를 잘 쟁기지 못했던 모양이었 다.
식사를 하겠다는 내 말에 궁녀들 의 얼굴은 밝아졌고, 그 덕인지 꽤 나 대단해 보이는 식사가 자려졌 다.
나와 예화는 잠시동안 말없이 밥 을 먹었고, 그녀는 종종 내 그릇에 반찬을 집어 올려 주었다.
과식했다 싶을 정도로 식사를 마 치고, 우리는 후식인 과일을 입에 물고 나서야 서로를 다시 마주 보 았다.
조금 긴장한 듯 보이는 예화가 낮 설었다.
그에 나는 새삼스러운 사실 하나를 떠올렸다.
'처음 싸웠네.'
예화와 싸운 것도 처음이지만, 이 세계에서 누군가와 싸운 것도 처음 이었다.
친하다고는 해도 어느 정도의 예 의는 지키며 사람들을 대하고 있었 기에 이렇게까지 이성을 놓은 적은 없었다.
금방 풀린 게 신기하기도 하고, 어떻게 싸웠나 새삼스럽기도 하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시선을 올 리자 예화의 녹회안과 눈이 마주졌 다.
그녀는 제법 긴장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지만•••
“네가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걸 안다. 어떻게•••••• 라고 물으면 되겠 느나?”
생각해 주는 건 고맙지만 대답하 기 어려운 질문이다.
그래도 한참 말을 골라 봤지만, 나는 결국 고개를 내저었다. “못 믿을 이야기에요.
이 세계는 책 속이고, 나는 다른 세계에서 그 책을 읽었다는 건 믿 어 주는 게 더 이상하지. 자조하는 게 아니라 매우 이성적 으로 생각한 결론이었다.
굳이 이해받지 못한다고 서글플 일 도 아니고.
홀로 간직하고 있는 비밀로 두어도 충분히 좋을 이야기다.
하지만 예화에게는 다르게 받아들 여졌는지, 그녀의 안색이 심각해졌 다.
“산아, 어미가 못 믿음직스럽다는 것은 알지만•••
“아니, 그런 의미 아니니까 진정하 세요.”
또다시 침을해지려는 그녀를 화급 히 만류한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잘 알아들 으려나.
“만약 제가 인간이 아니라 책이라 고 말한다면 믿겨지시나요?” 예를 든 말에 예화가 멈칫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믿으마.”
눈동자 흔들리는 거 다 봤습니다, 어머니.
“저는 폐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 면 못 믿습니다.”
단호한 내 말에 예화가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대체 왜 충격인 거야. 당연하잖아.
“그런 부류의 일입니다. 설명드리 기 어려워요. 믿을 수 있는 이야기 도 아니고요.”
“허나 산아. 나는 네 어미가 아니
나.”
다정한 염려가 담긴 목소리가 따 뜻했다.
엄마니까, 너를 사랑하니까 무엇 이든 믿어 주겠다는 의미이겠지.
그걸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건 다 른 문제였다.
그래서 덤덤히 말할 수 있는 거였 다.
그 모습을 가만히 마주 보던 나는 차분히 입을 열었다.
“예, 압니다. 하지만 무릇 세상일
은 사랑이 전부가 아니지요. 폐하 께서 저를 사랑한다 하더라도 태양 이 서쪽에서 떠오르게 하실 수는 없는 것처럼요.” “해 주마!” 아, 진짜.
예시라고, 예시.
적당히 알아들으세요. 불가능하다 고
짜증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 자 예화가 즉시 쭈그러들었다. “불가능합니다. 그렇지요?”
“그렇지•••
옳지, 작하다.
“그저 그럴 뿐입니다. 외면받을까 말하지 못한 슬픈 이야기도 아니고
요.”
덤덤하게 대답한 나는入。1- 근  예화의 손을 토닥여 주었다.
“제가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해도 믿어 주신다는 것은 들었으니 괜찮 습니다.”
“산아•••
“하여튼 지금 제가 드릴丁있는 말은 제가 평범한 아이들의 사고방 식과는 다르다는 것이에요.'
감동받은 그녀의 말을 나는 싹뚝 자르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잠시 머뭇거렸다.
이걸 믿어 줄까. 터무니없는 이아 기인 건 마찬가지인데.
하지만 나는 금세 그 염려를 지웠 다.
인간이 아니라 책이라는 것도 믿 어 주겠다는데, 이 정도면 믿어 주 겠지.
“미래를 조금 알고 있습니다.”
덤덤하게 대답한 말에 예화의  이 커졌다.
궁에 돌아왔을 때에는 해가 중천 에 떠 있었는데, 예화가 가고 난 뒤에는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아 있 었다.
등불을 밝힌 방 안에서 나는 침상 에 그대로 널부러졌다.
발을 동당거리던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혼났다.' 어쩌다 보니 또.
그러니까, 미래를 좀 알고 있다는 말까지는 괜찮았다.
원작에 나온 미래들을 알고 있는 건 맞았으니까.
' '그리면 이제 무엇을 V4ö/Lh.
문제는 그 뒤였다.
그 물음에 나는 제법 야무지게 대 답했다.
만병통치약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볼 생각이며, 똑똑하다는 걸 밝힐 생각은 없으니 다른 이를 이 용할 것이다.
물론 위험하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원하는 건 나를 지길 힘 정도 이니 무모한 짓도 하지 않겠다.
여기까지는 예화도 흐뭇하게 웃으 며 들어 주었다.
내 말실수는 그 뒤에 나왔다.
'꼬늘 간난 그가 일을 잘 해/ 쭸으면
'
좋겠어요
예화가 단번에 의아한 얼굴을 했다.
마찬가지로, 나는 단번에 내가 말실 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기윤을 만나는 것과 암살자일지도 모르는 누군가를 만나는 것은 안전 면에서 엄청나게 차이가 났다. 어쨌든 선유도 남자이니, 얌전히 속아 넘어가 주기를 바랐으나•••
'황후가 준준하 너/ 뜻이/ 따라 우/
'
인이 아님 턴/데.
'혹사 나/ 아비 말고 다른 이를  느냐?'
'황후에게도 물q/몰 E//L/ 거爻/말할
'
생각은 말고.
예화가 슬쩍 도망갈 퇴로에 땅땅 못을 박았다.
얼마나 해 봤다고, 그녀는 엄한 표 정을 잘 지었다.
나는 결국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잔아 이륜!'
예화가 대경해서 소리쳤고, 나는 오늘만 벌써 두 번째로 성 붙인 내 이름을 들어야 했다.
'그리 총멸하다면Ⅸ7 일가나 유함한 일인지는 몰라 그리했느Lk.흐
'아니, 알았지요. 그런다/ 으,咎장조 이/ 다른 이가 나와 있을지 제가 일까 았나요••
'0/ Li4Ök, 그래도 그쿠又/. 귀가 묻 지 않으면 즐결7 넘어갈 생각이었지 않어'
' '그럵又/간.
어우.
내 회상은 거기서 끝났다. 그 뒤 는 별로 생각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씩 수확이 좋았다. 예 화•••••• 그러니까 엄마랑도 조금 더 친해졌고, 집거령도 풀렸으니 말이 다.
'천천히 생각해 보니 그 만병통치 약이라는 게 원지 대충 짐작도 가 고
나는 장가에 팔을 괴고, 열댓 개 의 안부 서신에 섞어 보낸 서신을 떠올렸다.
오늘 초은의 서신에 내가 물은 것 은 그 약을 복용한 귀족들의 증세 였다.
서 대륙 사신과의 찾은 만남, 기
이 좋아지고 고통을 잊는다는 약 효.
실바누스라고 했나. 지구의 아메 리가 정도일 줄 알았는데, 유럽이 있던 모양이다.
아니면 서 대륙에서 이미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졌거나.
내가 예상한 것이 맞다면 그 약의 유통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했다.
'그건 또 어떻게 막나•••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는데, 아래 에서 작은 소란이 일었다.
내려다보니 대문이 시끌시끌했다. 나는 그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금빛 머리카락을 발견했다.
'동궁의 궁인들 중 금발은 없는 데.'
금발. 체구가 성인 남성보다 조금 더 작았다.
그러고 보면 아륜의 첫날 보았던 그 사신 아이도 금발이었는데.
동궁에 밤손님-살수가 아닌-이 찾아온 것은 처음이었다.
서 대륙의 그 아이가 맞나?
잠시 고민하던 나는 자리에서 일 어났다.
“고운. 우리 잠시 내려가 보자.”
아래로 내려가자 아이의 모습이 훨씬 선명하게 보였다.
한참 실랑이가 벌어지던 대문이 나의 등장으로 조용해졌다.
그리고 나는 그 남자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 하던 아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 자 금색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맞는 것 같은데.'
아이는 서 대륙의 옷을 입고 있었
다. 그것도 제법 고급스러운.
내가 한 발 다가가자 아이가 다급 한 얼굴로 마찬가지로 한 발 다가왔 다.
대치하고 있던 궁녀들의 얼굴이 딱 딱해졌다.
나는 아이를 내치려는 궁녀들을  만류했다.
무슨 생각으로 이 밤중에 몰래 찾 아온 건지 이유라도 들을 생각이었 다.
하지만 한 발짝 더 다가간 순간, 아이의 순박한 얼굴에 어색한 미소 가 띄워졌다.
“아름다운 밤입니다.”
이건 또 뭐야.
“귀인께서 길을 잃으신 듯하구나. 고이 돌려보내 드려라.”
나는 한 번 고개를 까딱한 뒤 뒤 를 돌있+다.
등 뒤에서 어어, 하고 얼빠진 소 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서 대륙에는 왜 저렇게 또라이가 많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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