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나오시면 위험합니다.” 고운이 무뚝뚝이 말했다. 그건 말 을 돌리려는 의도에 걱정을 절반쯤 섞은 것이었지만, 산아에게는 전자 의 이유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여류와 함께 왔어.”산아는 의도하지 않은 자신의 언짢 은 목소리에 조금 놀랐다. 그러나 씩 다스려지지도 않았다.
“수가 적다고 나무랄 생각 말아. 네가 믿고 맡긴 이 아니니?”
“그래! 네놈 눈에 나는 보이지도 않느냐? 내 경력이 얼마인데, 별걸 다 걱정하는구나.” 여류가 고운의 일을 제대로 수행하 지 못한다면 맡긴 네 잘못 아니나, 하며 질책하는 의미였다.
그러나 살벌한 산아와 달리 여류는 편을 들어 주는 줄로만 알고 들떠 쏘아붙였다.
여류의 말에 고운의 눈빛이 매서워 졌다. 그는 여류를 잠시 응시하고는 말했다.
“황궁 안은 호위 하나만을 대동하 여도 문제가 없으나 이곳은 궁 밖 아닙니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
니다.”
•••것도 맞는 말이지. 허나 너도 알다시피 어디 마마께서 우리가 죽 어라 하는 간언을 듣는 분이시나?” “저잣거리의 농민들 중에 일평생 수련에 정진한 여류를 꺾을 자가 있 단 말이니? 그도 아니면 귀족들이 이 나라에 하나뿐인 후계자인 나를 해치려 한다고?”
“크으, 이리 인정해 주시니 은혜가 하해와도 같습니다. 이 여류, 역시 마마께서는 저의 노고를 아실 거라 믿으며 긴 세월을 싸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홀 로 쾌활하게 주절거리던 여류가 자 신을 바라보는 눈동자 두 쌍에 뚝 멈췄다.
아무리 방정맞다 하더라도 그 또한 무사였다. 무언가 위험하다는 직감 은 제법 쓸만하다는 의미였다.
미간을 찡그린 산야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여류는 그 모습에 당황했다. 왜, 왜 화나셨지?
그는 삐걱삐걱 고개를 돌려 고운을 보0갔다. 고운의 얼굴도 더하면 더했 지 덜하지는 않았다.
다만 산야를 볼 때에는 착잡함과 격정이 서려 있던 무표정이 여류를 마주하자 죽이고 싶다는 무표정으로 바뀌었다.
왜 둘 다 그를 죽이고 싶다는 눈 빛인지는 모르겠지만, 여류는 혼란 에 빠졌다.
그러고 보니 아까 대화의 내용도 조금 이상했지?
남들에겐 그렇게 매정하면서도 둘 은 눈만 맞아도 봄바람이 솔솔 불더
“싸, 싸웁니까?”
“싸워요? 진짜?”
머리를 거치지 않고 튀어나온 질문 에 산야와 고운이 깐 것처럼 표정이 가라앉았다.
그들은 아무 말 없이 여류를 지나 쳐 걸었다. 넋이 나가 있던 여류가 금세 정신을 자리고는 후다닥 따라 왔다.
바람 소리와 새가 지저귀는 소리만 이 정적을 재웠다. 산아는 깊게 숨 을 내쉬었다.
'경솔했어.
당연하게도 산아는 후회하고 있었 다. 조금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 해 봐도 고운의 걱정이 타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산야도 없는 말을 지어 낸 것은 아니지만, 하나하나 꼬투리를 잡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유지한 짓을 했다.
산아는 그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아마 고운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는 산야만이 알았
다.
간단했다. 이번에도 서운해서.
자꾸 비밀을 만드는 게 서운하고, 그게 자신과 거리를 두려는 것 같아 承쓸해서.
어린애처럼 억지를 부렸다. 산야는 그게 민망하고 고운에게 미안했다. 기분이 상했을 텐데도 고운은 티 내지 않고 제가 먼저 굽혀 주었다. 그 탓에 산야는 저만 알고 있는 제 억지의 이유를 말할 수는 없었지 만, 제법 마음이 가라앉았으니 그에 게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한데 정말 싸우신 겁니까?”
제법 잔잔하게 가라앉았던 마음에 여류가 돌을 던진다. 그것도 아주 커다란 짱돌이다.
“정말로요? 아니, 무엇 때문에
멀리 떨어진 강가에 있던 산아에게 굳이 물수제비를 해 가며 맞추려 한 다.
“무엇인진 모르겠지만 마마께서 자 비를 베푸십시오. 사내놈들이란 원
체 그렇지 않습니까?” 기어코 산야가 맞았다.
수면이 소용돌이친다.
“내일 돌아와.”
씩씩하게 대답했던 여류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는 상황 파악이 느렸다.
하지만 곧이어 산아의 말을 이해한 여류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가 멈춰 섰지만 산야는 뒤도 돌 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마마! 소인은 일평생 황궁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열 손가락•••••• 은 넘 지만, 그래도 갑작스레 이러시면!” “번복은 없다. 네 알아서 해.”
“아니, 소인은 일평생 황궁 말고 다른 곳에 적을 둔 적이 없습니다!
아직 날이 찬데 밤이슬은 어디서 피 하라고-
“아무 데서나 자!”
산아가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그 제아 여류가 입을 다물었다.
산야와 고운은 여류를 놔두고 황궁 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돌아온 둘도, 그 둘을 맞이한 동궁의 이들도 여류 를 걱정하지 않았다.
'저잣거리가 뭐야. 망망대해에 던 져놔도 때깔 좋게 빈둥거릴 놈인 '적당한 객잔에서 실것 놀다 내일 돌아오겠군.' 산야와 고운은 아예 안중에도 없 고, 그나마 궁인들이나 여류의 생각 을 몇 번 하고는 그만두었다.
그마저도 오래가지 않은 것은 동궁 의 주인이 영 저기압이었기 때문이
다.
그 이유는 당연하게도 고운이었다. '고운이 날 피해.
저녁 식사 시간. 몇 술 뜨다 말고 내려놓은 산아를 서연이 걱정 스러운 눈으로 보았다.
그러나 산야는 그런 그녀를 배려하 지 못했다. 그만큼 심란했다.
고운은 궁에 돌아오는 동안 내내 한 마디도 하지 않더니-이건 산야 또한 그렇긴 했다.- 돌아오자마자 제 방에 틀어박혔다.
산야는 그런 고운을 굳이 건드리지 않았다. 짧은 경험이지만 이번에도 고운이 말해 주지 않을 거라는 생각 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류는 오늘 하루 황궁에 없고, 그 렇다고 다른 호위는 불편했던 산아 는 오랜만에 궁녀 몇을 대동했다.
지나가며 마주치는 이들마다 의외 라는 시선을 주었고, 산아는 그게 못내 불편했다.
고운이 어서 빨리 저 집거(?)를 끝 냈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는데, 또다시 마음이 일렁인다.
고운과 산아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항상 함께 식사했다.
그건 웬만해선 빼먹지 않는 하루의 일과 중 하나였다.
하지만 오늘 산아는 하루 종일 홀 로 식사했다.
저녁만큼은 함께 먹을 거라 생각해 함께 식사하자는 예화의 부름도 거 절했지만, 고운은 결국 얼굴을 비치 지 않았다.
그걸 눈치챈 서연이 큰 용기를 내 그녀의 식사에 동행했지만, 산야의 기분은 여전했다. “서연.”
“예, 마마.”
조용히 서연을 부르자마자 대답이 돌아왔다. 그건 서연의 배려였다.
먼저 나서서 말을 늘어놓지 않지 만, 필요하여 찾는다면 언제든 그 자리에 있는 것.
1-
서연의 눈은 무엇이든 듣겠다-1- 2' 고요했다. 산아는 그 눈을 보며 망 절였다.
'본래 안 그러던 이가 비밀이 많아 지고, 늘상 쟁기던 것에 소홀해진다 면 무엇을 뜻하는가?'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괜한 자신감 과 어렴풋이 알 것 같은 정답이 산 아의 입을 막았다.
산야는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말했다.
“식사를 끝마치면 치울 아이들을 부를 터이니 자네는 그만 나가 있 게.”
힘없는 산아의 말에 서연이 걱정스 러운 낮을 숨기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군더더기 없이 자리에서 일 어나 묵례했다.
앞에 있겠습니다. 필요하시면 부르십시오.”
그리고 정말로 서연은 문 앞을 떠 나지 않았다. 장지문 너머로 사람 인영 하나가 어른거렸다.
산야는 그걸 빤히 바라보다 밥을 한술 떠 입에 집어넣었다.
무어 큰일이 있다고 식음을 전폐하 고 있나. 밥은 먹어야지.
입이 좀 깔깔하긴 해도 숙수의 솜 씨는 여전했고, 먹다 보니 제법 입 맛이 돌았다.
그래도 많이 먹으면 체할 것 같아 산야는 적당히 배를 채우고는 물로 입을 행궜다.
음식 냄새를 더 맡기 싫어 침상에 앉아 발을 동당거리던 산야는 역시 궁인을 불러 지워야겠다고 생각했 다.
그러나 산아는 멈칫했다. 하나였던 문가의 인영이 둘로 늘어 있었다.
'엄마가 왔나?'
“게 누구나?"
마땅히 일이 없으면 어머니의 부름 에 항상 따르는 산아였다. 그러니 딸에게 무슨 일이 있나 걱정된 예화
가 찾아올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러나 대답 없이 문이 열렸다. 열 린 문 사이로 들어온 것은 고운이었
다.
“고우9”
“다른 이를 기대하셨습니까?”
들어가겠다는 말도 없이 들어온 고 운이 산야의 의아한 부름에 답했다.
농담 같은 내용이었지만 목소리가 하도 진중해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 다.
고운이 산아에게 걸어왔다. 흰 옷
감이 사락사락 쓸리는 것을 산아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고운이 입고 있는 옷은 침의였다. 격식을 갖춘 다른 옷들보다 더 얇고 간단한.
산아는 슬쩍 밖을 보았다. 이제 막 노을이 지는 시간이다.
'침의를 지금 왜?' 물론 크게 노출이 있는 건 아니지 만, 침의인데?
산아는 머릿속이 새하얘져 망부석 이 되어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 사
이 고운은 어느새 산아의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산야가 고개를 꺾어 한참을 올려다 보자 고운이 몸을 낮춰 시선을 맞춘 다. 그럼에도 산아는 조금 올려다보 아아 했다.
가까이서 고운을 본 산아는 상황도 잊고 낮게 감단했다.
고운의 피부가 잡티 하나 없이 맨 들맨들했다. 본래도 나쁜 피부는 아 니었지만 오늘은 무슨 짓을 했는지 광이 났다.
“고운, 너 피부가•••
작게 중얼거린 산아의 말에 고운이 웃는다.
“오늘은 알아보시는군요.”
어감이 뭔가 이상했다. 오늘은? 하 고 산야가 고개를 가웃했을 때, 고 운이 좀 더 고개를 내렸다.
깜짝 놀란 산아의 머릿속에는 단말 마 같은 생각 하나만이 남았다. 발 끝부터 소름이 쫙 돋았다.
둘 사이에는 한 뼘 정도의 거리가
남아 있었지만, 그럼에도 산아에게 는 너무 가까웠다.
'향유 냄새.' 산야는 가까스로 고운의 말을 조합 했다.
이전에는 틀렸지만, 오늘은 맞았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향유를 발랐는지 향이 혹 풍겼다.
그리고 조금 더, 고운이 고개를 숙 인다.
산아는 손을 뻗어 고운의 입을 들 이막았다. 팔을 다 필 필요도 없는 거리였다는 것이 또다시 산야를 당 황하게 했다.
고운이 눈빛으로 묻는다. 산아는 대답할 수 없이 웃지도 못했다. '방금 식사했잖아.' 고운이 무일 할지 짐작이 간다. 그 래서 더더욱 안 됐다.
당황한 산야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고운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더니 아주 작은 힘으로 산아의 손목을 그러쥐고는, 가법게 손바닥 에 입 맞췄다.
산야는 소리를 지르고 싶은 마음을 꾹꾹 참으며 다리에 힘을 주고 버텼
다.
'이게 뭐지?' 고운이 아니라 다른 사람인 걸까?
아직도 이능이 남아 있나? 아니면 내가 그냥 꿈을산야는 이대로 딱 기절하고 싶었 다. 다행히도 죽으란 법은 없다고, 그녀를 꿈에서 깨어나게 해 줄 지원 군은 금세 도착했다.
“산아. 여기 있니? 우리 딸이랑 자 라도 한잔할까 싶어 왔는데••• 명랑한 목소리가 이어지다 말고 뚝 끊긴다. 산야는 그 목소리가 기묘하 게도 가까이서 들렸다.
먼 복도에서 들리는 것 같지도 않 고, 심지어는 문밖에서 들리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러고 보니 아까 문 닫는 소리가 들렸던가?
귀신이 부르는 듯 음산한 목소리가 다시금 들린다.
산야는 천천히 제 시야를 가리고 있던 고운의 몸 옆으로 고개를 틀었 고, 조금 열린 문틈 사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녹회색 눈동자 한 쌍 을 발견했다.
황망하고 섬뜩한 소리가 삽시간에 고요해진 방에 울렸다.