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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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얼굴을 마주한 나는 잠시 멍해 졌다.
그녀가 지금껏 차가운 얼굴을 한 적은 있어도, 저렇게까지 화난 얼굴 은 처음 보았다.
그리고 그 화난 얼굴이 나를 향한 경우는 더더욱.
내 앞까지 성큼성큼 다가온 그녀가 숨을 하, 하고 내쉬었다.
“너, 이 녀석••
그녀는 무어라 말을 하려다 말고 멈췄다. 내 옆에 앉아 있는 그를 발 견한 탓이었다.
그는 익숙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예화에게 예를 갖췄다. “선유 아륜, 폐하를 뵙습니다.” 고개를 든 그의 남색 눈동자가 따 뜻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눈만 깜빡였다.
선유 '아로?
이름은 여전히 처음 들어 보는 이
하지만 성이 아륜이라는 것이 중요 했다.
예화와 비슷한 나이.
아륜이라는 성, 황궁을 비웠던 남
자.
'남자 형제는 없을 텐데.
그렇다면 후궁들 중 하나라는 건데. 후궁전에 비어 있던 자리는 없었다.
황후가 고향으로 귀양을 갔다는 이 야기는 들었지만••
고개를 번쩍 든 나는 예화와 선유 를 번갈아 보0갔다.
그러고 보니 둘의 분위기가 약간 이상했다.
“황후가 어찌 이곳에 있소?” 그리고 예화가 쐐기를 박았다.
'황후였어?!'
그래. 왜 정체를 안 가르쳐 줬는지 알 만하다.
황후란 말을 듣고도 어떻게 편하게 대할 수가 있어.
선유가 약간 원망스러웠지만 결국 쉽게 맘을 놓은 내 탓이니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산책 중 아이의 목소리가 들리기 에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그렇소?” 예화는 그리 궁금하지 않다는 어조 로 대답했다.
애초에 그녀의 관심사는 지금 선유 가 아니었다.
매서운 녹회안이 내게 향했다. “산야. 너는 어찌 이곳에 있느냐?”
그렇게 물으니 할 말이 없기느느 하 데, 먼저 멋대로 날 궁에 가뒀잖아 요.
안타깝게도 절대군주제인 서라국에 서 황제에게 그렇게 따질 수는 없어 입을 다물었다.
예화는 뭐라 더 말하고 싶은 듯 숨 을 들이쉬다가, 그대로 한숨을 내뱉 었다.
“동궁으로 돌아가거라.” 예, 예. 그래야지요•••
걸어왔던 아까와는 다르게 가마가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도살장에 오르는 기분으로 가 마에 올라탔다.
내 방 온도가 이렇게나 낮았던 적 이 있었던가. 나는 탁자의 무늬를 세며 괜히 딴 생각을 했다.
무겁고 불편하며 무서운 분위기 속 에서 다른 생각을 하는 건 내 버릇 이었다.
“내 네게 동궁에서의 집거령을 내 렸거늘  하지만 예화는 그렇게 두지 않았다. “어찌 백목정에 가 있던 것이나?”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앞, 그러니 까 탁자에는 내가 받은 서신이 펼쳐 져 있었다.
아비다, 라고 시작되는, 기윤에게 받은 서신이.
다 알면서 물어보는 건 만국 공통 인가.
“산아. 대답하거라.”
“네 아비를 만나러 간 것이 맞느
나?”
그놈 내 아빠 아닌데.
진지한 상황을 어떻게든 웃긴 것으 로 바꾸려는 머릿속이 자꾸 초를 졌
다.
“예. 맞습니다.”
만난 사람은 기윤이 아니었지만, 그 를 만나러 나간 것은 맞았기에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예화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
다.
“어째서?” 추궁하는 어조였으나, 적어도 물음 이었다.
묻는다는 건 대화의 여지가 있다는 의미 아닐까.
비록 상황은 험악하지만, 어쩌면 괜 찮게 마무리를 지을 수 있을지도 몰 랐다.
“제 아버지, 기윤이 만병통치약이라 는 것을 판매하고 있다는 것을 들었 습니다.”
말을 꺼내 놓는 내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그만큼 긴장되있다.
“그것이 궁금했습니다. 그는 제가 자신을 아비로 몹시 사랑하고 따른 다 알고 있으니 굳이 척을 지고 싶 지 않았고요.”
“그 말은 누구에게 들었느냐?” 그런데, 돌아온 예화의 대답은 싸늘 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내가 움찔하자 그녀는 표정을 풀었 다. 하지만 힘들다는 얼굴은 그대로였 다.
“네가 알 일이 아니라 하지 않았느
나.”
예화는 아주 골지가 아프다는 듯이 말했다.
여전히 제대로 듣고 있지 않다.
나를 그저 성가신 것으로만 취급하 는 그 태도에 나도 울컥 화가 났다. “허면 어찌 물으셨는지요?” “뭐라고?”
“제게 묻지 않으셨습니까. 어찌 그 리하셨나요?” 내 어조가 날카로워지자 예화가 숨 을 들이쉬었다.
피곤한지 눈 밑이 거뭇해져 있었다.
“네게 화낸 것은 미안하다. 허나 산
야. 이건 어른들의 일이다.” 결국은 또 똑같은 말.
벽에 대고 말하는 기분이다.
“여전히 제가 여덟 살의 어린아이 라고 믿으시나요?” 나는 힘없이 그녀에게 물었다.
“무언가 다르다는 걸 모르시겠어 요?”
“네가 총명하다는 것은 익히 안다. 하지만 산아, 이건 다른 문제야.”
“너는 보호를 받아야 하는 존재다. 네가 네 아비를 만나는 이유는 그가 그리워서지, 그 이외의 이유가 되어
선 안 돼.” 그녀는 끝까지 단호했다.
나는 여기 존재하는데, 여기 있다고 소리치고 있는데, 계속해서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째서 그렇게 말하는지 이유를 안
다. 충분히 이해할 수도 있다.
다만 문제인 것은 나도 감정이 있 는 사람이라는 것.
이해는 하지만, 그것과 감정은 다른 문제였다.
내가 말한 것이 터무니없다는 것도, 모두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도 알 고 있다.
하지만 예화만은 반드시 이것을 이 해해야만 했다.
내 욕심이었다.
극명하게 다른 의견이 대립했다. 나 는 이런 말싸움이 피곤했다.

“황궁은 안전하다고 하셨지요. 그렇 다면 어찌 동궁 안에 첩자가 있나 요?”
내 물음에 예화가 놀란 눈을 했다.
그녀도 몰랐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완벽한 보호라는 건 불가능해요. 저는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상 황에서 황궁은 안전하다, 허니 이곳 에만 있으라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 이 무슨 소용이 있답니까.”
“무슨 생각으로 그리하셨는지 압니
다. 저를 아끼시는 것도 알아요. 하
지만•••
목소리가 떨렸다. 분노와 서러움이 목 끝까지 치받았다. “왜 내 말은 들어 주지 않아요?”
“내가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하나 요? 그럼 자라리 그렇다고 알려 주 지, 왜 아예 들어 주지 않아요?” 아무도 나를 지지해 주지 않았다.
그런 상대를 이해하지만, 그게 더 비참했다.
“왜 이야기를 하자는 내 말은 무시 하더니, 밥을 굶는다는 기별에는 날 만나러 와요?”
“나는 사육되는 에완동물이 아니에 요. 나를 사람으로 대우한다면 짐승 처럼 식사만 챙겨 줄 것이 아니라 내 의견을 적어도 들이는 줘야 할 것 아닌가요?” 씹어뱉듯 말하고 이를 악물고 고개  근 든 나는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예화는, 엄마는 무이라 형용할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얼굴을 하는 그녀를 처음 보 았다.
하지만 나도 격양되어 있었고, 그녀 를 배려할 상황이 아니었다.
“나도 내가 미숙하다는 걸 알고 있 어요. 하지만 나는 머저리가 아니에
요.”
“아가, 나는
“내가 어리니, 동심을 지켜 주고 싶 었다. 너무 어린 나이부터 위험한 것 에 발을 들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닌가요?”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나도 계속해 서 말했어요.”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을 너무 많이 했는지 목이 아팠 다.
예화는 아무런 대답 없이 내 말을 듣고 있었다.
“왜 나갔나 물으셨죠?”
“아무도 내게 바깥이 위험하다고 알려 주지 않았잖아요.
악에 받쳐 마지막 말까지 쏟아 낸 나는 몸을 축 늘어트렸다.
그 와중에도 바깥에서 그 첩자가 듣고 있을까 목소리를 줄인 게 웃겼 다가, 내 말에 상처받았을 엄마가 안 타까웠다가, 또 미웠다.
나는 결국 이기적인 인간이라, 서러 움이 입가를 비집고 나왔다. “엄마라며. 근데 왜 날 안 믿어 줘 요?”
부모 또한 사람이다. 부족함이 있을 수밖에 없다.
기대한 내 잘못이라 생각하면서도, 감성은 그렇지 못했다.
할 말을 다 하니 후련하기까지 했
다.
하지만 엄마는 아니었다.
그녀는 내가 칼을 꽂은 것처럼 미 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희게 질린 입술이 말할 것처럼 달 싹이다 닫히고, 끝내 무너져 내렸다.
“산아, 나는••
“어미는•••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하안 입 술을 아프게 깨물던 엄마는 간신히 한마디를 했다.
“그릴••• 의도가 아니었다. 너를 애완동물이라 생각한 적도 없어.” 그 말을 내뱉으면서도 아파 보였다.
그렇게까지 동요하는 모습 처음 보았다.
“내가••• 네게 그런 생각을 하게 했구나.”
“미안하다, 아가.
그녀가 아주 힘겹게, 괴롭게 말했
다.
“정말 미안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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